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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i Jul 26. 2024

박하리, 스스로의 그림에 대하여

현대미술작가 박하리

작업에 대하여. 


   나는 다원예술을 하는 contemporary 작가이다. 사실 전공 자체는 동양화 전공인데, 이것저것 하는 사람이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편의와 정체성을 위하여 현대미술작가라고 스스로를 칭하기 시작했다. 


   화가인 이모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3살 무렵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어렸을 때에는 순수 회화 자체에 관심이 많아서 주로 손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그 때 당시에도 춤이나 음악, 과학 등에 엄청난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에는 디자인 전공이었다가, 우연히 한국화실에 놀러간 이후로 갑자기 한국화의 매력에 꽂혀버려서 동양화로 전과해 버렸다. 


   동양화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전통 동양화에서부터 창작까지 정말 많은데, 나는 그 중에서 필선을 사용하는 수묵화를 좋아하고 채색화 또한 좋아한다. 

   동양화의 한 획에는 그 사람의 모든 것들이 들어가있다고 생각이 들어서 정말 매력적이다. 우리가 느끼기에는 그냥 한 선으로 느낄지라도,

   그 한 선의 필획을 통해서 그 사람의 성격을 다 볼 수 있고 그 사람이 어느정도 그림을 그리는지, 그 사람의 선 자체의 강인함과 힘 또한 느낄 수 있다. 


   이전에 교수님과 선생님께서 나에게 자주 했던 말이, 먹으로 한 획을 그릴 때, 아무 생각 없이 “에라이!” 라는 마음으로 저질러 버리라고 하셨다. 

   정말로 마음을 비워야 한다. 선이 틀리면, 선이 떨리면 어떻게 하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선은 파르르 떨려버리고 만다. 그래서 나는 한 획을 그을 때, 아무 생각도 없이, 아무런 마음 없이 한다. 그리고 모든 숨을 참는다. 

   저질러 버린다. 그게 내 삶의 방식과도 정말 많이 닮아 있다. 나는 추진력이 정말 강하고 무엇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면서 행동하진 않는다.

   물론 나는 모든 삶에 대해서 너무나도 진지한 방식으로 숙고하고 깊게 생각한다. 하지만 행동할 때에는 큰 미래까지 걱정하면서 행동하지 않는다. 그냥 그 순간 저질러 버리고 그 행위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진다. 

한국화가 이런 것 같아서 나는 언제나 한국화를 사랑한다(한국화라고 하기도 하고 동양화라고 하기도 한다.).


   또한 그 필선에 그 사람의 모든 것들이 담겨있을 수 있다는 것은, 선 하나를 제대로 긋기 위해서 수년 혹은 수십년 간 선연습을 지독히 한다. 고등학생 전공시간 때에는 연습지에 빽빽하게 선으로 다 채우는 연습만 2년간 했던 것 같다. 

   선 하나를 잘 그리려고 그렇게 계속해서 정진해야지 비로소 선 하나가 제대로 나온다. 그 선은 촉촉할 수도 있고, 짧았다가 길어질 수도 있고, 굵다가 얇아질 수도 있고, 건조할 수도 있다. 나는 특히 갈필을 좋아한다. 

그 속에 어마어마한 힘이 있는 것 같고, 완성되지 않고 완벽하지 않아보이는 그 거친 선 자체가 자연스럽고 온전하다고 느껴진다. 


   또한 한국화는 여백에 대해서 민감하다. 여백의 변화를 추구해야 그림이 자연스러워진다. 여백의 덩어리들이 다 똑같은 모양이 아니라 각기 다른 형태와 크기들로 구성되어야 진짜 ‘맛있는’ 그림이 된다. 

   또한 채색 하나가 주는 그라데이션에 민감하다. 그걸 맛있게 그리는 사람이 진짜로 좋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같기도 하다. 


   그리고 채색화 또한 사랑하는데, 채색화는 정말 스티븐 잡스가 살아생전에 있었던 아이폰같이 어린아이처럼. 다루어야 한다. 

   재료에서부터 마감까지 하나하나 우리가 직접 손보고 일일이 까다롭고 섬세하게 추구해야 하는 작업이다. 

밑작업을 제대로 한다면 일주일 정도 걸릴 것이다. 개인차가 있지만 말이다. 

   또한 수간채색, 즉 석채나 분채 등의 물감을 직접 만들어야 한다. 요즘에는 석채에 빠졌는데, 비싼 만큼 정말 아름답다. 원석 등으로 만든 재료이기 때문에 주로 동양화에서는 자연재료로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채색하는 과정 또한 어마어마 하다. 정말 곱고 연하게 한 번 칠하고 그게 끝이 아니라, 많게는 스무번. 이상 덧칠을 한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지만 그만큼 깊이가 어마무시하다. 

   밀도감 있게 순간순간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채색화의 방식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작업방식을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이 작업방식들을 응용하고 변형하여 작업에 임하긴 한다. 

   완벽하게 전통 동양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방식들의 어느 정도의 재료나 형태 등을 가져와서, 어느정도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그것들을 분해하고 파괴하는 작업을 거치면서 나의 스스로의 창작을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렇게 그리면 안 돼!’라는 것을 제일 힘들어 하는 말로 듣는데,

   세상에 내가 죄를 짓는 게 아니라면 안 된다는 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작업 방식도 그런 식으로 변형되었다. 

   그래서 누군가의 시선으로는 너무 낯설게 느껴지더라도 나는 이것저것 융합하는 게 너무나도 재밌다. 

   한 가지의 폼이 나에게 왔을 때, 그것의 연결고리들을 맞추어가며 얽히고 섥힐 때의 짜릿함이 좋은데,

   이것에 대하여 계획은 하나도 하지 않는다. 혹은 가장 큰 덩어리만 잡아둔다. 

   하지만 난 안다. 그것의 완성을. 그래서 누군가에게 이 과정에 대하여 (아직 과정시작 전에) 이야기 하기가 정말 힘들다. 

   왜냐하면 나는 모든 걸 알면서 모른다. 그 순간만을 안다. 그 순간만이 나의 하인이자 내가 주인이 된다. 하지만 미래나 과거는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이 내 작업 방식이다. 


   미켈란젤로는 바위를 보며 피에타를 봤다고 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 말이 정말 크게 공감이 되었다. 

   어떠한 작업을 보면 그 완성이 보인다. 그게 결이다. 그게 양자 결맞음이라는 개념과 정말 비슷하다. 

   하지만 그 과정의 무작위성을 감내해야만 한다. 내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 지 알지만, 동시에 모른다는 것. 

   그게 있기에 그림과 창작은 정말 웃기면서도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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