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봄의 기온은 비슷하다. 간절기라는 것도.
입는 옷이 변하는 것도 비슷하다. 가을은 반팔에서 긴팔로. 봄은 긴팔에서 반팔로.
그런데 이상하게 같은 기온에서 버스커버스커의 <벚꽃 엔딩>을 듣는데, 봄에 들었던 느낌이 아니다. 이상하지. 비슷한 기온인데. 계절이 주는 필연성은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이 필연성이 사람을 집어삼키기도 한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필연성이라는 가면을 쓴 개인과 그 개인들이 모인 사회의 욕심이다.
라엘이는 가끔 청소를 열심히 한다. 16개월을 넘어서 어른 흉내를 내는건지 아니면 강요(?)인지는 모르겠지만 청소돌돌이나 물티슈를 가지고 열심히 방을 훔친다. 추석이라 엄마 집에 갔는데, 거기서도 라엘이가 열심히 휴지로 방을 닦기 시작했다. 모두가 힘든데 청소하지 말라며 라엘이를 열심히 말리고 있는데, 엄마가 웃으면서 말했다.
"천상 여자구나"
엄마가 이 말을 어떤 의미에서 했는지 나는 안다. 엄마는 이미 내가 결혼하기 전부터 '너는 내 자식이지만 내 소유가 아니'라고 말해주었던 멋진 엄마다. 그렇지만 엄마가 자라온 시대적 언어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엄마의 삶을 돌아보면, 남성위주로 기술된 사회 속에서 여성으로서 자신에게 철저하게 부여된 역할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시대가 만들어낸 언어를 들으면서.
청소는 엄마의 몫이었다. 자연스레 주부라는 이름이 뒤따랐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끊임없이 반복되는 집안일은 엄마의 것이었다. 그나마 시대가 남자에게 부여했던(?) 못을 박는 일이나 힘을 쓰는 일도 '우리 집'이라는 작은 공간에서는 모두 엄마에게 집중되었다. 김민섭 작가는 "언어가 한 사람의 몸을 만들어 낸다('훈의시대', 63.)"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따라 청소는 엄마의 필연성이 되었다.
명절 모습도 뻔하다. 아빠의 집안도 가부장제를 잘 지키는 집안이다보니, 남자들만 편한 명절을 늘 맞이하였다. 그리고 나도 그 일원이었다.
이제 '계절의 필연성'이 정치 공동체로 확장될 때다. 버나드 맨더빌은 말했다. "나라 전체로서는 정직함에 기댈 것이 아니라 필연성에 기대야 한다. 잘 살고 못 사는 것을 공무원과 정치인의 미덕과 양심에 기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그들의 법질서는 언제까지나 불안할 것이다."(김웅, '검사내전', 349)
김영민 교수는 "정치는 구분에서 출발하며, 구분을 지음에 의해 비로소 복수의 단위들이 생겨나고, 복수의 단위들이 존재할 때 비로소 관계가 존재한다. 그 관계가 특유한 정치의 역학을 만든다('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223.)"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욕심의 합이 개인을 억압하는 시대의 언어를 만들지 못하도록 공고한 필연성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김영민 교수가 말한 "앙상해진 도덕적 진정성에 너무 의지하지 않으면서 그 구분을 재정의하는 일"이다.
인간은 자유인(정치적 의미로써의)으로써 의미를 가질 때 살아갈 힘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