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여행 뒤, 짧은 기록들.
호주에 정착해 살고 있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같이 중창 동아리 활동을 했던 친구들과 호주 여행을 다녀왔다. 시드니, 골드코스트, 브리즈번 3개 지역을 다니며 좋은 곳, 좋은 음식을 마음껏 누렸다. 밤의 해변이나 울창한 공원 등, 넉넉한 곳을 지날 때에는 한 때 열심히 연습했던 곡들을 다시 불러보기도 했다.
이 번에 처음 가 본 호주는 정말 좋았다. 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공간이 넓어 쾌적하다. 공기가 맑고 날씨가 전반적으로 좋으며, 녹색 식물이 많다. 사람들이 친절하고 여유가 있다. 그리고, 다양성에서 느껴지는 편안함이 있다. 여행자로서, 모든 것이 실제보다 더 좋게 느껴지는 부분을 감안하더라도, 호주는 좋은 점이 많았던 것 같다. 이번 여행은 특별히, 호주에 정착해 14년째 살고 계신 한국인 이민자 가정에 초대되는 기회가 있었는데, 이 분들이 말씀하신 호주의 좋은 점들 또한 내가 느낀 것과 같았다.
호주는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과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대한민국 영토의 약 80배 면적을 가진 거대한 나라면서도, 전체 인구는 대한민국의 절반이 되지 않는다. 호주의 넓은 영토 중 사람이 거주하는 곳은 극히 일부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서 나오는 막대한 천연자원들이 많은 돈을 벌어다 준다. 또한 농산물 생산량도 워낙 많아 70% 이상을 수출할 수 있을 정도로 식량이 넉넉한 나라다. 그 결과로, 호주 사람들은 주 38시간 정도를 일하면서도 1인당 GDP가 63500 달러(2023년)로, 33000 달러인 대한민국의 2배 정도 된다.(호주에서 만난 이민자들과 현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초과 근무를 하는 경우는 1년에 손에 꼽을 정도라고 하니, 덜 일하면서 평범한(nominal) 삶을 누릴 수 있다. 가공 무역 등 노동력 의존도가 큰 산업이 주류인 대한민국이나 대만의 사정과 전혀 다르다). 넉넉한 곳간에서 나오는 호주인들의 여유와 다정함.
넉넉함으로는 치자면 미국이 빠질 수 없지만, 그래도 호주는 인구 밀도가 낮다는 또 다른 장점이 있다. 호주 최대 도시인 시드니의 인구 밀도는 제곱킬로미터당 550명 수준으로, 11000 명 정도 되는 뉴욕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을 보인다. 인구 밀도가 높으면 창의적 작업물(특허 출원 등) 생산 비율이 늘고, 고도화된 기간 시설 설치가 가능한 장점이 있지만, 개인이 누릴 수 있는 공간이 좁고, 교통 체증 등 삶의 질을 저해하는 불가피한 요소들이 따라온다. 이에 대해서는, 제곱킬로미터당 15000 명이 넘는 서울 생활을 해본 분들은 쉬이 아시리라.
+ 시드니 이후 브리즈번을 방문했을 때, 많은 브리즈번 사람들이 시드니가 너무 붐벼서 살고 싶지 않다고 얘기하는 것이 참 재밌었다.
여행을 하면서 들었던 짧은 생각과 일화를 적어둘까 한다.
소위 워라밸이라는 말이 한국에 유행하기 한참 전, 모두가 격무를 견뎌내던 낭만과 허슬의 시절. 어떤 가정을 세우는 것이 맞는지 고민이 많던 한국인 부부는 호주로 거처를 옮겼다. 일주일에 같이 식사는커녕, 제대로 된 대화도 하기 힘들었던 지난 삶을 돌아보며 내린 결단이었다. 다행히 두 사람은 모두 호주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과 역량을 갖추고 있어 정착을 하는 데는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역시, 이민자의 삶은 쉽지만은 않았다. 작은 것 하나도 새로 꼼꼼히 알아봐야 했고, 어떤 때에는 나라의 복지 혜택이나 여러 정책에서 소외되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몇 번을 돌아봐도 잘 한 결정이었다. 부부가 소개한 두 가지 일화가 있다.
호주에서 변호사가 되기 위한 마지막 시험을 치르는 날, 갑자기 새벽에 출산을 하게 되었다. 예정보다 훨씬 빠른 출산이어서, 남편이 다니던 회사나 시험 관리처에 알릴 겨를도 없이 새벽같이 병원으로 가야 했다. 다행히 아이는 건강하게 잘 태어났다. 이후 직장에서는 잘 된 일이라며, 업무를 이어받을 사람을 정해줄 테니 전화로 업무 안내를 해달라고 연락이 왔다. 인수인계가 잘 안 되더라도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그게 관리자가 있는 이유니까) 아무런 걱정 말고 잠시 휴가를 내라고. 그리고 시험은 몸을 다 회복한 뒤 다시 볼 수 있도록 미뤄졌다. 시험 관계자는 너무 잘 된 일이니 아무 걱정 말고 몸을 회복했으면 좋겠다고,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알려달라고 연락을 줬다.
아이가 학교에서 상을 받아왔다. 평소에 친구들에게 양보를 잘해서 받은 상이 었다. 이듬해 또 상을 받아왔는데 이번에는 선한 마음이 있어서 받은 상이 었다. 상을 받을 때마다 친구들이, 또한 많은 이웃들이 축하해 주고 칭찬해 줬다. 물론, 학업 성적이 좋아서 상을 받는 아이들도 똑같이 칭찬을 받는다.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것과, 친구들에게 양보하는 것. 잘한 일에는 똑같이 칭찬이 주어진다. 물론 학업 성취를 평가받고, 이를 위해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하는 기간들이 있다. 그러나 역시 중요한 것은, 잘한 일이라면, 그리고 맞는 방향이라면 칭찬과 격려가 있는 환경이다. 자신만의 속도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아이들은 다시 칭찬과 격려를 베풀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한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국가마다, 지역마다 다르다. 그리고 그 차이는 개인의 삶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어떤 곳에서 태어날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지만, 어디에서 살아갈지 결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14년 차 이민 생활 중인 부부는, 이민자의 삶이란 결코 쉽지 않다고 여러 차례 얘기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삶을 통해 나는 '무엇이 더 중요한가' 하는 질문을 품게 되었다.
이번 여행을 계획하며, 우리는 돌아가며 하루씩 맡아 일정을 짜기로 했다. 내가 맡은 날은 시드니에서 보낸 첫날이었다. 날씨가 좋을 것으로 예상되어, 많이 걷는 날로 계획했다. 배우 신세경 씨의 유튜브 영상에 올라온 시드니 여행 일정을 참고했으니,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감사합니다).
먼저 시드니 도심부인 헤이마켓에 자리한 숙소에서 하이드 파크까지 걸었다. 하이드 파크는 고층 건물이 즐비한 업무 지구에 있어 경관이 매우 특이하다. 울창하게 높이 솟은 나무들과, 그 멀리 보이는 고층 건물, 그리고 건물들 사이 넉넉한 여백을 통해 보이는 깨끗한 하늘. 이것이 이후에 시드니를 기억할 때 대표 이미지로 남을 듯싶다.
하이드파크를 지나, 세인트 메리 대성당을 지나고 나면 로열 보타닉 가든이 나온다. 보타닉 가든 안에서는 나무들과 새들, 잔디밭에 둘러 쌓일 뿐이다. 도심 속에 있지만, 도심의 소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 끝없이 이어진다. 한 시간 정도를 천천히 걷고 나면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 브리지가 보이는 바다가 나온다.
이후 옵저버토리 힐(천문대가 있는 언덕)에 올라 시드니의 일몰을 본 후, 페리 선착장으로 이동해 페리를 타고 시드니 야경을 보는 것으로 일정을 마쳤다.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일정이다 (신세경 씨 감사합니다).
시드니는 사람들의 공간 사이사이에 나무와 하늘을 많이 넣는다. 맑고 깨끗한 날씨와 어우러져, 편안함을 준다. 갑갑한 일상에 지쳐 잠시 밖으로 나갔을 때, 이런 경관을 마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심지어 사람이 적어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니 (날씨 좋은 날, 돗자리가 빼곡한 한강 공원이란). 건축가 유현준 선생님이 여러 차례 근린 생활 공원의 중요성을 말한 이유를 이제 확실히 알았다.
시드니에 머무는 마지막 날은 세계 최대 규모의 게이 퍼레이드가 열리는 날이었다. 이 퍼레이드를 구경할 생각은 계획에 없었는데, 시드니에 머무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 퍼레이드를 꼭 보라고 추천을 해줘서 잠시 구경을 갔다. '마디 그라'라 불리는 이 퍼레이드는 하이드 파크에서 시작해 시드니 중앙 도심부를 지나는 거대한 행열이다. 우리는 퍼레이드가 시작하기 한 시간 전, 그 열기를 체감하기 위해 잠시 하이드 파크를 들렀다. 많은 사람들이 강한 원색 계열의 옷을 입고(그리고 굉장히 적게 입고) 하이드 파크로 모여들고 있었다. 세계 어디에서나 보기 힘든 굉장히 파격적인 옷차림들이 눈에 띈다.
1900년대 약 70년간 유색인종의 이민을 금지했던 것으로 알려진, 일명 호주의 '백호주의'는 그간 호주 사회가 얼마나 보수적인 사회였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념이다. 그런 호주의 최대 도시 시드니 복판에서 이 같은 행사가 수십 년째 열리고 있다는 것이 재밌다.
LGBT에 대한 나의 입장은 찬성이지만, 그래도 익숙한 문화는 아니다. 우선, 경험이 적기 때문이다 (한국의 평범한 인생을 사는 나는,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LGBT에 노출될 일이 잘 없다). 하지만 이번에 느낀 것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가 주는 편안함이었다. 사실 마디 그라 퍼레이드가 아니더라도, 호주 곳곳에서 마주하는 광경 속에는 언제나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억양, 그리고 다양한 옷차림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남의 옷차림 같은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다양성이 있는 곳에서 느껴지는 편안함 속에서 잠시 나는 눈치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정작 행렬을 보진 못하고, 준비 과정만을 구경한 뒤, 일정에 있던 재즈 공연을 보러 갔다. 그곳에서 싱어는 마지막 곡을 부른 뒤 이렇게 말했다. "자 이제 마디 그라를 즐기러 가야죠?"
지금까지 안정되고 이상적인 복지 국가에서는 위대한 지성이나 영웅적 인간이 태어나지 않았다. 그런 환경은 천재의 출현을 막는다. 그러나 고난과 역경이 많았던 민족에게는 그 민족이 자유의지 본능에 의해 천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
국가는 개인의 안정과 행복을 지켜 주는 조직과 제도지만, 그 목표가 완성에 가까워질수록 개인은 국가에 의해 약화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국가의 본래 목표도 잃게 된다.
프레드리히 니체 <어떻게 살 것인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니체를 읽으며, 다시 한국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한 정신 무장을 했다. 니체에 대해 거의 모르지만, 적어도 그가 강인함을 강조한 것은 알고 있다. 동정이나 연민은 오히려 악이며, 강함과 투지는 선이다. 작고한 지 100년도 넘은 철학자의 말을 비판 없이 들을 일은 아니지만, 니체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그가 추구하는 이상적 인간이 되기 적절한 곳이다. 경쟁이 치열하고 분노가 넘치는 곳에서, 오래되고 획일적인 가치를 벗어나 진정한 초인이 되기 위해 이보다 적절한 곳이 어디 있을까.
니체가 살아있다면 묻고 싶다. 당신은 어느 곳에서 살고 싶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