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시뮬라시옹>을 보고
과학기술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과학의 날 때나 그렸을 법한 미래의 모습이 점차 현실이 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감탄하기도, 때론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과학기술 발전의 양면성 때문이다. 예컨대 드론은 물자 이동, 촬영, 방재 등과 같은 부분에선 편리함을 주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선 자폭 드론과 같은 살상 무기로 이용되기도 한다.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 큰 문제를 일으킨 딥페이크, 인간의 뇌 구조를 지배해 가는 알고리즘 등은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이 마냥 청사진을 그리게 하진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연극 시뮬라시옹
과학기술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사회문제와 이어진다. 이 때문에 여러 분야의 예술에서는 과학기술의 양면성, 디스토피아적 미래 등을 그리며 우려를 표한다. 연극 ‘시뮬라시옹’도 마찬가지다.
근미래의 인간이 가상과 현실, 사랑과 상실 등의 문제를 어떻게 마주할지 깊이 있게 다루는 이 작품은 현대 과학기술 문제의 동시대성을 담고 있다. 2034년의 근미래, 선욱은 2년 전 이탈리아에서 한국으로 오는 자율주행 비행기 사고로 그의 아내 상아를 잃었다. 기나긴 상실의 시간을 보내던 선욱은 한 벤처기업이 제작한 ‘시뮬라시옹’이라는 가상현실 재현 프로그램에 대해 알게 되고 이를 구매한다. 시뮬라시옹은 사람, 동물 등 복원하고 싶은 대상의 데이터를 입력하면, 기능이 탑재된 안경을 통해 대상과 마치 실제처럼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가상현실 AI 프로그램이다.
선욱은 아내 상아의 사진, 일기, 휴대폰 등의 데이터를 시뮬라시옹에 입력하고, 프로그램을 통해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 같은 상아와의 시간을 보낸다. 오랜만에 찾아온 그녀와의 달콤한 시간도 잠시, 선욱은 우연히 공항에서 찍은 상아의 셀카를 보곤 그녀가 이탈리아에 다른 남자와 함께 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의 결혼 생활이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선욱은 상아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게 상아가 다른 남자와 해외로 떠난 이유를 찾던 중, 선욱은 늘 외면했던 그녀의 뿌리 깊은 외로움과 고독을 마주한다.
흐릿해지는 실제와 실재
‘시뮬라시옹’은 1981년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가 발표한 이론으로 ‘모사된 이미지가 실재를 대체하고, 실재가 실재가 아닌 것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말한다. 지금의 사회는 시뮬라시옹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거짓된 것들이 사실인 양 판을 친다. 대중교통을 탄 사람들은 네모난 가상현실에 빠져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애플에선 비전 프로라는 극 중 ‘시뮬라시옹’과 유사한 기능을 가진 기기를 출시하기도 하였다. 이젠 더 이상 진실과 거짓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우리는 가상현실, 딥페이크, CG 등의 기술로 거짓이더라도 진실이라 생각하면 정말 진실이 되어버리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연극의 중심이 되는 시뮬라시옹 프로그램은 아마 멀지 않은 미래에 실재할 것이다. 지금도 돌아가신 부모님의 음성을 AI 기술로 분석해, 자녀들에게 말을 하는 등의 프로젝트를 간간이 볼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기술이 무조건 좋다고 말하긴 어렵다. 상실을 겪은 자가 그리운 이를 다시 마주하는 것은 이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을 가상현실 속으로 고립시킬 가능성을 만든다. 현실에선 더이상 볼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이 시뮬라시옹 속에만 ‘존재’한다면, 누구든 현실을 버리고 시뮬라시옹을 택하지 않겠는가?
극 말미, 선욱은 복원한 시뮬라시옹 속 상아를 초기화한다. 이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미처 알지 못했던 불편한 진실과의 대면에서 촉발된 것이다. 외롭고 상처받은 상아를 외면하고 싶어서인지, 혹은 시뮬라시옹에서라도 다시금 상아와 제대로 된 관계를 맺고 싶어서인지, 선욱이 상아의 데이터를 초기화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비존재 속 존재의 한계를 절실히 보여준다. 자신이 선택하면 얼마든지 초기화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관계는 결코 정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이 발전할 수록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는 점차 모호해 진다. 그리고 연극 ‘시뮬라시옹’에서 표현한 것처럼 앞으로의 인간관계, 사랑과 상실, 가상과 실재 등의 개념은 점차 새롭게 정립되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