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습관처럼 말한다.
“쟤는 멘탈이 세.”
“난 멘탈이 너무 약해서 문제야.”
마치 멘탈이라는 게 체온이나 시력처럼, 고정된 숫자 하나로 표현되는 것처럼 말한다. 높으면 좋은 거고, 낮으면 나쁜 거라고. 버티면 강한 거고, 무너지면 약한 거라고.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겪는 마음의 풍경은 훨씬 복잡하다. 똑같은 상처를 받아도, 어떤 날에는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툭툭 털고 일어나지만, 어떤 날에는 그 말 한마디가 심장에 가시처럼 박혀 하루 종일 빠지지 않는다. 분명 같은 사람, 같은 사건인데도 반응은 완전히 다르게 튀어나온다.
우리는 이걸 흔히 “기복이 심하다”라고 퉁치지만, 관점을 조금만 비틀어보면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멘탈에도 ‘체급’이 있다. 그리고 그 체급은 타고난 것만이 아니라, 그날그날의 컨디션과 지난 라운드에서 얼마나 맞았는지에 따라 실시간으로 바뀐다.
냉정한 격투기의 세계에서는 파이터를 단순히 “강하다 / 약하다”라는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는다. 시합 전, 분석가들은 세 가지 변수를 가장 먼저 체크한다. 체급(Weight Class), 최근 경기력, 그리고 부상 여부.
아무리 뛰어난 챔피언이라도 감량에 실패해 비틀거리거나, 지난 경기에서 입은 데미지가 회복되지 않았다면 승률은 곤두박질친다. 코치진은 무리하게 정면 승부를 주문하는 대신, 철저히 방어하고 시간을 끄는 전략을 짠다.
그런데 우리 일상에서는 이 당연한 상식이 너무 쉽게 증발한다. 어제는 웃으며 넘겼던 농담을 오늘은 도저히 못 견디겠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비난한다.
“왜 이렇게 약해졌어?”
“원래 너 쿨했잖아.”
그러나 정말 당신이 약해진 걸까? 아니면, 단지 ‘오늘의 체급’이 달라진 걸까?
최근 몇 달간 수면은 부족했고, 통장은 비어가고, 몸은 만성 피로에 절어 있고, 연인과의 관계는 미세하게 삐걱거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 모든 마이너스 요인을 무시한 채 “예전에도 이 정도는 버텼으니까”라고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건, 이미 억지로 감량된 페더급의 몸을 이끌고 헤비급 타이틀 매치에 올라가는 자살행위와 같다.
우리 사회에는 지독한 ‘정신력 신화’가 있다.
“단련하면 누구나 강철 멘탈이 된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악으로 깡으로 버티면 안 되는 게 없다.”
물론 이 말들은 인생의 가장 어두운 순간, 우리를 억지로라도 일으켜 세우는 진통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신화가 절대적인 진리처럼 강요될 때, 그 안에는 아주 위험한 전제가 숨겨진다. ‘정신은 고무줄처럼 무한히 늘어날 수 있고, 멘탈은 절대 부러지지 않는다’는 착각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군대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악으로 깡으로' 버티다가 결국 부러진다. 더 이상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번아웃 상태가 되어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아, 나한테도 한계라는 게 있었구나.”
그럼에도 정신력 신화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오직 ‘살아남은 자’의 인터뷰만 보기 때문이다. 끝까지 버텨서 성공한 사람,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 일어섰다”는 영웅담만 미디어에 노출된다.
링 위에서 버티지 못하고 실려 나간 패자의 이야기는 자기계발서에도, 강연장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는 거대한 착시 현상에 빠진다.
“결국 멘탈 센 놈이 이기는 거네. 내가 힘든 건 내 의지가 약해 빠져서야.”
하지만 이건 이미 KO 되어 바닥에 널브러진 선수에게 이렇게 소리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신력이 부족해서 쓰러진 거야! 빨리 일어나서 한 판 더 뛰어!”
여기서 한 번, 몸과 마음의 관계를 과학의 눈으로 차분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인간은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느끼지 않는다. 뇌과학 연구들은 반복해서 증명해 왔다. ‘몸이 아픈 것’과 ‘마음이 아픈 것’을 처리할 때, 뇌는 놀라울 정도로 겹치는 회로(Neural Circuit)를 사용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절당했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는 느낌과, 정강이에 로우킥을 맞았을 때의 통증은 뇌의 전방 대상 피질(Anterior Cingulate Cortex)에서 비슷한 위기 신호로 처리된다. 그래서 우리는 모욕을 당했을 때 “얻어맞은 것 같다”고 말하고, 수치심을 느낄 때 “얼굴이 화끈거리고 속이 쓰리다”고 표현한다. 이건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뇌 입장에서는 실제로 ‘타격’을 입은 것이다.
그러니 “마음만 단단히 먹으면 된다”는 말은, “다리뼈가 부러져도 정신력으로 뛰면 된다”는 말만큼이나 폭력적이고 비과학적이다. 뼈가 부러졌을 때 의지로 뼈를 붙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부러진 사실을 인정하고, 깁스를 하고, 움직임을 최소화하며 회복을 기다리는 일뿐이다.
마음도 똑같다. 정신적인 타격은 수면 패턴을 망가뜨리고, 식욕을 앗아가며, 인지 능력을 떨어뜨린다. 어제까지 쉽게 하던 업무가 오늘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겁게 느껴진다. 이건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다. 뇌와 몸 전체가 ‘부상 모드’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멘탈 체급을 인정한다는 것. 그것은 내 마음의 ‘절대적인 강함’을 점수 매기는 일이 아니다. “나는 원래 유리멘탈이야”라며 자조하거나, “나는 강해야만 해”라고 스스로를 옥죄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냉정한 ‘전력 분석’에 가깝다. 지금 나는 인생의 몇 라운드를 치르고 있는가. 최근 몇 달 동안 내게 쏟아진 타격은 어떤 종류였는가. 내가 짊어진 책임의 무게는 얼마나 늘어났는가. 잠은 제대로 자고, 밥은 제때 챙겨 먹고 있는가. 그리고 코너에서 물을 건네줄, 내가 기대 쉴 수 있는 ‘세컨’은 곁에 있는가.
이 모든 요소가 합쳐져 ‘오늘의 체급’을 결정한다.
그래서 어떤 날에는 과감하게 인정해야 한다. “오늘은 도저히 헤비급 경기를 뛸 수 없다”고. “오늘은 그냥 가드만 바짝 올리고, 거리만 유지하며 버티는 게 최선이다”라고. 심지어는 한 대 더 맞기 전에, 아예 링 밖으로 걸어 나가는 기권(Tap out)이 가장 현명한 전략일 수도 있다.
서점에 널린 멋진 자기계발 문장들은 자꾸만 한 방향으로 우리를 떠민다.
“더 버텨라.”
“한계는 없다.”
“이겨내라.”
하지만 이 링 위에서, 우리가 함께 나누고 싶은 작전명은 조금 다르다.
“오늘의 체급을 인정하고 싸우자.”
“이미 많이 맞았다면, 덜 아프게 맞는 방법을 찾자.”
그 시작점은 멘탈에도 엄연히 체급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내 체급은 매일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1장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다. 당신이 최근 들어 유난히 쉽게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당신이 나약해서가 아니다. 잘못된 것도 아니다. 단지 그동안 누적된 데미지로 인해, 잠시 체급이 내려갔을 뿐이다.
정신력 신화가 강요하는 ‘무한한 멘탈’ 대신, 고통을 느끼는 정직한 뇌와 몸을 먼저 바라봐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