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석사, 합격통지받자마자 포기해야 하는 걸까?
영국의 입학생 선발체계는 한없이 불공평하고, 이보다 공정할 수 없다. Rolling basis라고 불리는 이 시스템은 한 학년도 선발 과정이 마무리되고 나면 거의 곧바로 다음 학년도 모집을 시작한다. 정원이 마감될 때까지 마감기한은 없다. 서두르자면 한 없이 조급해지고 여유를 부리자면 영영 미룰 수도 있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겠다. "운빨"의 영향도 크게 한 몫한다. 나와 같은 시기에 원서를 넣을 지원자들이 얼마나 쟁쟁할지 가늠할 길이 없다.
허술한 학업 계획서와 엉성함을 포장하기에는 영 허접한 영어실력이 일군 환장의 조화로 완성된 나의 지원서는 용케도 명이 질겼다. 처음에는 대기자 명단에, 그 후에는 정확한 명칭은 기억도 나지 않지만 합격선에 조금 더 가까운 명단에 차례로 내 이름이 올려 주었다. 게다가 펜데믹이라는 기가 막힌 "운빨"도 한 몫했다. 미세먼지가 뽀얗게 끼는 날에도 결코 마스크를 쓰지 않던 내 엄마도 약국을 헤매며 병적으로 마스크를 모으던 시절이었다. 대체로 많은 이들은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 돌이킬 수 없는 삶이니 당연하다. 역병의 공포가 세상 구석구석의 수재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다. 그 덕에 어부지리로 나에게도 차례가 돌아온 것이다.*
으레 합격자들은 늦어도 1,2 월쯤 오퍼를 받는다. 그때부터 차근차근 이주 준비를 시작하면 8월 중순에서 9월 초쯤 여유롭게 영국에 도착하게 된다. 런던에 내리고 난 유학생들은 대부분 현지적응을 핑계 삼아 소위 "런던뽕"에 취해 런더너가 된 기분을 만끽하기도 한다. "이 도시에 내가 있다니, " "나도 이제 런더너라니!" 적어도 최면에서 각성하는 순간까지는. 혹은 절대로 꿈에서 깨지 않고 오래도록 런더너라서 행복하다.
남들보다 훨씬 늦은 4월에, 남들이 떠난 자리에 나의 합격이 깃들었다. 서둘러야 했다.
잃을 게 없는 사람들만 목숨을 담보로 미친 짓을 하던 때였다. 나도 미친 이들 중 하나였다. 그 당시 나는 어차피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실패의 길로 접어들고 만다는 패배감에 젖어 있었다. 내가 이루는 작은 성공은 결국 세상의 기준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들 뿐이다. 일생일대의 기회를 뿌리치고 이 시시한 인생을 움켜쥘 만큼 간절한 생도 아니었다. 그렇게도 원하던 하나를 가질 수 있다면, 난 그것을 손에 넣은 날 불치의 몹쓸 병에 걸려 죽더라도 미친 척 달려들어보고 싶었다. 어차피 내게 입학유예 따위는 선택지에 있지도 않았다. 밤마다 치솟는 고열에 환각이 보일지라도 나는 꿈에 그리던 그 학교의 학생으로 아프고 싶었다. 나는 도박판의 중독자처럼 이 문제를 대처하고 있었다.
당장 비행기티켓을 샀다. 비자센터 방문 예약을 하고는 1년 동안 지낼 곳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모순적인 나는 불나방처럼 불빛을 향해 달려들면서도 매 순간 최악의 경우를 상상한다. 도박판의 타짜도 가진 돈을 다 잃는 순간은 두려운 법이다. 고로 플랏셰어는 진작에 선택지에서 제외했다. 잊지 않으셨다면, 나는 고아가 되는 상상, 온 가족이 길바닥에 나앉는 상상을 하며 벌벌 떨던 겁쟁이였고, 아직도 그 겁쟁이의 그늘 아래 산다. 도착한 주소가 비가 줄줄 세는 마약굴이라는 환상은 내겐 너무나도 있음 직한 현실이었다. 더구나 수년 전 동생과 떠났던 시베리아횡단열차 여행에서 슈트케이스를 도둑맞고 양손이 한 껏 가벼워진 채 집으로 돌아갔던 전력이 있는 나로서는 월세사기만큼은 반드시 피하고 싶었다. 안전제일. 신용이 담보되는 학생기숙사에서 무사한 1년을 보내기로 했다.
대체로 영국 학생기숙사는 주 단위로 렌트를 계산해 분기, 혹은 학기 단위로 금액을 청구한다. 그 금액은 도무지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비싸다 비싸다 말만 들었지 평생 벌어본 적도 없는 돈을 이렇게 쉽게 쓰나. 더 큰 문제는 나는 이미 남들보다 한참 늦은 시점에 합격통지를 받았기 때문에 타협가능한 수준의 기숙사는 모두 마감된 상황이었다. 바이러스는 무섭지 않은데, 홈리스가 되는 것은 두렵고, 내 것인 적도 없는 돈을 한 방에 탕진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워 보이는 아이러니의 한가운데에서 웃음이 터졌다.
오퍼레터에 적힌 등록금도 심상치 않았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친구의 친구 이야기를 들어보더라도 가장 현실적이어서 가장 못난 이야기들은 보이지 않게 잘도 가려져 있다. 금전 문제는 언제나 가장 큰 문제이고, 넘을 수 없는 벽이다. 뒤집어 보고 다시 보아도 불합리한 결정들의 연속이었는데 그때는 이게 뭐라고 그리도 심각하고 진지했을까. 현실적인 상황을 모두 종합해 보면 나는 합격통지서를 받은 것을 끝으로 이 여정을 접었어야 했다. 그런데도 놓을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랜만에, 어쩌면 처음으로 생에서 가장 가지고 싶던 것을 손에 넣는 순간을 맞았다. 손에 들자마자 그토록 소중한 것이 손 틈 사이로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샌님들이 시대의 지성으로 추앙받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다. 내가 하려는 공부는 내게 부도, 명예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내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이들을 말했다.
"부모님이 경제적 여력이 되시면 부모님 도움을 받는 게 나쁜 건 아냐. 앞으로 갚을 거라 생각하고 지금은 눈 딱 감고 받아서 써."
마음이 흔들렸다. 그보다 내 홀엄마는 경제적 여력이랄 것이 있나? 내 엄마는 앓는 소리는 할지언정 자식의 발목을 잡는 모진 어미는 결코 되지 못할, 그저 선한 사람이다. 나는 그 뱃속에서 열 달을 움텄고, 스무 해가 훌쩍 넘는 시간을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고혈을 빨았다. 공유한 시간만큼 나는 내 엄마의 타들어가는 속도 훤히 볼 수 있다. 내 엄마는 오십 대 중반이 되면 샤넬백은 아니더라도 버버리백 정도는 가볍게 살 수 있으리라는 꿈을 꾸었지만, 이제 그 꿈은 박살이 날 운명이었다. 엄마와 딸의 건강한 관계를 위해 거리를 두고 싶다더니. 그것은 전부 거짓이었나. 나는 결국 엄마의 노후자금까지 끌어다 쓰는 후레자식일 뿐인가.
문제는 나의 어수선한 마음만이 아니었다. 최대 위기가 왔다. 2020년 봄, 한국과 일본을 비롯해 아시아 전역에 코로나 19가 창궐했다. 덜컥 겁을 집어먹은 영국정부는 동아시아발 항공편을 모조리 취소하기 시작했다. 예약한 항공편이 취소되었다는 메일이 수신함 첫 줄에서 허무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발이 묶이면 어쩔 도리가 있나. 안 될 놈은 어떻게 해도 안 되는구나. 운빨로 이룬 것이 최악의 운을 타고 나를 빗겨 나고 있었다. 시작하자마자 접을 위기에 놓인 꿈도 꿈이라면 꿈인 걸까? 이 도전은 성취하자마자 나락으로 고꾸라질 운명인가. 합격의 마취에서 풀리는 순간 현실은 대차게도 뺨을 후려친다. 죄책감과 야심, 후회와 선택, 현실과 꿈 사이를 서성이며 여태껏 실패뿐인 것만 같던 나를 나는 어떻게 기억하고 싶은지 물었다. 아스러지더라도 끝을 볼 것인가.
*이에 대한 사실은 확인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학교에서 더 이상 '유예(defer)' 요청은 받지 않겠다는 말과 함께 이번 학기 입학을 재고할 학생은 다음 해에 재지원을 권하지만 합격 보장을 할 수 없다는 반 협박성 메일을 보내왔기 때문에 결원이 너무 많아져 나를 뽑았다고 추측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