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엔 김밥 속이 부족한 엄마 김밥이 싫었다. 소풍 때마다 갖은 야채로 알록달록 색을 내고 다짐 육을 넣어 만든 유부초밥이나 문어다리 모양의 비엔나소시지. 청포도나 먹기 좋게 썬 오렌지가 들어간 친구들의 화려한 도시락이 더없이 부러웠더랬다. 그래서 어느 소풍날엔 엄마가 김밥 싸는 걸 깜빡하길 기도한 적도 있었다. 김밥 집에서 햄이 크게 들어간 김밥이나 참치 김밥 같은 걸 사줬으면 하는 마음을 간절하게 담아서.
그러던 내가 어른이 되어가면서는 엄마가 싸 준 김밥 힘으로 살아간다는 걸 깨달았다. 지방에 있는 대학교를 통학하던 시절. 엄마는 그러게 누가 집 앞에 좋은 대학 놔두고 먼 길 행차하듯 시외버스로 통학하라고 시켰느냐며 잔소리와 함께 김밥을 척척 말았다. 칠흑 같은 새벽녘. 내가 반쯤 뜬 눈을 비비며 아파트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서 있으면 현관문을 열고 뛰어나오는 엄마의 발자국 소리가 선명했다. “딸~ 엉터리 김밥이라도 얼른 가방에 챙겨 넣어~ 어서~”
김밥 속은 늘 마음대로였다. 어떨 땐 참기름과 깨소금을 넣고 버무린 흰밥에 볶은 김치만 잔뜩 넣은 김치 김밥. 운이 좋은 날엔 지난 저녁상에 올랐던 제육볶음을 넣은 고기 김밥. 그렇게 엄마 김밥 속은 늘 예측 불허지만 허기진 뱃속을 달래기엔 최고의 맛이었다. 이젠 어른이 되어서 어련히 알아서 밥만 잘 사 먹고 다니는 딸인데도 밥 한 끼 제대로 못 먹을까 봐 늘 염려하는 엄마다.
그땐 나도 뭐가 그리 바쁘다고 뻗댔는지. 새벽녘마다 맨발로 슬리퍼를 신고 엘리베이터 앞까지 쫓아 나와서 김밥을 건네는 엄마에게 볼멘소리를 한 적도 많았다. 바빠서 먹을 시간도 없는데 왜 자꾸 김밥을 마냐면서. 돌이켜보면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는 틈틈이 엄마의 김밥은 늘 요긴한 음식이 되었다. 사실 사 먹는 그 어떤 음식보다도 훨씬 영양가도 많고 정성 가득한 김밥인데 엄마는 늘 엉터리 김밥이라도 먹으면서 일하라는 말을 자주 했다.
모처럼 엄마와 공연을 보러 갔을 때도 엄마의 김밥 사랑은 여전했다. 저녁까지 회사 미팅을 급히 마치고 공연장으로 뛰어갔는데 공연 시작 오 분 전에 엄마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얼른 먹어. 몇 개라도 입에 넣어봐.” 암전 상태인 컴컴한 공연장 의자에 앉아 엄마는 김밥을 꺼냈다. 나는 적잖이 당황한 마음에 창피하게 왜 여기서 김밥을 꺼내느냐며 엄마를 다그쳤었다. 기본적인 것도 모르냐고 툴툴거렸더니 “네가 아까 전화로 밥도 못 먹었다고 해서 그랬지…….” 엄마는 목에 맨 호피무늬 스카프를 매만지며 멋쩍어했다.
행여나 자식이 밥도 못 챙겨 먹을까 봐 염려하는 마음. 현관문을 나선 딸이 사라지기 전에 건네줘야 한다는 급한 마음으로 싼 못난이 김밥. 김밥 옆구리가 터진 엉터리 김밥. 그런데 엄마가 말하는 그 못난이이자 엉터리 김밥이 살면서 내게 이렇게 큰 힘이 될 줄이야. 십 년 넘게 직장생활을 해보니 엄마만큼 내 끼니를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는지 그땐 몰랐던 것이다.
가끔 옆구리가 터져도 울퉁불퉁 못난이라도. 엄마가 말하는 엉터리 김밥은 세상에서 제일 온전한 마음이 담긴 최고의 음식이다. 오로지 딸의 든든한 끼니를 챙겨주고픈 엄마의 고운 마음이 양념으로 들어간 완벽한 김밥인 셈이다. 바쁜 일정 속에서 어디 가서 밥을 사 먹기도 뭐하고 배는 고플 때 엄마의 김밥은 진가를 발휘했다. 쿠킹포일에 아무렇게나 싼 김밥을 쓱 꺼내서 입 안으로 쏙쏙 몇 개 넣으면 배도 부르고 맛은 더없이 좋았다. 나는 여전히 엄마 김밥을 먹고 회사를 다니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소중한 기억들을 잊고 지냈던 지난날. 젊은 시절 엄마의 얼굴을 가만히 떠올려본다. 대학 수시 면접을 치르러 갈 때도 엄마는 휴게소 테이블에 직접 싼 김밥을 꺼내던 사람이었다. 소금을 친 휴게소 표 알 감자와 어묵 국물을 후후 불어 먹는 내 입에 김밥을 넣어주던 엄마의 따스한 손길. 대학 교정에 교복을 입고 서 있던 열아홉의 나를 향해 웃어주던 엄마의 얼굴. 분명 지금보다 훨씬 생동감 있고 싱그러웠다. 가끔 엄마한테 서운한 마음이 들 때마다 엄마가 내 끼니를 걱정해주었던 무수한 순간들을 떠올린다.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옹졸한 딸인지를 실감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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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냉장고에는 언제나 김밥용 김이 수북하다.
※ <그렇게 엄마를 닮아간다>의 연재 글마다 엄마의 짧은 소감문이 하단에 실립니다
- 딸이 쓴 글을 엄마에게 보여주고, 엄마가 딸에게 화답을 주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