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에게>와 함께한 강릉 여행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지 않니. 무엇이든 참을 수 없어질 때가. 어느 날은 참을 수 없어서 나 조차도 내가 저지른 일인지도 모를만큼 대담한 일들을 저지르고는 한다. 별 준비도 없이 홀랑 한 달 간 다른 도시로 떠나 있는 일, 오래도록 연락이 닿지 않았던 사람에게 연락을 하는 일, 참아 왔던 감정들을 불현듯 내뱉어내는 일. 난 그렇게 자주 충동적이고, 또 참지 못한다.
아무튼 강릉 여행. 강원도 중에서도 유독 강릉을 가장 좋아한다. 강릉이 주는 분위기가 참 따뜻하다. 평평한 평지와 낮은 건물, 작은 골목들로 가득한 곳, 바다와 느슨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 이번 여행은 3주동안 꼭꼭 눌러온 응어리가 풀린 여행이었다. 지난 몇 일간 지루하게 박혀서 책과 영화를 보고 글만 썼고 사실은 하루하루가 매일 벅찼다. 누군가라도 나의 대화 상대가 되어 주었으면 해서 뜬금없이 친구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고 안 하던 짓을 했다. 이를테면 전화를 한 뒤 우울하다고 말하는 일,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쓸데없는 가십 거리들을 말하는 일. 그런 것들이 그 무렵 나에게는 꼭 필요했다. 그렇게 생각을 흘려보내고 말이라도 해야 내가 좀 살 것 같았다.
언니와 강릉에서 만났다. 몇 주전부터 잡아두고 있던 약속이라 무척 설렜다. 오랜만에 다시금 내 인생을 살고 있다고 느꼈다. 책 속의 주인공이 아닌 내가 주인공인 이야기. 출발을 앞두고는 설렘이 커서 다시금 내가 살아있다는 감정을 느꼈다.
이번 여행에서는 겨울 바다를 실컷 보았고 여행 내내 <윤희에게>를 떠올렸다. 택시를 타고 지나가며 바라본, 창문에 비친 눈이 서린 모래들과 꽁꽁 얼은 강물, 바닷가를 구경하는 사람들. 몸은 춥지만 마음은 따뜻했던 강릉 여행.
도착하자마자 점심. 이전에 들렀던 곳을 기억해 언니와 함께 다시 왔다. 주인분들은 여전히 친절했으며 음식은 여전히 맛있었다. 새로이 동선을 찾고 식당을 찾는 일은 번거롭다. 그러니 봐두었던 곳으로 코스를 짜 머리가 아프지 않은 여행이었다.
이전부터 그렇게 추천을 많이 받았던 <한낮의 바다>. 은주야 여기 꼭 가봐, 네가 정말 좋아할거야. 가야지, 가야지 했던 게 벌써 두 번째인데 웃기게도 가는 날마다 휴무였다. 겨우 올 수 있었던 책방. 이전에 제주도를 돌며 책방을 들렀던 기억도 생각나고, 무엇보다 주인분이 큐레이션 한 책들을 구경하는 맛이 있었다.
책방의 퀄리티는 주인의 안목에 따라 달라진다. 주인장 스스로가 얼마나 책을 읽고 자신의 취향에 맞는 책을 들여오는지는 좋은 책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떠오르는 사진가 표기식의 사진집과 프랑수아 사강과 아녜스 바르다의 인터뷰, 김환기와 김향안의 편지 모음집, 수전 손택의 책까지. 아녜스 바르다의 인터뷰집이 정말 갖고 싶었으나 내게는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 많았으며 이번 책방의 목적은 파리에서 읽을 책 한 권을 고르는 일이었으니 그 무거운 책을 살 수는 없었다. 어찌됐든 곧 프랑스 출국을 앞둔 터라 프랑스 문학이 많은 것도 좋았다. 프랑스를 가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에릭 로메르와 장 뤽 고다르의 묘지를 갈 생각에 벌써부터 신이 난다. 삶과 죽음이 오고가는 묘지 기행은 내가 프랑스 여행을 앞두고 가장 기대하고 있는 이벤트 중 하나이기에. 이리 저리 둘러보며 묘지에서 마주할 사람들을 떠올렸고 다시 한번 이 책방의 큐레이션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문득 책을 구경하며 생각에 잠기다가 본인은 꼭 신춘 문예에 당선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던 B가 생각이 났다. 3년 째 투고 중이었던 오빠는 올해까지 투고를 한 다음 진지하게 자신의 진로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라고 했다. 그 무렵 나는 그런 것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오빠. 시는 어떻게 돈 벌어? 나도 글로 돈 벌고 싶다.”
오빠는 그때 자신이 가방 속에 지니고 있던 책을 꺼낸 뒤 책의 마지막 장을 보여주었다.
“여기 –쇄 보이지? 1판 1쇄면 1번 찍어냈다는 말. 1판 10쇄면 10번 찍어 냈다는 말. 그러니까 쇄가 많을수록 엄청나게 잘 팔렸다는 뜻이지. ”
그 순간 갑자기 오빠 말이 떠올라 책방의 책들을 유심히 살폈다. 왠지 엄청 많이 팔렸을 것 같은 책은 인간 실격이었다. 인간 실격을 집어 들고 마지막 장을 살폈다. 96쇄군. 음. 많이 팔렸는걸. 이 지독하게 우울한 책을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니. 문득 지구 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성경이겠지, 하고 검색해보니 역시나 성경이었다. 믿음의 힘은 정말 대단하다.
아무튼 오빠 생각이 나서 그때 그 오빠랑 왜 멀어졌지 ? 고민하다가 생각이 났다. 그는 짜증날 정도로 우울했고 쪼잔했으며 자기 연민이 심했다. 그 중에서도 커다란 이유는 오빠의 글이 내게 별 흥미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빠는 내게 종종 본인이 쓴 글을 보내주고는 했다. 그럴 때 마다 나는 정성스레 읽은 뒤 감상평을 전했다. 오빠는 네가 유일하게 화자와 주인공의 거리를 떨어뜨린 채로 본인의 소설을 읽어준 사람이라며 놀랐다. 그리고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짜증났다. 아니. 그 소설 오빠 얘기인 것 같았는데. 너무 오빠같아서 부담스러웠는데. 하지만 나는 그걸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그와 멀어졌다.
언니가 먼저 결제를 했고 나는 무슨 책을 살까 한참을 고민하던 중 결국 김환기와 김향안의 편지 모음집을 골랐다.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개인적으로 너무 직접적인 제목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내용이 좋아서 구매했다. 내가 좋아하는 세 커플.
사르트르- 보부아르
김환기- 김향안
안일웅- 한소자
개인적으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를 가장 닮고 싶다.상대도 그만의 확실한 것이 있어야 하지만 내 것이 없으면 안 돼.
다음은 오브 더 모먼트. 그때 친구들과 여행 갔을 때 하우스 하서주에 비치되어있던 쿠키가 이 집 쿠키라서 이 카페가 궁금했다. 그때 역시도 이곳이 열려있지 않아서 아쉬워 했는데 오늘에서야 겨우 들를 수 있었다. 강릉은 화,수에는 대부분 휴무다. 특이한 식물과 세련된 오브제들이 있었고 친절한 사장님이 계셨다. “그때 제가 하우스 하서주에서 잤거든요. 근데 이 쿠키가 있는 거예요! 너무 맛있어서 꼭 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장님은 함박 웃음을 지으며 다시 찾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셨다. 그렇지~ 말 하나가 이렇게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고. 그러니 칭찬에는 절대 아낌이 없다.
문득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는데 배낭을 맨 대학생 커플 하나가 소품샵을 뽈뽈뽈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언니, 진짜 귀엽고 예쁘지 않아? 저렇게 배낭 매고 돌아다니는 거 완전 청춘이다. 얼마나 좋을까 이야기 했고 언니는 어머, 그러네. 말하며 그들을 기분 좋게 바라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뽈뽈뽈 커플이 횡단 보도를 건너 오더니 이곳을 지나치는 듯 했다. 그들은 잠시 몸을 놓일 카페를 찾는 듯 했는데 마침 그들을 보고 있던 나와 마주쳤고 그제서야 그들은 “여기 카페인가봐?” 하며 멈추어 간판을 바라 보았다. 이내 조금 두리번 거리다 이들이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누군가와 마주치는 일은 참 커다란 효과를 불러온다. 언젠가 핫도그를 사먹으면서 길거리 사람들을 쳐다본 적이 있는데 나와 마주치는 족족 길을 멈춰 서고 핫도그를 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사람의 눈빛은 정말 강력하지. ‘저 사람 뭐지? ’ 하다가 ‘핫도그 먹네?’ 생각하고 ‘나도 핫도그 먹을까?’ 하고 핫도그를 사먹게 해. 암튼 눈이 마주치는 것만큼 마법같고 강력한 일이 없어.
사랑만큼 지성인 일은 없어. 요새 드는 생각은 사랑은 감정의 문제나 감성의 문제가 아니라 지성의 문제라는 것이다. 상대를 마주치고 감정을 느끼는 것은 본능일지 몰라도 오래가는 아름다운 관계를 만드는 일은 지성의 문제다. 상대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서로가 성장해야만 가능한 일. 대화가 통해야만 가능한 일. 책을 펼쳐 읽는 내내 김환기와 김향안의 고뇌, 그림, 솔직한 편지들이 담겨 있어 행복했다. 아껴 읽고 싶은 책이다.
여기도 봐두었던 내추럴 와인샵. 요새는 내추럴 와인이 좋다. 첨가물이 하나도 안 들어 가서 맛이 상상 이상으로 깔끔하다. 어차피 한 두잔 이면 충분하기 때문에 구비해두고 기분 좋을 때마다 마시는 일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 하지만 나는 언제나 혼자 마시는 술은 경계하는 편이다. 주로 혼자 술을 꺼내게 되는 일은 우울하고 쓸쓸할 때인데 왠지 그럴 때 술을 꺼내들면 내가 앞으로도 힘들 때 술을 찾을까봐 무섭다. 지는 기분이 든다.
와인 디자인들도 참 예쁘지
와인을 천천히 구경한 뒤 디자인이 가장 마음에 드는 와인으로 골랐다. 계산을 하려고 나가려는데 갑자기 직원 분께서 내게 “저 혹시.. 제주도.... 텍스트...?” 라는 말을 하셨다, 뭐지? 나를 어떻게 알지? 놀라서 쳐다보니 “저희 인아웃 바뀌는 날이었잖아요. 저 갈 때 새로 들어오셨고...저 기훈이에요.”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정말로 기훈오빠였다. 오빠가 설명해주시는 내내 어딘가 편안하고 마치 어디서 본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정말로 오빠였다. 오빠 그러니까 저희 이틀 동안 같이 살았잖아요. 오빠가 블루 레몬 칵테일도 만들어주고 아침마다 요리 해주시고 트리도 뽑아와서 트리 만들어 주시고.. 그리고 우리 파라다이스도 같이 갔잖아! 그래서 오빠랑 막 이상한 오브제들 찾아다니고 그랬는데 아무튼 진짜 오빠라서 어이가 없었다. 오빠 왜 여기 계시나요 그때도 술 정말 좋아하시더니 진짜 이걸 하고 계셨구나. 허어어얼 멋져요 오빠 와인 공부 열심히 하신다고 들었어요 분명 요리도 잘하시니까 뭐든 잘 하실거예요. 암튼 안녕 저 이제 갈게요 연락해요
우리는 새벽에 연락이 닿아 와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중하게 와인을 공부하는 오빠의 모습을 보고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살고 계셨구나...
짠. 마치 여행하면서 신난 우리를 닮은 듯해서 구매한 내추럴 와인.
진짜 맛있었다.
숙소에서 몸을 녹이던 중 언니가 꺼낸 편지. 나를 보러 오는 길에 언니가 급하게 노트에 써내린 편지였다. 그러니까 언니는 사랑을 믿는다고 했다. 뭐가 됐든 사랑만큼은 믿는다고. 그리고 나를 통해 다시금 사람을 믿고 사랑을 믿게 되었다고 했다.
“사람으로 받았던 상처가 무척 컸는데. 그때 너를 만나게 된거야. 그 순간 참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나 싶었어. 내가 찾아왔던 사람을 만난 기분. 내게는 너 같은 대화 상대가 필요했던거야. ”
우리는 우리의 깊은 우정에 매일같이 감탄했고 신기해 했다. 언니는 내가 혼자 질문했던 것들에 이미 질문을 해본 사람이었다. 내가 읽은 책을 똑같이 읽은 사람이었고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을 똑같이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언니와 가까워지게 된 것도 언니 배경화면이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이라 내가 호기심을 가졌기에 일어난 일이었으니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 질 수밖에 없었다.
언니를 만나게 됐을 무렵 나 또한 이렇다 할 정도로 마음을 내놓은 곳 없이 이리저리 방황을 했다. 우선은 잔뜩 날이 선 채로 사람을 믿지 못했다. 아마 최근에 미친 듯이 커다란 배신을 겪은 일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사람을 믿기가 싫었고 무엇이든 내던져 버리고 싶었다. 그러니까 그게 다 무슨 소용인데? 지속적으로 사랑을 주어온 사람에게만 마음을 열고 나머지는 완전히 닫아 버렸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미친듯이 나에게만 집중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데 딱히 그런 얘기를 재미있어 할 것 같지도 않았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들은 내가 뱉는 말들에 대충 넘긴 뒤 다른 주제로 돌렸다. 그건 그들의 잘못도 나의 잘못도 아니었다. 단지 우리가 결이 다르다는 것. 그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허무맹랑한 만남들에 이제 진절머리가 난 것이었다.
하지만 언니는 내가 한겨울에 코트를 벗고 바다를 뛰어다녀도 뭐라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모래를 뒹굴거려도 그저 그런 아이구나, 하고 바라보는 사람. 언니는 그런 나를 바라본 뒤 “이제 다 했어?”라고 물어오며 코트를 입히고 따뜻한 곳으로 데려가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사람을 믿을 수 있어졌고 나도 몰랐던 상처들이 치유되기 시작했다. 언니를 통해 나또한 사람과 사랑의 힘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
밤바다가 비치고 파도소리가 들려오는 숙소에서 우리는 포근한 흰 침대에 누워 윤희에게를 틀었다. 마침 책방에서 본 각본집이 기억에 남았고 이제 겨울이니 이 영화를 봐야겠다 싶은 참이기도 했다.
언니 윤희가 왜 저렇게 모가 났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다시 보니 새봄이 캐릭터가 참 중요한 역할이었던 것 같지 않아? 무거울 수 있는 영화 분위기를 조금 라이트하게 만들어 주면서도 결국 둘을 만나게 한 결정적인 역할이었지? 남편도 참 외로움 많이 타고 힘들었겠다는 말들을 조잘거리며 영화를 보았다. 나는 별 게 아니고 이런 시간들을 원하나봐. 대화와 취향이 잘 통하는 사람과 편안하게 영화에 대한, 혹은 책이나 음악에 대한 얘기를 떠들으며 하루종일 시간 가는 지도 모르는 순간들을 이야기 하는 일.
아무튼 참 윤희는 봐도 봐도 마음이 아픈 캐릭터이다. 일어서려 해도 자꾸만 닥쳐오는 파도 속에서 그녀는 얼마나 일어서고 또 일어서야 했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삐뚤어지고 싶은 상황에서도 함부로 그러지 않으려 얼마나 본인 스스로를 다독이고 체념했을까. 웃지도 않고 크게 화를 내지도 않는 그녀는 내게 참 아픈 손가락이다.
영화를 보고난 뒤 그 두명이 결국은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을 했는데. 답은 역시 그저 그들은 여전히 그들 자신이 살아가고 있던 인생을 담담히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애틋하게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분명 각자의 자리에서 그대로 살아갈 것이다. 복구할 수 없어질 정도로 멀어져버린 인연은 애쓰는 것이 더욱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일이니까.
살면서 우리가 스스로 마무리 지는 인연이 과연 얼마나 될까. 대부분 스스로 마무리 짓기 보다는 억지로 마무리 짓기를 택하고, 대화보다는 침묵을 택하고, 별 노력없이 마무리 짓기를 택한다. 어쩌면 스스로 마무리 짓는 것은 더욱 용기 있는 결단이 필요하고 성숙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윤희와 쥰의 서로의 마음을 다시금 확인한 뒤 담담히 인연을 마무리 지었다는 것만으로도 성숙한 이별 이고 좋은 결말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랑했던 둘의 시간이 어언 20년이 지났지만 결국은 그 긴 세월동안 서로를 그리워했고 사랑했다는 것, 짐작이 아닌 확인을 하고서 마무리 지은 사이. 그게 진짜 어려운 이별이니까.
영화를 보다가 문득 반짝이는 것이 보여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고 창문 밖으로는 누군가 불꽃 놀이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파팡팡 터지는 불꽃과 함께 흘러나오는 윤희에게의 엔딩 크레딧. 나는 우리의 지금 장면이 독립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계속해서 터지는 불꽃들에 시선을 빼앗겨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추운 날 누군가 저렇게 예쁜 추억들을 쌓고 있구만.
언니가 가져온 질문 카드. 처음에 언니가 질문 카드를 가지고 다닌다고 했을 때 어쩜 이런 사람이 있지? 정말 대화에 진심인 사람이구나! 생각하고 신기해 했는데 나도 구매하고 싶어졌다. 은근 재밌고 쓸모있는 주제들이 많아서 친구들이랑 놀 때 마다 항상 들고 다녀야 겠다를 생각하게 될 정도다.
<인생에 배경 음악을 깔을 수 있다면?> , <요새 가장 듣기 좋은 말은?>, <모임에서 이런 사람은 싫다!> 와 같은 질문들. 특별할 게 없는 질문들이었지만 질문 카드 하나도 이렇게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 조만간 나도 구매를 해야겠다.
한창 대화를 마친 뒤 잘 준비를 하던 중 마침 케이에게 연락이 왔다. 안그래도 오늘은 그에게 전화를 걸을 참이었다. 그는 질문 카드의 정체를 궁금해했다. 나는 이런 이런 질문들이 있는데 이들 중 몇 개는 케이 너에게 써먹으려고 생각하고 있다고 장난스레 말했다. “아.. 걱정이네.” 라고 담담하게 농담을 내뱉는 케이에게는 내심 좋아하는 듯한 기분이 서려있었다. 케이는 내가 추천한 영화를 보았다며 이 영화는 이래서 좋았고, 저래서 좋았다는 감상평을 보내왔다. 내가 추천한 것들을 모조리 하는 케이를 보면 고맙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하고 여러 감정이 든다. 그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거든. 그에게 인생에 배경 음악을 깔을 수 있다면 어떤 노래를 깔것이냐고 물었고 그는 대답하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렸다. 그가 대답하는 동안 나는 세수를 마쳤고 샤워까지 마쳐버렸다. 하여튼 케이는 그렇게 느리고 신중하다. 나랑은 너무 달라. 하지만 그래서 내가 케이와의 대화를 편안하고 재밌어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케이는 함부로 우울에 빠지지 않고 건강한 정신을 지니고 있다.
느즈막이 눈을 뜨자 9시였다. 오랜만에 기분이 좋은 아침이었다. 아침은 항상 내게 공허하고 무섭다. 잠을 깨면 커다란 침대 옆에 내 곁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롯이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어 참 외롭다. 지난 밤 마무리 짓지 못했던 생각들이 떠오르면서 한 없이 무겁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잠에서 깼는데 내 옆에 누군가 누워있었고 이 사람은 웬만한 일이 아닌 이상 날 떠나지 않을 사람이었다. 창문 밖에서는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가 들렸고 햇살이 밝게 나를 품었다. 아침이 외롭지 않은 것은 참 오랜만인 일이었다. 나는 타인과 있어도 줄곧 외로움을 잘 느끼는데 언니와 있을 때는 외롭지 않았다. 문득 언니와 있으면 왜 외롭지 않은 걸까? 생각했는데 언니는 날 외롭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 쉬이 휴대폰을 보지 않고 오직 나와의 시간에만 푹 집중한다. 쉽지 않은 일인 것을 알아서 참 고맙지.
눈이 쌓인 경포대. 겨울 바다는 이래서 참 예쁘구나. 아침을 먹으러 가는 길에 마주한 풍경이 참 예뻤다. 예뻐서 계속 길을 멈추고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다시 온 테라로사. 겨울의 테라로사는 꽁꽁 얼어있었다. 퀸 아망이 먹고 싶었는데 퀸 아망도 없었고 호수도 꽁꽁. 내부도 추위로 꽁꽁. 오들 오들 떨면서 앉아있다가 결국 참을 수 없어 히터가 빵빵한 지하 1층으로 내려왔다. 회전률을 빠르게 하기 위한 전략인지 이곳은 콘센트도 히터도 와이파이도 제대로 된 게 없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침묵의 시간을 존중하는 것이다. 오디오가 비는 것을 어색해하지 않는 일, 각자의 시간을 존중하는 일. 여행을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카페에 앉아 각자 책을 읽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만나는 시간에서 내가 원하는 것은 그저 내 옆에 누군가 있어주는 것, 그리고 그 사람과 그 공간을 느끼는 것만이 중요하기 때문에. 몸이 힘들어 대화를 할 수 없을 때에는 침묵의 시간도 허용했다. 그 시간은 우리에게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시간이었다. 가끔 서로 좋은 글귀가 있으면 공유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옆에 붙어있으면서도 서로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저 가운데 놓고 함께 쓰는 인덱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공유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말했다.
. 집으로 돌아온 뒤, 문득 그림이 그리고 싶어져서 물감과 스케치북을 꺼냈다. 오늘 본 바다를 그리고 싶었다. 유화를 그리는 일은 날 편안하게 만든다. 원하는 대로 색을 섞어 만들고, 이리 저리 진하기도 하다가 옅게도 칠해지는, 그리고 붓의 흔적이 남는 유화가 참 좋다. 그냥 오늘 느낀 감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라나 델 레이 앨범 들으며 한껏 집중하니 어느덧 시간이 10시 무렵이 되어 있었다. 오늘은 몸도 좋지 않으니 얼른 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