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새벽에 잠이 안 오면 눈이 뻘겋게 충혈된 채 홈쇼핑 채널을 돌리는 버릇이 있다. 새벽 두 시도 넘은 시간. 허전한 엄마의 목주름이 생각났다. 그날은 화면 속 모델이 주얼리 세트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조명 때문인지 유난히 영롱하게 반짝였다. “18K 골드 목걸이를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 찬스. 놓치지 마세요.” 쇼 호스트의 다급한 목소리가 목걸이 펜던트에 박힌 다이아몬드처럼 귀에 콕 박혔다.
몇 주 전이었다. 부모님 댁 소파에서 모로 누워 있는데 엄마가 운동복 바지를 입은 내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하여간에. 엄마가 옆으로 누워서 TV 보지 말랬잖아. 목주름 생긴다니깐!” 그러고는 맥없이 본인의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린다. 꼭 못돼 먹은 딸들은 청개구리 수법을 부리지 않는가. 나는 엄마의 잔소리에 오그라든 새우등 껍질처럼 더 구부린 채 핸드폰 게임을 했다. “목주름 좀 생기면 어때. 다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뭘 그래?” 말은 그렇게 하면서 엄마의 목 주변을 곁눈질했다.
어라. 언제 이렇게 엄마의 목이 늙은 걸까. 사실 나는 그 순간 적잖이 당황했다. 얼마 전부터 엄마가 자꾸 탄력 크림 얘기를 하더라니. 엄마는 부쩍 노화가 온 목주름 고민을 털어놓긴 했었다. 복숭아 살결처럼 유난히 희고 매끄러웠던 엄마의 속살이 페스츄리처럼 겹겹이 늘어져 있었다. “얼굴은 화장하고 어떻게 가려봐도~ 목주름은 한 번 생기면 어떻게 못하는 법인가 봐~” 엄마는 손거울로 자신의 목주름을 비춰보면서 작게 한숨을 뱉었다.
나도 덩달아 속상한 마음이 들어서 엄마의 목을 한 번 쓱 만져봤다. “정 여사. 돈 아끼지 말고 탄력 크림도 덕지덕지 처발라야 효과가 나오지!” 하자 별안간 웃음보가 터진 엄마는 손거울을 내팽개친 채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막 웃는다. 나는 머쓱함에 “처바르는 거 표준어야. 왜 웃고 그러셔.”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평소 말본새를 공격하면서 놀려먹는데 나는 아차 하는 마음이 든다. “아빠가 결혼기념일 날 사준 목걸이 어디 갔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엄마는 아니 그게 하면서 자꾸만 말꼬리를 늘어트렸다.
“나이 들면 굵은 금 목걸이를 해줘야 돼. 그래야 주름 있는 목주변이 초라하지 않지.” 그러면서 나는 안방에 있는 엄마 화장대로 걸어갔다. 어디 보자. 예전에 엄마 보석함이 항상 같은 자리에 있었는데……. 화장대 주변을 다 뒤적거리는데도 보석함은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더 이상은 안 되겠는지 이실직고 얘기하겠다는 듯 내 얼굴을 보면서 멋쩍은 표정을 짓는다.
평소에 엄마는 소박한 성품에 걸맞게 보석이 없는 편이었는데 그것마저 팔았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렴 아빠 성의가 있지 남은 보석마저 다 팔아버리면 어떻게 하냐며 엄마의 팔뚝을 꼬집는 시늉을 했다. 엄마는 매년 시월 달이 되면 일 년에 한 번 기부를 한다. 꽤 오랜 시간 살림이 빠듯할 때부터 빠뜨리지 않는 엄마 자신과의 약속이다. “액세서리 거추장스러워. 둬봤자 뭐하니~” 하며 휴지로 화장대 주변 먼지만 훔치는 엄마다.
나는 어린 시절 엄마 보석함에 있던 자수정 목걸이와 호박 반지가 떠올랐다. 결혼 예물로 아빠가 사줬다는 촌스러운 원석 목걸이와 반지. 그 시절 가녀린 엄마의 목둘레에 어울리지 않게 컸던 보랏빛 자수정 펜던트가 달린 금목걸이. 아무리 옛날이라도 젊은 새댁의 손가락에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누런 빛깔의 호박 반지. 그 목걸이와 반지는 항상 엄마의 보석함에 고이 들어있었다.
부모님은 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 엄마 고향의 동네 마을 회관을 빌려 결혼식을 했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 시간에 외할머니 댁 대청마루에서 동생과 구슬치기를 했던 기억만이 남아있다. 먼 훗날. 엄마는 비디오카메라 하나를 틀어줬는데 아이보리 빛의 펄이 섞인 웨딩드레스를 입고 훌쩍이는 엄마의 얼굴이 나온 결혼식 테이프였다. 도자기처럼 매끈한 피부와 깐 달걀처럼 뽀얀 엄마의 피부 밖에 생각이 나질 않는다.
엄마는 뒤늦게 올린 결혼 예물로 아빠가 사준 자수정 목걸이와 호박 반지를 팔아서 내게 창작동화전집을 사줬다. 나는 오십 권이 훌쩍 넘는 그 책들이 닳도록 읽고 나서 엄마에게 동화책 속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 좋아했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중학생 때였나. 그땐 한국문학전집이 필요하다고 느낀 엄마는 나와 내 동생의 돌 반지들을 몽땅 팔아서 한국문학전집을 새로 산 책장에 꽂아두고 기뻐했었다.
내가 보석만 생겼다 하면 어떻게든 팔아서 살림밑천에 쓴다고 한소리를 하니깐 엄마는 “기억나니? 네가 고등학교 2학년 땐가. 나한테 몇 번이고 세계 고전문학전집 좀 사달라고 했는데 못 사줬어. 못 들은 척했거든. 그땐 애 셋 키우면서 살림이 어려울 때라서.” 엄마는 내가 사달라는 세계 고전문학전집을 못 사준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면서 결혼할 땐 세계 고전문학전집 사줄 수 있는 남편을 얻으라는 객쩍은 농담을 한다.
한석봉의 어머니는 가래떡을 썰어 자식인 한석봉의 공부를 가르쳤다면 우리 엄마는 자수정 목걸이와 호박 반지를 팔아서 내가 좋아하는 책을 사줬다. 딸이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더 아름다운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깊은 바람이 들어있을 터였다. 이번 연말에는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하트 모양 펜던트에 순금 목걸이를 사야겠다. 엄마 목이 가장 빛나 보이게끔 굵은 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