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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재희 Jun 08. 2018

오차츠케란 묘하다

이번에는 오차츠케お茶づけ 얘기다. 아무리 일본애들이 극단의 미학을 몸소 실천하는 극성의 종이라지만 오차츠케는 참 묘하다. 나로서는 녹차물에 밥 말아먹는다는 이 간편한 발상을 눈꼽만큼도 해본 적 없으니 더 그렇다. 뭐랄까. 아메리카노에 두부 썰어넣어 찌게 끓이는, 거의 그런 느낌의 엉뚱함이랄까.

그러다 내 손으로 직접 아메리카노에 밥.. 아니 녹차물에 밥을 말아본게 작년 이맘 때였다. 구체적 사연은 이렇다. 제주도에서 3박하며 혼자 걷기여행 중이었다. 정처도 향방도 없이 무대책으로 앞으로 질러 들어가는, 산책과 행군 사이쯤의 강도였다. 밤도 깊고 무엇보다 무릎이 욱신거려 도무지 더는 걸을 수 없었던 시점. 갑자기 무서워졌다. 낮에는 그리 사람의 심부를 뻥 뚫는 감격과 환희의 자연풍광이 밤이 되니까 조명꺼진 창고처럼 한치 앞이 안보였다. 시골길의 희열은 금새 휘발해버리고 어디선가 봉고차 같은게 멈춰 사람을 확 낚아채가도 모를 외딴 공간.

무시무시한 기분 속에 내 긴장의 볼티지도 최대로 끓었다. 어디든 당장 뛰어들어가 쉬어야겠다 싶었다. 종달리 숲길을 헤쳐 지나자 마침 멀쩍히 어둠 한가운데 오아시스처럼 빛웅덩이 같은 건물 한채가 서있다. 게스트하우스였다. 이 정도 피로감이라면 거기가 도깨비집이래도 상관없다.

달려들어가 물어보니 삼만오천원을 달란다. 나는 울상이었다. 찜질방에서 숙박하면 칠천원이면 될 것을. 뭐. 수가 없다. 값을 치루고 대강 짐을 풀고 샤워했다. 장단지에 파스도 발랐다. 덜말린 머리가 축축한 것이 묘하게 나쁘지 않았다. 나는 이부자리 위에서 낮에 읽던 책을 마저 보고 글자가 눈앞에 빙그르르 각자도생하듯 꾸물거릴 즈음 파주의 아내와 통화하였고 그러다 이른 잠에 파묻혔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좁은 게스트하우스 룸에 햇빛이 강물마냥 넘실거렸다. 대강 씻고 아침을 공으로 준다길래 얼른 카페 겸 식당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주인에게 한그릇 받아든 것이 오차츠케였다. 욱신욱신한 무릎을 조물락거리면서 오차츠케 모양을 유심히 살피던게 기억난다. 여기까지가 오차츠케를 받아들기까지 긴 사연이다. 왜 구구절절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차츠케는 뜨거운 밥을 좀 큰 그릇에 담고 밥 주변에 찬 녹차물을 돌돌 채워담는 일본의 간단식이다. 밥 위에는 명랏젓이나 오징어젓갈 같은 짠지를 살짝 얹는다. 밥주변에 채워져 자맥질하는게 녹차물이라는게 좀 엉뚱한거지, 그냥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입 맛 없을 때 물에다 밥 말아먹는 그런 식이다. 내가 받아든 오차츠케는 그 모양이 호수 가운데 봉긋 솟은 흰 밥의 섬 같았다. 수석이나 분재 같은, 음식으로 뽐을 낸 일본식 미니어처 정원 같기도 했다. 묽은 연노란색 찻물이 베어있는 찻물은 시원한데 차츰 흰 섬에서 퍼지는 뜨거운 밥기운에 인근 해역부터 덥혀지기 시작한다. 열이 수면 아래로 퍼질수록 밥도 물에 녹아들고 마침내 섬의 강직스런 봉긋함은 와해되기 시작한다. 섬의 침강을 즐겁게 관찰하며 나는 숫가락으로 이 밥 주변부를 깎아 녹차물에 끼얹어 먹는다.

대개 흰 밥위에는 오징어 젓갈이나 명란젓 같은 짠지를 얹는 법인데 개인적으로는 오징어 젓갈이 녹차의 무미건조함과 대치되면서 그릇 안에 명료한 콘트라스트를 만들어 좋더라.

하여간 짠지와 녹차와 밥이라는 세가지 컴포넌트는 적절히 자극적이고 적절히 향긋하다. 녹차는 풀섶과 채소의 내음을 입에 퍼뜨리고 쌀밥은 무채색의 신중한 위안을, 젓갈은 짤막하고 탱탱한 텐션을 입안에 감돌게 한다.

흔히 쓰듯 ‘말아먹다’라는 표현이 있다. 좋은 뜻은 아니다. 부정적 결과, 난장판을 만들었다는 어감이다. 그런데 같은 말아먹기지만 이상하게 이 일본식의 ‘물에 밥 말아먹기’는 확실히 난장판이라는 느낌이 없다. 감각의 지점이 좀 다르다. 비빔밥처럼, 혹은 대충 말아먹는 일련의 간편식과는 달리, 오차츠케는 한 그릇 안에 모든 것을 어중간히 배열한 절충의 미학이 있다. 완연히 섞이어서 이도 저도 아닌 태세가 되려하지 않겠다는, 그저 적당히 녹차에 밥을 가미하고, 짠지에 녹차물의 풀내음을 가미하며, 그리하여 수습과 혼융의 절축식 미학이 숫가락에 담겨 한 입 촉촉한 목구멍 안으로 진입해 간다. 그 절충적 합리성이 녹차물에 밥말아먹는 급진성으로 조형되었다니, 꽤 아이러니이기도 하고.

결코 섞여들지는 않는 공존, 밀착하지 않은 수준의 협업. 뭐랄까. 좀 과도하게 진지해져보자면, 오차츠케는 일본인의 자기 성찰같은 음식이다. 자신들의 인생 태도를 미니어처로 조형한, 그것은 마치 수석이나 분재처럼. 나는 밥을 떠먹으며 생각을 연쇄해나간다. 좁다란 땅 위에서 일억 넘는 일본인들이 얽히고 뒤죽박죽으로 사는 장면이 떠오른다. 엉켜져 살지만 정작 각자의 본질이 담긴 심부心府 만큼은 건드리지도 섞여들려하지 않은, 따로 따로의 외딴 심정들.

그래서 하는 말인거다. 오차츠케란 묘하다. 거기 녹차물 위에 둥둥 떠도는 흰밥의 섬처럼, 이 그릇 안에서는 일본인들이 내색하지 않는 한꺼풀의 심성이 들여다보이는 것 같다. 하여간 묘하다. 냠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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