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교민 2024 총선 재외국민선거 참여후기
재작년 이곳에는 런던시장을 뽑는 선거가 있었습니다. 유럽계 친구들은 너도나도 투표했냐며 이야기를 나누더군요. 그들이 당연한 듯 내게도 물었습니다. "넌 언제 갈 거야?" 나는 내심 그들의 이야기를 생경한 마음으로 듣던 중이었습니다. 당황한 눈빛을 둘 곳 없이 우왕좌왕하며 말했습니다. "나는 투표권이 없는데..." 그 순간은 영영 이방인인 나를 확인받는 재판정 같았습니다.
유럽계와 비유럽계를 나누는 스산한 경계를 느낍니다. 그 너머에 유럽계와 영국시민을 나누는, 내게는 너무나 먼 경계가 어렴풋이 스칩니다. 삶은 빠듯하고 허리는 하루하루 굽어갑니다. 서글프게도 이런 나의 소리를 실어 보낼 재간도, 들어주는 이도 없지요. 나는 이 나라 시민들의 실낱같은 선의에 기대 삽니다. 방향도 알 길 없는 망망대해를 부표처럼 일렁이고 있지요. 이것이 외국인으로 사는 자의 운명입니다.
올해 영국도 총선을 치릅니다. 이 나라는 수년 전 브렉시트라는 무모한 결정을 참 쉽게도 이끌어낸 나라이지요. 그때부터 이들의 삶은 몇 곱절 고달파졌고, 내 나이 또래는 미래를 보며 절망을 그립니다. 그 시절 외국인을 탓하던 이들은 여전히 외국인을 미워합니다. 나는 언제까지고 그들의 미운털일 것이기 때문에 저들의 이기적이고 바보 같은 결정에 무너져내리는 내 미래가 억울해도 악 소리 한 번 질러보지 못합니다.
그럴 때 내게도 한 표를 행사할 권리를 주는 모국이 저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음이 안도가 되는 것입니다.
재외국민의 정치참여는 실은 품이 많이 듭니다. 누구도 투표인 등록기간과 선거 일정을 일러주지 않습니다. 스스로 알아보고, 몇 달을 앞서 재외국민선거 등록을 합니다. 내가 외국에 사는 한국인이 맞다는, 내 여권이 초록색 혹은 파란색이라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내가 남의 나라 어느 구석에 붙어살고 있는지도 일일이 보고합니다. 드디어 내게 한 표의 권리가 생깁니다. 우리는 이렇게도 비싼 권리를 당연한 것으로 누리고 살아왔지요.
나는 이곳에 살며 쉼 없이 내가 얼마나 작고 무력한 존재인지 느낍니다. 내 집에 있을 때는 쉽기만 하던 일들, 아프면 병원을 가고, 전기요금과 수도요금을 이체하고, 은행업무를 보는 일까지. 무엇 하나 진땀을 빼지 않고 이뤄지는 일이 없습니다. 나는 외국인 된 설움을 알아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보잘것없다고 치부되는 이름들에 더 마음이 쓰입니다. 이곳에서 내가 경험하는 부조리를 나의 모국에서도 느끼는 이들이 있겠지요. 나이 때문에, 성별 때문에, 통장 잔고 때문에, 국적 때문에....... 나는 그 모든 이름들을 위해 내 표를 보냅니다.
나는 그렇게 당신보다 조금 이른 지난 주말 대사관을 찾았습니다. "용지가 아주 깨끗하게 잘 인쇄되었네요!" 선관위 담당자분이 기분 좋게 종이 두장을 건네주셨습니다. 투표용지와 봉투를 받아 들고 기표소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길고 빳빳한 종이 위에 나의 울분, 야망, 티끌 같은 희망을 봉인해 고이고이 보내는 일입니다.
당신은 붉은 인주를 꾹 눌러 찍는 순간에 몰려드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아십니까? 흡사 간절한 염원을 담아 돌탑을 쌓아 올리는 주술행위 같기도 합니다. 나는 그 작은 기표소 안에서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공보자료를 읽고 마음을 정리하고 나선 길이었음에도 내 선택이 누군가의 삶에 지나치게 과중한 무게가 될까 봐 망설이는 나를 봅니다. 무엇보다 정치가 사라진 세상 아니던가요. 본질이 같은 텅 빈 약속들을 봅니다. 그 사이에서도 차악을, 차악 중에서도 최선의 차악을 선택 야한 일일지라도 해야만 한다는 고통이 밀려듭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해 본 투표는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뿌듯했습니다. 투표장을 나서며 나도 투표권이 있는 인간이라는 아득하던 사실을 피부로 느낍니다. 나는 반쪽짜리 인간도 아니고, 2등 시민도 아닌 정치적 인간입니다. 이 순간 나는 고개 숙이고, 숨죽이고 그들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이름 없는 외국인이 아닙니다.
3년 전, 나는 미국인 교수가 시민권의 태생적 부조리를 가르치는 강의실에 앉아있었습니다. 출생과 동시에 주어지는 시민권은 내국인과 외국인을 차별한다는 아주 기본적인 원리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대체로 시민권의 힘을 느끼지 못한 채 태어나고 죽습니다. 하나 이 단순한 원리는 다양한 형태로 우리의 삶을 제약합니다. 그 족쇄를 시시각각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방패막 하나 없이 외국인으로 사는 이들입니다. 출신국이 열강의 축에도 못 끼는 것은 둘째치고 열강의 식민지로 골수까지 착취당한 나라라면 족쇄는 더욱 아프게 당신의 발목을 죄여옵니다.
시민권과 함께 나이를 먹고 보면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투표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권리를 당연한 것으로 만들려 무수한 사람이 목숨을 던졌고, 부정할 수 없는 논리를 만들기 위해 날고 기는 철학자들은 온 생을 쏟아부었지요. 그 무게는 모두 먼지로 사라지고 눈앞의 종이 한 장만 남았을 때, 그것이 때가 되면 돌아오고 당신의 휴일 아침 단잠을 방해하는 성가신 일이 된 오늘. 당신은 나와 같이 외국인이 되어버린 당신의 이웃을 생각해 주시겠습니까?
올해 재외국민 투표율이 사상 최고를 찍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온 세상이 요동을 치니 우리는 어디라도 울분을 토할 구석이 필요합니다. 많은 이들이 이토록 버거운 삶을 나의 가족도 살고 있을까 하는 노파심에, 내 친구가 오늘 저녁 훔칠 눈물이 내가 매일 저녁 흘리던 것과 같은 맛이려나 하는 걱정에 번거로운 걸음을 재촉해 투표소로 갔겠지요.
한편, 한국에 있는 동생에게서는 이런 소식도 들었습니다. 특정 당의 당선을 막아야 하니 무조건 가장 유력한 상대당을 뽑기를 강요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고요. 자신의 진리를 최선의 진리로 확신하고 타인을 자신의 진리에 끼워 맞추려 할 때 벌어지는 일을 우리는 '파시즘'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당신의 절박함과 조급함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당신의 우려가 타인을 억압하는 형태로 빗나갈까 두렵습니다. 타인의 목소리를 악마화하지 않고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그곳에서 희망을 봅니다. 나는 당신과 내가, 우리 모두가 나의 대의를 절대선으로 착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작은 목소리를 음소거할 수 있는 것으로 치부해버리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이 선거가 성숙한 정치적 인간으로서 우리들의 태도를 증명하는 장이길 바랍니다.
나의 영국인 애인은 한 때 사회주의당 집회에 참가할 만큼 급진적인 정치색을 가졌습니다. 그런 그는 중산층 백인이 득시글거리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충실한 왕정주의자들이고 선거철이 되면 꼬박꼬박 보수당(토리당)을 지지하는 '모범적인' 영국의 시민(혹은 신민)입니다.
이 가족의 저녁 식사에 처음 초대받았던 날 나는 뭉클했습니다. 그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정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애인의 가족 중 누구도 언성을 높이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설득하려 하거나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듣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더군요. 그들은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대화하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내 애인의 아버지는 평생 보수당을 지지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면서 내 애인을 사회주의당 집회에 직접 운전해 데려다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해하지 못해도 미워하거나 폄하하지 않습니다.
나는 검정 아니면 흰색인 삶은 싫습니다. 이곳으로 올 때도 그랬지요. 망쳐버린 그림을 부욱 찢어 버리고 하얀 도화지에 새 그림을 그리겠다고. 그러나 내 도화지는 또다시 엉망진창입니다. 그러나 그 그림이 썩 괜찮아 보이는 것은 남들이 망처 버린 내 삶도 예술로 포용해 줄 것이라는 믿음, 누구의 삶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관용을 배워가기 때문입니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당신의 마음도 알겠습니다. 밖으로 쏟아내지 않으면 내가 재가 되어버릴 세상이니까요. 그럼에도 누구에게 화를 내어야 하는지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모쪼록 나는 당신의 평온한 내일을 소망하며 붉은 인주를 힘주어 눌렀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조금 더 친절한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