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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진 Jul 21. 2024

16분음표의 우생학

위플래쉬 / Whiplash

'14 데미언 셔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국 독립 영화들은 이제는 하나의 장르로서 관객들에게 인식된다. 짐 자무쉬를 비롯한 80년대 뉴욕 인디부터 다양한 컬트/B급 그리고 디지털의 경계에 선 00년대를 지나 마침내 우리는 현대 아메리칸 인디 필름을 맛보게 된다. 그것들은 대부분 비교적 저가인 디지털 카메라와 저예산 그리고 실내 위주의 촬영으로 거대 예산의 상업 영화에선 느끼지 못할 가내수공업적인 스펙터클을 선사한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흥행한 미국 독립영화 <위플래쉬>는 정말로 이젠 '인디' 라는 네이밍을 단지 영화 제작 방식의 하나로 독해할 것이 아니라 개별화된 하나의 실험 장르로서 접근해야하지 않을까라는 감격을 내게 안겨준다. 과감한 편집과 부드러운 카메라 테크닉 그리고 언어적으로 탁월한 각본과 주연배우들의 명연으로 작품 속 드러밍처럼 극단적으로 미학적인 공격성을 표출하는 본작은 <블루 발렌타인> 션 베이커의 <스타렛> 등과 함께 우리가 미처 더욱 음미하고 지나가지 못한 아쉬운 컬렉션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위플래쉬>가 특히 대한민국에서 더 큰 호응을 얻었던 이유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우리가 놓쳤던 혹은 무의식적으로만 처리했던 이 작품의 놀라움과, 대한민국의 사회적 분위기를 연결시켜 독해해 보고 싶다. 추정컨대 당신은 <위플래쉬>에 대해 놓친 것이 분명히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시청각적 설계의 청사진



<위플래쉬>를 보며 가슴이 쿵쿵거리고 당장이라도 플렛처 교수를 떄려눕히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낀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는 물론 각본의 풍부함과 주연배우들의 활화산 같은 연기에도 기인하는 부분이겠지만 우리는 이 영화가 가진 시각/청각적인 설계를 인지해야 할 필요가 분명 있다.


영화의 편집은 뮤직비디오와는 다르게 미학적인 고려를 더욱이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영화편집은 어쩌면 극의 이야기 자체 혹은 받아들여지는 인상까지 수정시켜버릴 수 있기 때문에 더더욱 신중하고 남발되지 말아야 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런 보수적인 금기에 대항하는 젊은 영화들이 지난 2000년 <레퀴엠>을 필두로 몇몇 확인되었다. 본작도 역시 그러한 흐름에 편승하며, 더 넓게는 나홍진의 <추격자>, <황해>, 브라질의 <시티 오브 갓> 등의 기류들까지도 관찰가능하다.


<위플래쉬>의 편집에서 리듬감이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두 개로 나누어보자면 사운드트랙과의 일치 그리고 상징적 쇼트의 삽입에 있다. 배경에 흐르는 음악의 음표에 맞추어서 영상을 딱딱 재단하는 것은 매우 과감하다. 이는 자칫하면 영상을 뭉개버리고 뮤직비디오적인 쾌감만을 추구하는 행위처럼 인지될 수 있지만 <위플래쉬>는 가장 올바른 타이밍에만 영리하게 컷을 함으로써 영화 전체의 박자감을 관객이 부담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안내한다.


상징적 쇼트의 삽입은 내가 방금 막 지어낸 어휘인데 이 영화의 편집기술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워딩이 아닌가 생각한다. 네이먼이 피나는 연습을 하거나 플렛처 교수가 세 명의 드러머를 학대하는 영화의 주요한 씬들에서는 여김없이 이러한 편집이 사용된다. 연습 씬에서는 네이먼의 자학적인 육체뿐만이 아니라 낙서와 마킹으로 점철된 악보, 점점 녹아내리는 얼음물, 남아나지 않는 반창고 등을 포착한 영상을 사이사이에 지속적으로 삽입시킨다. 이는 몇 개의 간단한 상징들만으로도 인물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가를 효율적으로 설명함과 동시에 그 감정 이입을 아주 쉽게 만들어주는 똑똑한 방법이다. 연주의 끝에선 항상 심벌즈가 울리는 숏으로 마무리된다던지 하는 것도 이런 설계의 일환이다.


이런 두 개의 편집 기둥은 영화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건설되어 있으며 중간중간 셰이키 캠, 핸드헬드, 극단적인 클로즈업 그리고 몽타주 기법(대런 애러노프스키가 떠오르기도 한다)등 다양한 영상기법을 난사함으로써 어쩌면 이 영화의 주요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는 분노와 광기를 연기뿐만이 아니라 영상언어적으로 재서술해 격정적인 몰입도와 의외의 신선함을 관객에게 제안한다. 단언컨대 악단의 연주 장면을 데미언 셔젤만큼 멋있게 담는 감독은 없을 것이다.


또한 드럼이 영화의 소재로 선택된 것 또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이냐리투의 <버드맨>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드럼 사운드는 영화의 컷과 가장 유사한 질감을 지닌다. 재즈 드럼으로만 구성된 사운드트랙은 영화에서 끊임없이 재생되어 짧은 시간에 많은 컷이 제시되는 영화의 특징을 청각적으로 형상화한다. 우리의 가슴이 시종일관 둥둥거렸던 이유는 단지 플렛처 교수가 나쁜 놈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본작에서 미친듯이 돌출되는 과격한 킥과 심벌즈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진정한 영화는 보는 것도 즐겁지만 듣는 것에서 그 탁월함이 비롯되기 마련이다. 내 신조는 그렇다.





그렇다면 영상 자체의 톤은 어떠했는가? 영화의 빠른 연주 장면이 더욱 매혹적인 건 플렛처 교수가 등장하는 모든 씬에 사용되는 금관악기 빛깔의 컬러 그레이딩 덕이다. 영화에선 녹색(혹은 하얀색)과 리드와 트럼펫의 황금빛이 시종일관 대립한다. 혼자, 가족, 여친과 있을 때의 네이먼은 목이 길게 늘어진 흰 반팔을 입고 있고 주변 배경은 초록 빛의 네온사인으로 뒤덮이거나 햇빛으로 하얗게 탈색되어 있다. 이는 네이먼이 본질적으로 가진 아마추어리즘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반면 플렛처 교수는 강력한 이두와 전완근 그리고 올 블랙의 패션으로 무장해 순수한 어린 양인 네이먼을 매혹적인 황금빛의 고문실로 인도한다. 네이먼의 목덜미 옆에서 패드립을 내뱉는 플렛처 교수의 모습은 마치 사냥을 나선 뱀파이어의 모습과도 유사해 보인다(영화에서 계속 제시되는 혈흔의 이미지는 이 상상이 허황된 것은 아니다라고 보증해줄 것이다).


그는 네이먼을 자신과 같은 '종족' 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이는 여친을 무자비하게 까버리는 네이먼과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플렛처 교수의 대사로도 확인된다. 엔딩 장면에서 좁은 틈 사이로 네이먼의 폭주를 지켜보는 아버지의 눈빛은 오묘하다. 아들이 괴물이 되어가는 것을 보는 아버지의 눈길도 모른 채 네이먼은 끝내 황금빛의 조명을 받으며 제 2의 찰리 파커가 되어 간다. 감독이 택한 색상의 감각이 꽤 신선해 놀랐으며(어느 누가 초록색과 노란색을 대비시키겠는가?)  금관악기와 가장 비슷한 색인 노란색을 플렛처 교수의 컬러로 잡은 것은 굉장히 대단한 작가적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위플래쉬>의 시청각 설계의 대단함을 당신은 다시금 체험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무례한 우생학



이 영화를 보고 드는 찜찜한 생각 하나. 플렛처 교수의 폭정을 보면서 자신의 나태를 바로잡을 때의 관객이 느끼는 부끄러움은 사실 감독이 관객에게 침범한 무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물론 플렛처 교수와 같은 예술계에 산재해있는 강압적인 멘토들을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로 만든 영화임은 분명하지만 그 과정에서 분명히 플렛처와 앤드류만큼 미치지 않고서는 최고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암시된다.


이는 영화가 ‘공부 유전자설’ 혹은 ‘재능충’ 관련된 담론에 대해 어느 정도로는 선천적 우월함에 대한 찬양을 긍정하는 쪽으로 편중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질문이 하나 있다. 플렛처 교수를 악역으로 설정해 놓은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면 그 반대에 놓인 네이먼의 여친, 아버지는 악역에 맞서는 선인으로 상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의문이다.


그러나 또한 분명히, 그들은(이런 말은 위험할 지도 모르지만)영화에서 '멍청하게' 묘사된다. 이제 그만 집에 가자는 아버지의 멘트는 플렛처 교수가 나에게 가한 세뇌를 거두어 보더라도 서사적으로 굉장히 패배적이고 비루하게 비춰진다(또한 네이먼이 음악을 그만두고 변변찮게 알바나 하는 묘사는 역시 의구심을 가중시킨다). 본작은 한계 돌파를 위한 채찍질에 의문을 제기하지만 역으로 그 채찍질 없이는 어떠한 천재도 탄생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구조적인 모순을 품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된다. 따라서 <위플래쉬>는 나태와 채찍질을 이야기 하는 측면에서 꽤 '예의없으며' 예술가의 탄생에 대한 낡은 우생학적 담론을 은근하게 찬동하고 있음이 확인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일반적으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관객들과는 다른 나 같은 노재능‘충’은 이런 우생학적인 시사에 대해 불쾌함을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을 말한다고 해서 윤리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에 대해 특히 한국인이 열광하는 이유를 드디어 서술하자면 명백한 무례를 일명 ‘사이다’ 라 여기며 남발하는 도파민 중독과 유교사상 특유의 입신양명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한국인의 출세주의 공식에선 나태는 혐오의 대상이 되고 무례에 가까운 직언은 사이다로 간주된다. 난 애국자로서 그런 우악스런 기조를 거부하고 싶다. 아마도 이 영화의 최초개봉 당시에는 플렛처 교수의 가르침이 이 영화의 주된 주제가 아닌가 오독하는 관객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고 그런 오독을 싫어했다. 허나 이번 재관람을 계기로 사실 본작 영화가 그것에 되려 편중되어 있었지는 않았을까는 허무함을 발견했다. 마지막 장면 화려한 연주 끝에도 우리가 결코 박수소리를 들을 수 없음은 우리가 그들만의 예술적 도약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소외감마저 들게 하는 것 같다. 러닝타임을 위한 길이조절 땜시 잘려나간 서사로 인한 스토리의 비현실성과 함께(네이먼은 어쩌다가 갑자기 드럼에 각성했는데?) 이 무례함은 보는 나를 좀 언짢게 하긴 했다.


 



그렇지만 이런 것은 개인의 관점 차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렇게라도 믿어서 이 영화를 미워하고 싶지가 않다. <위플래쉬>는 상기한 바와 같이 분명 대단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문득 이런 작품을 만날 때마다 한국 독립 영화가 부끄러워지는 건 기분 탓일까. 탁월한 리듬감의 본작은 영화팬이라면 쉽게 거부할 수가 없을 만한 것임은 역시 분명하다. 각본과 연기는 수박 겉핥기 식으로 넘겼지만 그것들 또한 대단하다는 걸 누가 모르겠지는 않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국의 <위플래쉬>는 어디에 있을까 고민이 드는 밤이다.


<위플래쉬>는 탁월한 리듬감의 시청각적 설계로 관객을 끌어 당기는 심리 스릴러이자, 예술의 채찍질에 그리고 재능과 우열의 이분법을 결코 탈피하지는 못한 우생학 촌극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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