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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라 Oct 31. 2023

흑백 만화, 일탈, 구원

젊은 만화가 테마단편집 『그 길로 갈 바엔』

흑백만화, 일탈, 구원

만화는 종종 일탈과 동일시된다. 책을 많이 읽으랬지, 만화책을 읽으랬냐던 어른들. 만화를 읽고 있으면 괜히 신경 쓰이는 주변의 시선, 재미있는 작품에 푹 빠져 있다가도 어쩐지 시간을 낭비했다는 감각. 효율과 능률을 따지는 사회에서 만화를 읽는 행위는 그 자체로 일탈이다.

문학동네의 두 번째  젊은 만화가 테마단편집 『그 길로 갈 바엔』은 일탈이라는 키워드로 엮인 다섯 편의 단편 만화를 선보였다.  재활용, 약국, 서글, 각종모에화, 하양지 작가가 참여했다. 익숙하거나 정해진 길을 향해 ‘그 길로 갈 바엔’이라고 말하며 시작되는 일탈이 인물의 삶에 가져오는 변화를 그려낸다. 

또 처음부터 흑백 지면 만화로 기획하여, 컬러 웹툰이 익숙하고 당연한 세대에게 이 단편집을 선택하는 것이 아주 넓은 의미의 일탈이 되도록 유도한 흥미로운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각 단편 속 주인공들이 낯선 길에 들어서는 선택을 하듯, 독자 역시 평소와 다르게 화면 너머가 아닌 종이 너머의 세계를 여행하는 선택을 한다. 일탈은 책 안팎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며 독자의 읽기 경험의 주요한 특징으로 기능하게 된다. 

그러나 본 글은 여기서 더 나아가, 『그 길로 갈 바엔』의 일탈이 방향성을 가지고 있음을 주장한다. 그 방향은 누군가를 우울이나 불행으로부터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향한다.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길에서 탈출하는 일탈은 곤경에 빠진 타인 혹은 자기 자신을 구하려는 욕망과 끊임없이 맞물린다

상이한 주제를 다루는 독립적인 작품들을 하나의 렌즈를 통해 분석하는 것은 어쩌면 부당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각 작품의 주인공들은 분명 자신의 가까운 사람을, 전혀 모르는 사람을, 혹은 자기 자신을 구하려 한다. 원래 걸어야 하는 길, 그저 따라가야 하는 익숙한 궤도가 오히려 구속이 될 때, 궤도로부터의 일탈은 그 자체로 구원이 된다. 마음을 짓누르고 억압하는 일상에서 뛰쳐나가는 일탈의 욕망은 예기치 못한 즐거움 혹은 두려움으로 이어지지만, 어떤 식으로든 전과는 다른 시간을 경험하게 한다. 일탈과 구원의 키워드는 흑백 지면 만화라는 매체와도 강렬하게 공명하며 독자를 잠시나마 그의 현실로부터 구출하고 다른 세계, 다른 길, 다른 선택을 사유할 수 있게 해 준다. 아래부터는 『그 길로 갈 바엔』의 각 단편을 순차적으로 짚어보며 일탈과 구원이 어떻게 흑백 만화라는 특수한 매체 안에서 재현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주의: 이 글은 해당 작품의 줄거리와 결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재활용 작가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재활용 작가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은 독자가 가장 처음 만나게 될 작품인 만큼 가장 진입장벽이 낮은 서사로, 경쾌하고 가벼운 구출 이야기를 담는다. 여자친구에게 대신 이별 통보를 하고 와 달라는 친오빠 남도영의 어이없는 부탁을 받은 남도경은 수고비에 넘어가 못 이기는 척 길을 나선다. 그런데 오빠의 여자친구 서영하의 학교에 도착하니, 그곳엔 영하가 아닌 영하의 여동생 서성하가 서 있다. 성하는 남자친구를 데려온 일을 선생님에게 들켜 곤경에 빠진 언니 영하를 버리고 달아난 도영의 한심함을 탓한다. 조용히 헤어져 문제를 얼버무리려는 언니오빠 커플과 달리, 영하가 일방적으로 당했다고 생각하는 성하는 도영의 사과를 받아내려 한다.

당사자들은 괜찮다는데도 기어코 사과를 받아내겠다는 성하를 포기시키기 위해 도경은 나름의 작전을 세운다. 도경은 눈에 띄는 곳에 성하를 불러내 언쟁을 벌이고는 둘을 발견한 선생님을 피해 같이 도망치던 중 일부러 넘어진다. 영하를 두고 먼저 달아나 버린 도영의 비겁한 행위를 성하 스스로 따라 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런데 계획은 실패한다. 성하가 친구를 버리고 도망갈 수는 없다며 도경을 업고 뛰어간 것이다. 다혈질이지만 정이 많고, 똑부러지게 주관을 말하며, 곤경에 빠진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성하를 보며 도경은 적잖이 충격을 받는다.  “미루고 피하면 언젠가 흐지부지 알아서 사라질 일을 확실히 하고, 파헤치고, 소란스럽게 하는” 성하의 올곧음을 동경하게 된다.  그리고 도영과 영하, 자신과 성하를 한 곳에 불러 모아 제대로 된 자초지종을 듣기로 결심한다. 돈을 위해 (도경) 혹은 잘못한 사람의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성하) 형제자매의 갈등을 대신 해결하려 뛰어다니는 여동생들의 작전이 본디의 목적에서 벗어나 예상치 못한 결과에 도달하는 과정이 작품의 주요 서사를 이룬다. 

갈등을 회피하려는 영하와 도영과 달리 모든 것을 확실히 하고자 하는 성하는 서사 전체를 움직이는 주요 동력이다. 성하는 상황을 통제하려는 성미가 있고 지레짐작도 자주 하는 편이지만, 그가 움직인 덕에 주변인 역시 더 만족스러운 결말을 향할 수 있었다. 현 상태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상황, 새로운 관계의 국면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애매했던 마음은 정리해 연인 관계를 건강하게 마무리하고, 곤경에 빠지면 서로 도와 함께 탈출하는 관계로. 

우당탕탕 학교를 오가며 작전을 수행하던 성하와 도경 덕에, 네 사람의 관계는 모든 오해를 풀고 이성애 프레임에 흡수되지 않는 우정으로 귀결된다. 다같이 반성문을 쓰는 결말이지만, 발에 불이 나게 뛰어다닌 점심 시간 땡땡이와, 미련 없는 깔끔한 마무리를 위해 그리고 서로를 위해 움직인 기억은 네 명의 인물 모두에게 즐거운 추억으로 남는다. 

작품은 발랄하고 활기찬 학생들의 이야기를 단순한 인물 디자인으로 카툰화하여 독자들이 쉽게 이입할 수 있게 그려졌다. 직관적이어서 이해하기 쉬운 스크린 톤과 어렵지 않은 언어 역시 작품의 가독성을 높여 특히 청소년 독자들이 자신들의 일상과 가까운 이야기로 읽어낼 수 있도록 했다. 

주목할만한 것은, 이 작품이 청소년의 일탈을 쉬이 비행(非行)이나 악행과 동일시하는 선입견에 제동을 건다는 사실이다. 작품 속 누구도 누군가를 곤란하게 하거나 따돌리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이들은 서로를 구하기 위해 그렇게나 열심히 소리치고 점심시간마다 두 학교를 오가며 뛰어다니는 것이다.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은 청소년 서사 특유의 에너지로 독자를 감화시키며 다소 엉뚱하지만 따뜻한 일탈의 경험을 목격하고 오래 곱씹을 수 있도록 한다. 일탈, 특히 학생들의 일탈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던 독자들의 습관에 의문을 던지며, 구출과 도움이라는 키워드를 일탈과 새로이 연결해 사유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는 면에서 일탈의 의미를 재정의하는 전체 단편집의 시작점을 담당하기에 적합한 작품이다. 


약국 작가의 「명왕성의 기억」

두 번째 작품인 「명왕성의 기억」은 가부장제와 남아선호사상이 당연한 가정에서 딸이라는 이유로 “노골적이고 미묘하고 치사한 차별”을 받아온 주인공 ‘김명희’의 이야기다.  부친은 남동생의 기타 학원비는 내주면서 명희의 수학여행비는 주지 않았고, 명희의 고등학교 졸업식엔 가족 중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의 생일은 남동생의 생일과 가깝다는 이유로 흐지부지 넘어갔고, 등록금을 지원받는 남동생들과 달리 장학금을 받아 가며 알바와 과외를 겸하면서 대학에 다녔다. 남동생들과 부친은 놀고 먹기만 하는 명절에 어머니를 따라 집안일을 도맡았다. 그러다 발견한 가족 앨범에 자신의 유년기 사진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절망감은 명희의 마음 한편에 화를 끓였다. 

부친이 죽어서까지 남동생들에겐 집과 가게를 남기면서 자신에겐 결혼 반지 하나를 남겼다는 사실에 폭발한 명희는, 상복을 입은 그대로 장례식을 뛰쳐나와 놀이공원으로 달려온다. 그 외에는 달리 스스로를 구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정작 놀이공원에서도 명희는 충분히 즐기지 못한다. 나름의 이유로 명왕성을 왜성으로 강등한 과학자들처럼, 여자라는 이유로 딸을 덜 소중한 자식으로 강등한 부모. 그 부모의 궤도로부터 완벽하게 탈출할 수가 없다. 죄책감과 애증이라는 이름의 인력이 그의 발걸음을 집요하게 따라잡는다. 그는 가족의 궤도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나, 아직 자신만의 궤도를 찾지 못해 무력한 상태다. 

약국 작가는 잉크 펜을 이용해 수작업으로 그려내는 특유의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선화와 가로로 넓게 펼쳐지는 두 페이지 지면을 빈틈없이 채우는 강렬한 연출을 사용하여 명희의 존재론적 고통의 우주로 독자를 순식간에 빨아들인다. 남동생들의 즐거웠던 유년기를 기념하는 사진들로 가득한 98쪽은 독자가 사진들 속 명희의 흔적을 적극적으로 찾게 유도하는 동시에 그 기대를 의도적으로 꺾음으로써 명희의 고독감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그리고 명희 없는 가족사진들이 명희의 존재를 추격하는 듯한 114~115쪽의 연출은 가족이라는 이유로 폭력과 차별을 영영 벗어날 수 없는 명희의 환멸에 속도감을 입혀 독자의 마음을 강타한다. 질식할 것 같은 사진의 무더기가 뒤로 하는 검은 배경에서 뛰쳐나와, 검은 상복을 입고 흰 페이지로 돌진하는 명희가 보인다. 

하지만 극명한 흑과 백의 대비는, 단순히 상복이 검다는 사실적인 묘사를 넘어 명희의 “존재에서 비롯된 단단함, 무게감”을 표현한다 (윤보경 181쪽). 부서질 것 같은 기분일지라도 흑백 만화의 검은색은 그의 존재를 긍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새로운 배경이 될 흰 지면은 명희의 미래가 아주 어둡기만 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술을 진탕 마시고 널브러진 명희를 깨우다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우주인이다. 정확히 말하면 놀이공원 즉석사진 홍보를 위해 우주복을 입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익명의 여성이다. 명희의 인생사를 듣고 있던 그는 그동안 제대로 생일을 축하받은 적 없는 명희를 위해 달려 나가 생일 케이크를 사 온다. 그리고 퍼레이드 음악 소리에 맞춰 명희와 우주인은 빙글빙글 돌며 서툴고 우스운 왈츠를 추기 시작한다. 내레이션은 이들의 모습을 명왕성과 그의 위성 카론에 비유하며, 가부장적 위계가 지지하고 있던 부친의 태양계가 아닌 명희 자신을 둘러싸고 형성되는 작은 궤도의 존재를 독자에게 인식시킨다. 특이한 것은, 카론은 명왕성을 중심으로 수동적으로 도는 것이 아니며, 명왕성 역시 궤도의 구심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서로를 바라보며 동시에 움직이는 명왕성과 카론처럼, 명희는 한 명의 존재가 다른 한 명에게 종속되지 않고도 유지되는 편안하고 즐거운 관계의 궤도를 발견하게 된다. 원래의 궤도에서 내던져졌기 때문에, 그리고 스스로 그 궤도를 거부하고 다른 길로 가기를 선택했기 때문에, 명희의 일탈은 그 자신을 구원한다. 

명희는 일탈을 통해 스스로를 구함으로써 존재의 단단함을 증명하고, 생판 남인 그를 위해 케이크를 사 온 익명의 여성은 명희의 자기 구원이 타인의 친절함과 새로운 관계를 통해 지속될 수 있음을 보증한다. 그들의 왈츠는 새카만 공허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별들을 닮았기에, 흑백 연출은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서글 작가의 「토하시는 대로」

모든 구원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억압받는 모두가 탈출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서글 작가는 이 딜레마를 기이한 초능력을 가진 익명의 무녀와 그의 여동생 ‘민주’의 이야기로 풀어낸다. 

무녀의 능력은 물체를 토해내는 것이다. 때로는 개구리나 뱀처럼 살아있는 동물을 토하기도 한다. 무녀의 이모는 그 토사물이 신의 메시지라고 주장하며 떼돈을 벌어들인다. 어린 민주는 이 모든 것이 진정 신의 뜻이라고 믿으며, 신의 선택을 받은 언니를 부러워하는 한편 이모가 만든 온갖 규칙을 성스러운 명령으로 받들며 철저히 지키고 있다. 이모는 정규 교육의 기회도 박탈하며 자매를 집에 감금하고 늦잠을 잤다는 이유로 민주를 매질하지만, 그런 이모에게 화를 내는 무녀를 뜯어말려 이모에게 순종하라고 타박하는 것은 언제나 민주다. 

자매를 이용해 돈을 벌려는 이모의 계략을 알고 있는 무녀는 가까스로 동생과 함께 탈출을 시도한다. 

하지만 복종하는 습관이 이미 신앙의 경지에 이른 민주는 언니의 행동에 위화감을 느끼고 규칙을 어기는 일탈을 두려워하며 언니가 신의 뜻을 어기고 있다고 반발한다. 결국 언니는 모든 진실을 알려준다. 곧 물체를 토해내는 능력은 자신이 성인이 되면 “가장 가까운 친족이자 여자인 존재에게 옮겨간다”는 사실, 즉 여동생인 민주가 다음 무녀가 될 운명이란 것이다.  

동생이 이모의 돈 벌어다 주는 기계로 살게 두지 않겠다는 언니의 말은 감동적이다. 그런데 민주를 감동시키는 것은 언니의 사랑이 아니다. 일평생을 욕망한 언니의 능력이 곧 자신의 것이 된다는 말에 민주의 동공은 커지고 머리카락은 바람에 거세게 휘날린다. 민주를 설득하기 위한 장치로 언니가 토해냈던 달걀의 의미는 뒤틀린다. 사행성 종교로부터의 탈출을 품고 있던 알은, 바로 그 비틀린 종교를 수호할 지도자를 지목하는 계시가 된다. 언니는 이모의 세계를 깨뜨리고 새로운 삶을 찾아가기 위해 달걀을 깼지만, 민주가 깨뜨리는 세계는 언니를 부러워만 했던 과거 그 자체이다. 그야말로 아브락사스를 향해 날아오르려는 새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깨어진 알과 후광, 그 아래 앉아있는 제2의 무녀가 된 자신, 그런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는 사람들을 상상하며 씨익 웃는 민주의 표정은 두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스산한 바람과 함께 독자를 소름 돋게 만든다. 정갈한 그림체와 부드러운 연필선, 영화를 연상시키는 다채로운 칸 활용은 독해 과정에 긴장감을 불어넣으며, 설명하기 어려운 섬뜩함마저 불러온다. 결국 민주는 이모의 집으로 돌아가 기꺼이 무녀가 되고, 언니의 행방은 알 수 없게 된다. 

민주가 탈출을 거부함으로써 착취의 체제는 전복되지 않고 언니의 초능력과 함께 그대로 민주에게 상속된다. 『그 길로 갈 바엔』의 표지에서 정면 혹은 측면을 향해 걸어가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유일하게 뒤로 돌아가는 제스처를 한 민주의 이미지 역시 그가 일탈을 거부하는 인물임을 암시한다. 자발적으로 기존의 질서로 되돌아가는 민주를 보며 독자는 구원의 의미가 각 사람에게 다르게 해석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모의 가스라이팅과 가정폭력에도 불구하고 민주에게 이모의 말과 언니의 능력은 신적 권위를 가진다. 언니는 민주를 억압으로부터 구원하려 했지만, 민주에겐 언니를 따라나서지 않는 것이야말로 자기 발견이자 구원이다. 

언니는 새로운 길에 나섰고 동생은 함께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매는 다른 듯 분명 닮았다. 각자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떠난 이와 남은 이에게 공통으로 남아 있는 중요한 속성이다. 집을 나가든 집으로 돌아가든, 그들은 모두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 무녀가 이모의 규칙 바깥으로 나아갔다면, 민주는 언니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구원의 시나리오 바깥으로 나아간 것이다. 

작품은 일탈과 구원이 각 개인에게 다르게 현현하기 시작하는 순간을 포착한 후 뒷이야기를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일탈은 부정적이고 구원은 긍정적인 것이라는 이분법은 물론이요 각 개인이 삶에서 내리는 모든 선택에 대한 가치 판단 자체를 유보한다. 우리가 긍정할 수 있는 구원은 그 형태와 방향이 정해져 있을까? 그것을 판단할 자격은 우리에게 있을까? 독자들은 자매 중 누가 더 행복할 것인가로 이들의 선택을 재단할 수 없다. 무방비하게 돈 가방을 짊어지고 홀로 나선 어린 여성에게 닥칠 위험과, 신탁이라는 거대한 거짓말에 동조하며 자기 몸을 해치는 무녀로서의 삶의 괴로움을 섣불리 비교할 수 없다. 단 한 가지 선명한 진실은 그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는 것뿐이다. 

작품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 어디로 가야 한다는 교훈을 주지 않고 다만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질문한다. 교훈의 부재는 딱 떨어지는 정답 대신, 오히려 너무 많은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다. 어쩌면 작품이 유발하는 섬뜩함은 자명한 악이나 뻔한 배드엔딩이 아니라 무한히 열려 있는 선택지와 무수한 갈래길에 서 있는 모든 존재들이 원초적으로 느끼고 있는 두려움에서 오는지 모른다. 


각종모에화 작가의 「언제나 인생의 밝은 면을 보세요」 

「토하시는 대로」가 실존의 방식, 어떻게 살 것인가에 답하는 서로 다른 인물들을 보여준다면, 「언제나 인생의 밝은 면을 보세요」는 실존 자체가 포기되는 순간, 곧 모든 구원이 실패했음이 자명한 순간에도 여전히 정해진 끝과는 다른 결의 사유를 할 수 있는지 질문한다. 

첫 장면. 지저분하고 좁은 방 한 켠에 유서를 쓰는 '인간'이 보인다. 인간의 내면에는 의인화된 수많은 감정들이 있다. “내면의 국회의사당”에는 감정들이 민주적인 절차와 토론을 거쳐 정당을 만들고 그들의 지도자를 선출한다.  그 중 ‘우울’은 세련되면서도 위트가 넘치는 언변으로 모든 감정들을 사로잡는다. 키가 크고 다부지며 검은 정장을 입은 젊은 여성으로 의인화된 우울은 감정들의 지도자를 뽑는 마지막 대선 토론에서 유머러스하고 유창한 비관론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쥔다. 우울은 합법적 장기 독재를 이어가며 다른 모든 감정들을 죽이기 시작했고, 결국 이들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은 삶의 의미를 잃고 유서를 쓰고 있다. 

유서 속 단어들은 바다가 되고, 그 안에 수많은 감정들이 떠내려가는 모습은 마치 스스로 익사하는 인간들의 행렬로 재현된다. 개인이라는 세계의 절멸로 인해 무중력 상태가 된 감정들의 땅이 붕괴하고 그 파편이 부상하는 모습은 역동적인 칸 배치와 극명한 흑백의 명암으로 그려진다. 흑과 백 사이 중간 색채를 철저히 배제하여 심리적 고조감을 형성하는 작풍은 다른 작품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언제나 인생의 밝은 면을 보세요」만의 특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둠 아니면 빛, 우울 아니면 꿈이라는 흑백의 이분법을 활용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이분법으로는 도저히 환원될 수 없는 인간의 복잡함이다. 자기파괴적이지만 동시에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는 안타까운 모순이 우리 모두 안에 있다. 이 작품은 스스로를 원망하지만 스스로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속절없는 실존의 고통을 감정들 간의 대화를 통해 고찰한다. 

이야기는 나이 든 여성으로 의인화된 ‘꿈’과, 꿈에게서 ‘당신을 원망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우울’의 대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정치인다운 노련한 말솜씨를 가진 우울임에도, 그가 집요할 정도로 반복하는 질문들은 마치 부모의 인정을 갈구하는 어린이의 태도를, 부모의 고집을 꺾으려는 청년의 괴로운 투쟁을 연상시킨다: “날 원망하는군요. 그렇죠?”  “이제 저를 원망하십니까?”  “꿈, 이제는 나를 원망합니까?”  우울은 꿈이 처음으로 좌절되었던 순간, 꿈의 그림자에서 태어나 꿈이 실패할 때마다 조금씩 성장했다. 작가의 말처럼 둘의 관계는 “서로 혐오하는 엄마와 딸”의 관계를 닮았다. 우울은 꿈을 계속해서 자극해 그가 자신을 원망하기를, 그로써 역으로 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기를 원한다. 

종말을 뜻하는 아포칼립스는 폭로, 감추지 않음을 의미하는 그리스어ἀποκάλυψις에서 유래한 단어다. 그래서 작품이 그려내는 시간, 곧 개인의 세계가 끝나는 순간은 그동안 억눌리고 감춰졌던 모든 진심이 폭발하듯 펼쳐지는 시간이다. 스스로는 물론이요 서로를 구할 수 없는 아포칼립스를 맞으며 우울과 꿈은 진심을 감추지 않는다. 

그래서 우울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꿈의 말은 분명 진심이다: “지나간 꿈으로서… 실망시켜 미안합니다.” 우울 역시 자신의 속내를 숨기지 않는다. 그는 희망이 자신을 굴복시키기를, 그리하여 구할 길 없는 한 명의 세계가 존속하기를, 죽도록 우울하더라도 죽을 필요는 없다는 말을 들어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런 우울에게 꿈은 희망에게 바치려던 추도문을 읽어준다. 우울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삶의 순간에, “언제나 모든 곳에, 지루하고 불행했던 시간과 함께” 해주었기 때문이다. 추도문과 함께 두 감정 역시 인간의 자살과 함께 죽었음이 암시되며 작품은 끝난다. 

「언제나 인생의 밝은 면을 보세요」는 구원이라는 주제에서 이탈한 작품처럼 보일 수 있다. 감정들과 인간 모두 서로를 구해내지 못하고 존재를 끝내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목적으로부터의 일탈로 자살을 해석하려는 시각도 있겠으나, 그것은 자기 구원과는 공존할 수 없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타인(우울)과 세계를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꿈을 통해, 독자는 이 작품이 여전히 자기 구원의 실마리를 놓지 않았음을 읽어낼 수 있다. 꿈은 분노하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실망했을 우울에게 사과하고 그와 화해하려 한다. 자신의 꿈에게 사과받는 일. 그것이야말로 우울에 잠식되어 자살을 앞둔 개인의 세계에 마지막으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드라마틱한 이변이자 일탈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구원은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할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스스로를 혐오했던 우리 자신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화해의 손길이다. 바로 이 지점을 짚어냄으로써, 작품 속 실패한 구원은 작품 밖 독자들에게 어떻게 스스로를 자기 파괴로부터 구할 수 있을지 고민할 시간을 선사한다. 실패한 구원 서사에서도 실패를 통해 그 존재를 증명하는 구원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아닌 존재의 이야기에 접근하는 존재인 독자의 특권이다. 이 작품이 상상하는 구원은 작품 밖에서, 바로 독자의 삶 속에서 비로소 실행될 수 있다.

 

하양지 작가의 「추억의 왕」 

그렇다면 만화책 밖에서의 일탈과 구원은 어떻게 체험할 수 있는 걸까? 단편집의 대미를 장식하는 「추억의 왕」은 곧 책을 덮게 될 독자들을 현실로 돌려보낼 준비를 한다. 구할 길 없는 우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가정, 방심하면 찾아오는 트라우마, 그리고 남들과는 다른 길에 나서는 일이 상당한 위험 부담을 전제하는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독자들에게 이 작품은 짧은 산책을 제안한다. “스스로를 구제할 방법으로 걷기를 선택했다”는 하양지 작가의 말은 구원이라는 단어에 들러붙은 무겁고 거창한 함의를 떼어내고 가벼운 발걸음을 따라 그저 발견되는 모든 사소한 것에 마음을 흩뿌릴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한다.  

평범한 회사원인 주인공 ‘종림’의 산책은 자잘한 맥거핀 투성이다. 종림은 그가 발견하는 것들에 멋대로 서사를 부여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진열된 골동품을 보며 가게 주인은 꿈에 부푼 세계 여행자가 아닐까 짐작하고, 공원 벤치에 앉아 서로에게 기댄 중년의 남녀를 보며 그들의 인생사를 그려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개인의 망상이며 착각에 불과할 뿐이며, 어떤 거대한 서사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종림을 따라 마주하는 장면도 종림이 상상하는 장면도 모두 공평한 칸 배분을 가지고 독자의 눈앞에 드러나지만, 그 어떤 칸도 진실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종림은 마흔여섯 번 종을 치는 사제를 보며 “소중한 누군가가 마흔여섯 살에 세상을 떠난 걸까?” 궁금해한다.  하지만 작품의 초반부에서 그가 회사 창문 밖으로 세던 마흔여섯 개의 십자가 개수와 종이 울린 횟수가 어째서 같은 것인지는 다뤄지지 않는다. “셀 때마다 숫자가 다르다”는 종림의 산수를 독자가 믿어도 되는 건지,  종림이 믿을 수 없는 화자라면 그가 오늘 발견한 모든 것들은 정말 그 장소와 그 시간에 실존했던 거라 단언할 수 있는 것인지 무엇도 확실하지 않다. 주인공은 그가 바라보는 대상의 진실에 다가설 수 없다. 그가 죽은 친구의 마음을 더 이상 알 수 없듯이 말이다. 

정처 없이 걷던 종림은 5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은 친구 ‘장희’의 언니가 운영하는 빵집을 발견한다. 오랜만이라며 빵을 챙겨주는 언니는 웃으며 묻는다. “잘 살고 있지? 잠은 잘 자고?”  그 말에 종림은 장희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들을 회고한다. 잘 웃던 장희, 초록색 반소매를 좋아하던 장희, 튀르키예에서 열기구를 타고 싶다던 장희. 그리고 장희가 죽은 이후 오랜 시간 수면 장애를 겪다가 “길거리에서 패랭이꽃을 구경한 그날”부터 다시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던 종림. 이 정도가 전부다. 독자는 종림에 대해서도, 장희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지 못한 채 또 한 페이지를 넘겨야 한다. 마주한 것들의 진실을 알 수 없는 상태로 그저 한 걸음을 내디뎠던 종림처럼. 

진짜 있었던 일과 상상의 모호한 경계, 안다고 생각했던 것과 영영 알 수 없게 된 것 사이의 흐릿한 경계가 종림의 산책을 흑백으로 재현하는 일의 의미를 더한다. 종림이 보는 나무와 가게와 꽃과 사람들을 컬러로 재현하는 것이 분명 더 현실적인 산책 같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사물이 정말 존재하느냐가 아니다. 종림이 보는 것과 종림이 상상하는 것 모두가 그의 인식 체계 안에서 통합되고 그 안에서만 의미를 가지며 독자에게 다가선다. 따라서 종림이 경험하는 감각들을 통일된 모노크롬으로 채색하는 일은 진실이 상상보다 더 중요하다는 고전적인 위계를 무너뜨리고,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뒤섞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독자가 종림의 탐험을 온전히 동행할 수 있도록 하는 연출적 의의를 가진다.

종림은 각 사물과 사람의 진짜 의미와 사연을 굳이 찾아내려 하지 않는다. 그로써 알 수 없는 상태를 슬퍼하지 않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다. 어쩌면 어쩔 수 없는 일을 자책하지 않고 흘려보내는 방법을 연습하는 중인지 모르겠다. 여전히 종림은 죽은 친구의 마음을 궁금해하고, 산책에서 발견한 모든 것의 진실 역시 궁금해하지만, “너를 끝끝내 알 수 없다는 게 이제 슬프진 않아”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알 수 없음을 슬퍼하지 않음으로 주인공은 스스로를 구해낸다. 

그의 구원은 어떤 의도도 목적도 없이 걸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종림은 다음 날 다시 발견한 어제의 산책길에 들어서지 않는다: “어제는 어제야. 가지려고 하지 않을 거야.”  목적 없음의 상태, 자신의 무능과 무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상태로 걷는 일의 소중함을 알게 된 종림은 그 시간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독자를 뒤에 남겨둔 채 앞으로, 화면 가운데의 소실점을 향해 걸어간다. 내내 종림의 곁에서 그의 얼굴과 눈을 맞추며 함께 하던 독자는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 처음으로 완전히 뒤로 돌아 걸어가는 종림의 전신을 본다. 마치 ‘함께 걷는 길은 여기까지야, 이제는 혼자 걸으러 나가 봐’라고 말하는 것 같다. 물론 이것이 종림의 진심인지 우리는 영영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만화책을 읽는 일탈 이후 독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쉽고 가장 가까운 구원이 스스로의 몸을 움직여 밖으로 나가 숨을 쉬며 걸을 수 있는 산책길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흑백만화는 여전히 우리를 구원한다

만화의 의미와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경향은 만화라는 매체가 처음 생긴 시점부터 존재했고, 오랫동안 흑백 만화를 보는 시선에 들러붙어 있었다. 더욱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접근성도 높고 화려한 컬러 웹툰 대신에 흑백 만화를 책장에서 집어들 이유가 더더욱 없어졌다. 흑백 지면 만화는 비상업 만화, 비주류 만화로 여겨지게 되며 점차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젊은 세대에게 흑백 만화는 낯설게 느껴질 정도다. 많은 독자층을 보유하고자 하는 작가에게 흑백 연출은 선뜻 도전하기 망설여지는 매체다. 흑백 만화는 그 자체로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 다수가 걷지 않는 길이다. 

다른 한편, 만화의 언어적 측면을 강조하는 흑백 만화는 작가주의적 선택이 두드러지는 매체이기도 하다. 컬러 작업이 권장되는 시대이기에, 흑백 만화를 그린다는 것은 오히려 작가주의적 목적과 개성으로 읽힌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흑백 연출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연출될 것이라는 작가의 선언은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걷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된다. 실제로 백색과 흑색만을 이용하는 단순한 채색법은 독자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것 이면의 복잡함을 포착할 것을 촉구한다. 게다가 종이 책이라는 물질성 역시 역동적인 만화 읽기 경험을 선사한다. 웹툰을 읽을 때는 스크롤을 내리며 한 번에 한 칸을 마주하지만, 지면 만화는 제각각의 모양으로 디자인된 칸과, 칸과 칸의 겹침, 칸 사이의 홈통을 능동적으로 독해해야 한다. 여기에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인쇄지 특유의 향, 책 한 권의 무게 등은 시각 외에도 다양한 감각을 동원하는 읽기를 촉구한다.

이는 『만화의 이해』로 널리 알려진 스콧 맥클라우드가 자신 있게 단언하는 흑백 만화의 대체 불가능성으로 이어진다. 그에 따르면 컬러 만화는 더 현실적으로 보이지만, 흑백 만화는 “현실 이외에도 훨씬 더 많은 것을 보고자” 하는 독자들을 위한 것이다.  색깔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독자를 낯선 모노크롬의 세계로 인도하고, 그로써 평소에는 할 수 없던 경험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흑백 만화는 남들과는 다른 길을 궁금해하고 기꺼이 그 길을 걸어 낯선 자신을 만나려는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여전히 매혹적인 매체다. 

『그 길로 갈 바엔』의 여성들은 정해진 길, 마땅한 전개를 거부하고 탈선(脫線)함으로써 독자와 함께 흑백 만화라는 ‘다른 길’을 걷는다. 흑백의 우주를 걷는 것만으로도 독자는 작은 구원을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은 작품 속 인물들이 누군가를 구하려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걸음으로써 의도치 않게 스스로를 위로할 방법을 찾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섯 단편이 사유하는 구원은 깔끔한 해피엔딩이 아니다. 삶은 계속되고 인물들은 여러 번 다시 곤경에 처하거나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설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의 삶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타인을 위해 움직이려 할 것이고, 이 확신은 독자를 위로한다. 그 위로가 오늘 하루를 살아낼 힘이 된다면, 『그 길로 갈 바엔』의 여성들은 분명 우리를 구원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정해져 있음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정해진 만화의 세계 안에서도 우리는 뭔가를 새로이 하고 있다. 이해하고, 상상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나름의 논리와 해석으로 새롭게 엮어낸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바꿔나가고 있다. 세계를 이해하던 방식에, 타인의 삶을 바라보는 방식에, 무엇보다 독자 자신의 구할 길 없던 감정들에 손을 댈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만화와 만화를 읽는 행위는 끝내는 우리를 구해낸다. 어쩔 수 없는 일, 하는 수 없이 가야 할 길로부터 우리를 구출한다. 만화는 여전히, 흑백 만화는 여전히 우리를 구원한다. 



비평문 발행을 허락해 주신 재활용 작가님, 약국 작가님, 서글 작가님, 각종모에화 작가님, 하양지 작가님, 그리고 김해인 편집자님께 감사드립니다. 


참고문헌

스콧 맥클라우드, 『만화의 이해(Understanding Comics)』, 김낙호 옮김, 비즈앤비즈, 2020, 200쪽.

윤보경, 「책 페이지에 구현된 만화의 흑백 연출 의미 분석: 흑과 백이 갖는 상징성의 조화와 대립을 중심으로」 『만화애니메이션 연구』 제 40호, 2016, 181쪽. http://dx.doi.org/10.7230/KOSCAS.2015.40.177

재활용, 약국, 서글, 각종모에화, 하양지. 『그 길로 갈 바엔』 문학동네, 2022. 

헤르만 헤세, 『데미안』, 전영애 옮김, 2000, 123쪽.  

Baetens, Jan. “From Black & White to Color and Back: What Does It Mean (not) to Use Color?” College Literature, vol. 38, no. 3, Summer 2011, 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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