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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랑 May 05. 2021

스무 살의 꽃, 부겐빌레아

책 정리를 하다가 오래 가진 책 몇 권을 들춰 보게 되었다. 


 ‘카뮈’와 ‘르 클레지오’의 책들, ‘열린 책들’에서 1990년 2월 25일 초판 발행한 『닥터 지바고』, ‘빈센트 반 고흐’의 『감자』, ‘학원사’에서 펴낸 ‘세계문학 시리즈’, ‘다이 호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 등 세월 따라 먼지 앉고 누렇게 변한 책들을 보다가, 역시나 시간의 남루를 덕지덕지 뒤집어쓰고 있는 작은 책 한 권이 눈에 띈다. 더구나 이 책은 세로줄 형태로 쓰인 책인데 바로 ‘조지 기싱’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란 책이다. 


 책에는 여기저기 낙서와 메모도 적혀 있다. 가령, 이런 메모다. 


‘성당을 오르는 길에서 안개비를 만났다. 거세당한 자유를 위해, 짓밟힌 자유를 위해 죽어간 푸른 넋을 위로하는 추모제의 향냄새가 어두워 오는 골목길에 퍼진다. 말을 잃은 사람들이 성당 마당을 서성인다. 비에 젖는다. 깊은 한숨 소리가 어둠을 토한다. 사복 한 형사들의 실루엣이 소름 돋게 한다. 내 절망은 토요일 오후를 저당 잡힌다.’


 이십 대 중반, 시내 모 성당에서 광주 민주화운동 사진 전시회와 영상을 상영했는데 친구와 함께 보러 갔던 토요일 오후였다. 공무원 아버지를 둔 친구가 염려스럽기도 했고, 나 또한 가끔 사무실에 오는 정보과 형사의 얼굴을 봤기 때문에 뒤돌아 나올까 망설이며 조심스럽기도 했으나 이십 대의 열망과 절망, 분노는 우리를 그곳에 앉혀 놓기에 충분했다. 참고로 그 당시에는 정보과 형사들이 사무실을 정기적으로 드나들었다. 


 내 정신적 성장의 발돋움이 되기도 했던 그 무렵, 자유와 인권, 권력과 부, 결핍과 부조화 같은 것들에 대해 고민하면서 젊음이 그리 찬란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우울함에 침잠해 있기도 했다. 


 그즈음 원예학을 전공했다는 직원이 사무실에 커다란 화분 한 개를 들여놓았는데 마침 책상 앞 창가였다. 별 특징 없이 잎만 무성하게 달고 있던 화분에서 어느 날 분홍색 꽃잎이 나오기 시작했다. 얇은 꽃잎은 시간이 갈수록 분홍색이 진해지고 커갈수록  종이처럼 얇아졌다. 햇살이 비껴들면 속이 훤히 비칠 만큼 특이한 모습으로 성장했는데 그것은 사실 꽃이 아니라 꽃을 감싸는 포(꽃받침)라고 했다.   

 정작, 부겐빌레아꽃은 분홍색 포를 한참이나 보고 나서야 고개를 들고나왔는데, 하얗게 피운 작은 꽃은 얇은 포가 가져온 강렬함에 비하면 앙증스럽고 예쁠 뿐, 나를 사로잡지는 않았다. 이미 부겐빌레아 포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 


 부겐빌레아는 내가 처음으로 본 꽃이기도 했고 다분히 이국적이었으며, 직장생활에 저당 잡힌 내 젊음을 저 남아메리카 어디쯤 데려다 놓을 만한 매력적인 꽃이었다. 부겐빌레아에 뒤척이는 스무 살의 꿈을 실었다.


 계절이 바뀔 때의 막막함과 외로움, 쓸쓸함 같은 것을 몸으로 체득하며 자꾸 떨어지는 부겐빌레아꽃을 주워 책갈피에 끼워 넣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지루하고 밋밋한 일상이 변화무쌍한 계절에 눈 돌리게 했을까? 계절이 바뀔 무렵이면 어김없이 ‘조지 기싱’의 책을 펼쳐 들었다. 계절의 변화에 나를 오롯이 투척해야 비로소 숨통이 터지는 것 같았다. 책을 읽으며 계절과 나는 한 몸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고 책에서 언급한 꽃과 나무를 애써 찾아보기도 했다.


 ‘요즈음 매일 아침, 나는 같은 곳을 산책했다. 어린 낙엽송 조림지를 구경하려고. 낙엽송이 지금 띠고 있는 저 색깔보다 더 예쁜 것이 세상에 있을까?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눈이 즐겁고 시원해져서 마침내 가슴속 깊이 스며오는 것 같다. 그러나 곧 변할 것이다. 이미 찬란한 초록색의 어린잎이 한여름의 침착한 색깔로 변하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든다. 낙엽송에는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순간이 있다. 봄마다 이걸 즐길 기회를 가진 자는 참으로 행운아다.’ - 책 82쪽 봄. -


 어두워 오는 들녘에 나를 세워 놓았다. 불어오는 바람을 깊게 들이쉬며 스무 살의 어설픔을 못내 자책하곤 했다. 별이 쏟아지는 밤 어디선가 들깻잎 향이 코끝을 훅 스치면 그리움이 자꾸 엉켜 들었다. 소나기를 흠뻑 맞고 와 마당의 우물을 퍼 마구마구 들이붓던 그 밤이, 좌절된 꿈과 현실에 붙들린 청춘의 열망을 상쇄시키는 일은 아니었는지.


 얇디얇아 곧 찢어질 듯하던 꽃잎, 아니 분홍색 포가 여전히 모양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책 안에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찬란하게 나부끼던 분홍색 포의 색깔은 날아갔으나, 수십 년이 흘렀는데, 모양도 결도 그대로다. 

 밑줄 그은 문장 곳곳에 어김없이 들어 있는 부겐빌레아 꽃잎, 그것은 내게 스무 살의 핏빛 꿈은 아니었을까?


 삼 년 전 겨울 느닷없이 부겐빌레아꽃이 몹시 보고 싶었다. 자주 가는 농원에 들러 찾으니 지금은 꽃을 볼 수 없는 계절이지만, 굳이 필요하다면 주겠다며 주인은 구석에서 키 작은 화분 한 개를 가져왔다. 그래도 그렇지 잎도 없는 그야말로 죽은 것 같은 고목 한 그루를 내밀며 봄에 꽃을 볼 수 있을 거란다. 갖고 싶던 나무였기에 망정이지 화를 내고 싶을 만큼 성의 없는 행동이라고밖에 달리 해석할 수 없었다. 마치 간절한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툭 던지며 가져갈 테면 알아서 가져가라는 듯한 행동 같은 것 말이다. 물론 내 감정으로 해석한 것이지만.


 첫해는 두 송이의 꽃을 보았고, 이듬해는 대여섯 송이, 올해는 그야말로 십여 송이의 꽃, 아니 분홍색 포를 주렁주렁 달고 제 존재감을 환하게 밝히고 있으니, 그야말로 나는 부겐빌레아 나무를 가진, 한 사람이 된 것이다.   


 누구나 애착을 가지는 물건이나 사물, 풍경, 혹은 사람이 있을 터이다. 나는 조화로운 풍경을 아끼는 편이다. 그중 한 풍경은 부겐빌레아꽃이 피는 창가에 앉아 바람결에 나부끼는 부겐빌레아의 오후와 저녁 무렵을 갖는 일이다.


 이제는 크게 아쉽고 애석할 일 없다. 나 자신과 많은 부분 화해를 했기 때문이다. 포기나 단념하고는 다른 결을 가지고 나를 만나는 시점에 서 있다는 말과도 같다. 


 꽃도 인연 따라 만난다. 내게 부겐빌레아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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