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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치 Jan 03. 2022

당근마켓

약간의 픽션


-10분 뒤 도착이요.

-도착하면 챗 주세요. 바로 나갈게요.

-넵.


민트초코의 당근마켓 매너온도는 42.5도. 아주 높지도, 아주 낮지도 않은 온도이다. 자취방에 두려고 샀던 조명이나 전자제품 중 잘 쓰지 않게 된 것들을 몇 번 거래하고, 입이 짧고 직접 요리하지 않는 탓에 유통기한이 간당간당하게 남은 선물 세트나 통조림 같은 걸 자주 나눔한 이후에 재미를 붙여 가끔씩 어플을 켜 누가 뭘 팔고 누가 뭘 사는지 구경하기 시작했다. 민초(요즘은 다들 민트초코를 민초라고 부르니 우리도 민초라고 하자)는 아침나절 급하게 당근 거래를 하러 가는 길이다. 지금 시간은 오전 7시, 두 시간 뒤 오전 9시엔 이번 학기 마지막 전공 팀플 과제의 발표가 있었다. 아무리 인생사 새옹지마라지만, 하필 어젯밤에는 갑자기 가불을 받아 연락 두절이 된 다른 알바생 대신 땜빵 알바를 해야 했고(이마저도 우유부단한 자신의 탓이라고 민초는 생각했다), 땜빵 알바도 서러워 죽겠는데 왠지 모를 불똥이 튄 것처럼 알바하는 내내 애인과도 카톡으로 한바탕 싸워야만 했다. 애인은 마음이 풀리지 않으면 통 잠에 들지를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싸움이 길어지는 건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새벽 두 시 퇴근한 뒤 애인의 집으로 향했다. 애인의 집은 한 층에 아홉 개의 원룸이 있는 다가구주택이다. 여성전용으로 운영 중인 탓에 보통 다른 세입자들의 애인들은 공동 현관에서 뜨거운 작별의 키스를 퍼붓다 돌아갔으나, 민초는 눈에 띄지 않게 공동 현관을 통과할 수 있었다. 새벽 두 시 반에 흡연하러 바깥으로 나서는 세입자라도 마주치는 날에는 둘 다 깜짝 놀라 뒤로 자빠질 테다. 민초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305호 앞이었다. 똑—똑. 민초는 리드미컬하게 현관을 두드렸다. 애인에게는 만나서 얘기하고 싶으니 네가 괜찮다고 말해주면 집으로 가겠다고 카톡을 보내 뒀지만, 애인은 정확히 16분 뒤 카톡을 읽고 28분째 답을 하지 않았다.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만나는 9개월 동안 몇 번의 다툼과 대화 끝에, 민초는 애인의 감정이 녹아내리는 어떤 루틴을 알아냈고, 다시금 몇 번의 확인과 검증을 통해 애인에게도 분명하게 부탁해 둔 내용이 있었는데, 그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는, 싸우더라도 꼭 솔직하게 말해줄 것. 대충 네가 알아서 눈치로 잘해, 오지 말라고 말해도 왔어야지, 가라고 해도 가지 말았어야지, 그렇게 일관하지 말아 줄 것. 둘째로는 아무리 화가 나도 피하거나 무시하지 말아 줘, 그러지 마, 지민아……. 나랑 약속했잖아. 민초의 무릎이 후들거렸다. 너무 오랜 시간 깨있었던 탓이다. 지민의 집 현관 안쪽에서는 몇 번의 달그락거리는 소음이 들렸으나, 두 번째 노크에도 달리 대답이 없었다. ‘지민아’ 하고 카톡을 보내자 안쪽에서 우웅 하는 진동이 느껴졌다. ‘나 밖인데’, ‘문 열어줄 수 있어?’ 그다음 보낸 카톡들은 1이 금세 사라졌다. 물론 민초의 가방에는 지민 집의 마스터키도 있었고, 지민 집과 민초의 집 비밀번호도 만나기 시작한 날짜 여섯 자리로 똑같지만, 민초는 지민이 허락하지 않은 이상 그 집 문을 함부로 열고 들어갈 수 없었다. 민초의 상식이었다. 지민은 조금 달랐다. 민초가 어느 면에서는 보수적인 태도로 굴고, 본인을 독점하려 몰두하고, 쉽게 질투하길 원했다. 지민은 안쪽에서 온통 눈물범벅이 된 채로 민초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초가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와 왜 연락을 안 받냐며 어깰 잡아끌고, 자신을 꼭 껴안은 채로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사과하기를. 민초는 몇 번의 대화 이후에 그런 역할극이 불편하다고 명확히 피력했다. 학습된 거야. 민초는 몇 번씩이나 말했다. 지민아. 우린 역할놀이하는 게 아냐. 이건 아빠 엄마 놀이도 아니고 정상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도 아냐. 하지만 민초를 만나기 전 지민의 연애는 모두 그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회피하는 성향이 강한 지민이 문을 걸어 잠그고 방 안에 숨으면,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식으로 폭력을 정당화했던 지민의 전 애인들은 문을 때려 부술 것처럼 두드렸다. 지민은 두려움과 수치심과 애증이 다 뒤섞인 채 문을 열고, 아, 화해, 화해만 이루어졌음 좋았으련만 역할놀이에 너무 몰입한 전 애인 중 하나가 지민의 뺨을 때리는 일이 일어난다. 그 후 지민은 여성전용 다가구주택으로 이사했다. 휴대폰 번호를 바꾸고 모든 SNS 계정을 없앤 뒤 휴학한 채로 지내다 민초를 만났다. 지민의 전 애인은 아직 지민과 헤어진 걸 믿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도 돈다. 그래서… 지민은 여태 현관 바로 앞에 쪼그려 앉아 눈이 퉁퉁 부은 채로 무릎을 껴안고 있는 것이다. 도저히 일어나 현관을 열 자신도, 휴대폰으로 ‘알겠으니 얼른 들어와’라고 답장할 용기도 없이 덜덜 떨고 있을 뿐이었다. 바깥에서는 이따금 민초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쟤는 두 번 이상 노크도 하질 않는다. 건물에 사는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할까 봐. 그냥 너랑 나만 생각하면 안 돼? 지금 눈치 볼 사람이 누구야? 지민은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러기엔 하루 종일 굶었고, 누워만 있다 일어나 어지럽고 서럽기만 했다. 볼썽사나워. 왜 이렇게 됐지. 시간은 얼마나 지났을까. 지민은 두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힘없는 발소리가 멀어지는 게 들렸다. 3층… 2층… 아니, 지금 여기까지 와놓고 가버리는 거야? 지민은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를 기운으로 있는 힘껏 일어나 현관을 세차게 열어젖혔다. 민초가 보이질 않았다. 맨발로 냅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공동 현관까지 열고 뛰쳐나가자 몇 걸음 정도 앞서가던 민초가 큰 기척에 놀라 돌아보곤 토끼눈을 떴다. 지민아! 지민은 민초의 어깰 꼭 붙잡고 숨을 몰아쉬다가, 흐, 으, 으으, 으으… 하며 눈물을 터트렸다. 민초는 재빨리 운동화를 벗었다. 지민의 발바닥을 툭툭 털어주고 두 사이즈는 큰 운동화를 신겨줬다. 왜 갑자기 뛰어나왔어. 나 너무 목말라서 마실 거 사러 간 건데… 그 말에 지민의 얼굴이 빨개진다. 손등을 덮는 소매가 다 젖도록 눈물이 묻어 나온다. 민초는 안쪽 어딘가가 급속도로 따끔거리면서 눈시울이 시큰해짐을 느낀다. 지민아, 울지 마. 그만 울어… 가자. 가서 같이 있자. 민초는 지민의 오른손을 꼭 잡은 채로, 양말발을 옮겨 집으로 향한다. 몇 걸음 채 걷다 말고 허릴 굽혀 지민에게 등을 보여준다. 지민은 고갤 내젓는다. 민초는 재차, 아 얼른. 얼른! 그럼 지민은 안도감과 민망함에 딸꾹질을 연신 하며 민초에게 업히고, 민초는 큰일 났다… 진짜 내일 어떡하지… 하는 속마음과 함께 걸음을 옮긴다. 지민은 긴장이 풀리고 온 몸의 기운이 쭉 빠져 기절하듯 침대에 누웠고, 그런 지민을 일으켜 목을 축이게 한 뒤 물수건을 적셔 얼굴을 닦아주다 문득 시계를 보니… 아… 벌써 여섯 시 다 되어가는데… 진짜 망했다… 민초는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을 정도로 혼미하다. 이대로 발표하러 갔다가는 정말 나머지 팀원 세 명 모두에게 공공의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황급히 당근마켓을 켰다. 매물이 있으려나. ‘잠’, ‘수면’ 금지된 키워드로는 나오질 않다가, 스쳐 지나가듯 들었던 ‘카페인’ 키워드를 검색하니 매물 하나가 보였다. ‘카페인 7시간 판매합니다.’ 재고 따질 것도 없이 채팅을 걸었다. 제발… 다행히 곧바로 답장이 왔다. ‘7시간 가격 80000원이고요. 어플이나 워치로 바로 확인 가능합니다.’ 헉. 8만 원. 민초가 컨택한 사람 중에 가장 센 가격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거래는 어디서 하시나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거래 약속은 금방 잡을 수 있었다. 판매자는 어젯밤도 잘 잔 모양이었다. 그새 지민은 깊게 잠든 듯했다. 며칠 내내 아예 잠을 못 잔 것 같던데. 민초는 손을 뻗어 지민의 베개 모양을 매만져 주고,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두 가닥 떼어냈다. 짧은 샤워를 마치고는 냅다 골목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잠을 구입하고 나면 학교로 가 발표 자료를 한 번 더 훑을 테다. 정신만 차리면 문제없다. 준비를 철저히 해뒀으니 걱정도 없다. 발표가 끝나면 종강이다. 몇 주, 아니 며칠, 아니 아니 몇 시간 만이라도 자유로울 테다. 맛있는 걸 사서 돌아가야지. 지민을 꼭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말해줘야지. 몇 번을 묻더라도 몇 번이고 다시 말해줘야지. 민초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다 왔습니다. 계좌 알려주시면 계좌이체 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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