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Quanta time Mar 26. 2024

빌런 팀장님의 명품 교훈_Jimmy Choo

오피스 007 여왕폐하 대작전

(멘탈을) 흔들까요? 저을까요? 'Shaken or Stirred?'
15년간의 회사생활동안 만나왔던 팀장님들은 007 영화 속의 빌런들처럼 사연도 많았고, 악랄함도 대단했다. 신기하게도 그들은 각자가 가진 파괴력과 사악함을 그대로 표현해 주는 명품 아이템을 사랑했다. 

007과 같이 빌런 하나를 무찌르면 또 다른 빌런이 다음 편에 나타났고, 영화 속 첩보기관 MI6처럼 회사도 문제가 터지면 어김없이 나의 존재를 부정했다. 하지만 나는 기어코 빌런들을 이겨냈다.(아니 헤어졌다.)

빌런 팀장님들과 하나씩 스토리를 만들어 낼 때마다 몸과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늘어났지만, 이 험한 세상 앞으로 이 악물고 살아나갈 명품 교훈들도 함께 남겨줬다. 앞으로도 그 교훈들을 총알 삼아 나 또한 새로운 작전들을 펼쳐낼 것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오피스 007들을 위해 이 글을 바친다. 



모든 걸 기록해라. 내가 다 알 수 있도록.


 완벽주의 성향이 있는 철저한 팀장님들은 항상 날카로운 칼날을 세우고 오피스 전쟁에 임한다. 특히 마이크로 매니징으로 팀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머릿속에 데이터화하여 관리하는 스타일이라면 일하다가 숨 한번 잘못 쉬어도 팀장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숨 막히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왜? 무슨 문제가 또 터진 거지?'


라는 날 선 시그널은 단순한 걱정이 아니라, 이후 벌어질 한 따까리에 대한 사전적 경고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29살 살 신입 3년 차였던 나는 당시 회사에서 드라이브를 걸기 시작했던 해외파트 업무를 맡기 위해 팀을 옮기게 되었다. 팀을 옮기기 전부터 새로운 팀장님의 소문은 대단했다. 미국 유명대학의 박사학위를 가진 팀장은 대표의 신임을 받고 있었고 유창한 영어실력, 탁월한 기억력, 완벽한 업무능력, 거기에다 화려한 의전스킬 등 회사가 내세우는 대표 엘리트 선수로서 그 위세가 하늘을 뚫고 우주까지 갈 기세였었다.


특히 그녀는 명품 구두를 사랑했는데, 팀장이 홀로 사용하던 독립 사무실 한편에는 날을 세운 무사의 검이 진열된 것과 같이 반짝이는 명품구두가 3개 이상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그 안에 쓰인, Jimmy Choo라는 영어단어는 당시도 그렇고 현재도 명품의 세계를 모르는 나에게도 선명히 기억나는 단어였다.


하지만 백조가 물 위에 우아하게 떠 있기 위해서는 물아래 다리가 쉼 없이 헤엄을 쳐야만 한다 했던가. 완벽한 팀장의 퍼포먼스와 기대감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특수요원들과 같이 명령을 받으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팀원들이 필요했다. 그러한 팀원들이 아니라면, 갈아치우거나 그렇게 만드는 것 또한 지미추 팀장의 유명한 능력 중 하나였다.


당시 지미 추 팀장이 주로 사용하던 전법은 숨 막히는 스케쥴링 전략이었다. 당시 팀원이 4명 정도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각자의 업무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적어 매주 제출하도록 했다. 통일된 양식, 각자의 업무 스케줄은 하나의 문서로 통합되어 정리되어야 할 것, 업무진척도를 표기할 것, 처리한 일/하고 있는 일/해야 하는 일을 구분해서 적을 것 등등 빈틈없는 스케쥴링을 해야만 했고 매주 회의를 하면서 컨펌사인을 받아내야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왜 일이 안되고 있는지 여기에다 하나씩 적어볼까? 내가 모르는 게 아니라 당신이 모르는 것 같아서 말이야'


기억으로는 매주 화요일에 일명 '계획표'를 검사받았는데, 스케쥴링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거나(형식) 일을 진척도가 팀장의 생각만큼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등(내용), 팀장의 철저한 기준에 조금이라도 어그러짐이 있는 날에는 최소 2시간 이상의 정신교육이 진행되기 때문에 하루전날에는 다른 일은 다 제쳐두고 팀장의 맘에 드는 수준의 스케줄표를 작성하기 위해 반나절을 꼬박 할애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마이크로 매니징 방법을 통해 단기적으로는 완벽한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특히 팀장의 퍼포먼스가 훌륭했기에, 단 한 방울의 업무 누수도 허락하지 않고 팀원들을 쥐어짜 내가며 숨 쉬는 패턴까지도 조종해 가면서 일을 처리해 나갔었다. 물론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완벽한 스케쥴링을 상사에게 제출하여 검사받는 형태로 팀이 운영되면 부하직원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다. 단기적으로는 맡은 업무가 실수 없이 처리될 수 있지만 중장기적으로 이런 스타일을 견뎌낼 직원은 많지 않다. 사람은 같은 업무강도를 가진다 해도 통제하는 쪽이 통제받는 쪽보다 훨씬 유리하다. 또한, 통제받는 입장에서는 리더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또는 그 의도에 맞는 업무처리를 위해 불필요한 자기 검열이 수반되기 시작한다. 창의력, 자기 주도력은 상실된다. 당시에 나 또한 정확히 이 수순을 밟아갔고, 시간이 장기화될수록 업무능력도 약화되어만 갔다. 그럴수록 지미추 팀장님은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그 보다 더 격한 리듬감으로 나를 질책했었고, 악순환은 계속되어 나를 포함한 팀원들을 더욱더 무력하게 만들어갔다. 



그럼에도, 지미 추 팀장의 무기는 '완벽한 정리' 였었다.


이 부분에서 내가 얻은 교훈은 '팀원에게 자유를 줘라'가 아니다. 그녀의 팀 매니징 방식에는 문제가 있었을지는 몰라도 일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사용한 스케쥴링 방법만큼은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당시 워드작업으로 간단한 표를 그려, 각자 맡은 일에 대한 스케쥴링을 지시했었는데 대충 아래와 같은 프로세스였었다.


(X축) 단기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 / 장기적으로 문제해결을 고민해야 할 일 

(Y축)  처리한 일(피드백할 부분) / 하고 있는 일 (해결 필요한 문제) / 해야 할 일(사전준비 필요한 부분)


이런 식으로 업무스케줄을 짜다 보니, 실제로도 업무 효율성이 높아지는 효과가 있었다. 특히 실수 발생빈도가 매우 낮아졌다. 한 단위업무를 처리할 때 과거-현재-미래를 모두 체크하게 되고, 더불어 업무의 중요도가 가중치가 되어 신경을 써야 할 부분에 좀 더 힘을 줄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에 업무가 누수될 수 없었고, 중요하지 않는 일을 처리하느라 중요한 일을 간과할 확률도 낮아졌다. 


그리고 팀원 모두가 이런 방식으로 업무를 정리하여 같이 공유했기 때문에, 팀 전체로 보면 업무배분이 그나마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고 각각의 업무에 대해 자세히 파악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업무 처리 효율성에 대한 팀원 각각의 개인적 편차도 강력한 리더십(?)으로 멱살 잡고 끌어올릴 수 있었다. 


(강압적 방법이 좋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문제가 어디서 발생하는지도 모르는 리더보다는 어디서 문제가 발생하는지는 100% 파악하고 있었던 지미추 팀장은 그 부분만큼은 확실히 능력이 있는 리더였다. 다만 해결하는 리더십이 아쉬웠을 뿐...)


지미 추 팀장과 이별을 고하게 된 후에도, 사실 이 방법을 통해 업무효율을 높일 수 있었고 장기적으로는 커리어 발전에도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예전처럼 감시자가 없어졌기에 조금은 느슨한 감이 있지만 그래도 내 업무에 대한 스케쥴링, 즉 구조화된 메모는 업무를 처리하는 효율성 하나만큼은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또한 내가 사회초년생이었을 때 겪었던 경험이라서 그런지, 지미 추 팀장이 강압적으로 주입시켜 놓은 스케쥴링 습관은 내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현재까지도 무의식적으로 여러 업무들을 구조화시키고 정리할 수 있게 된 것도 빌런팀장님이 준 명품 교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이란 건 내가 '만족해서' 끝나는 게 아니다. 받는 사람이 '감동해야' 한다.


지미추 팀장님이 싫어했던 말이 있었다. 바로 '최대한 노력했다'라는 말이었다. 


지미추 팀장의 시선에서는 노력은 당연한 시작점이었고, 일처리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최대한 노력했다'라는 말은 사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출발선에 머물러 있는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을 마주할 때, 특히 그 일이 제약이 많거나 내 능력으로 처리하기 힘들 때 '노력'이라는 이름으로 미진한 결과에 대한 핑계를 만들고는 한다. 하지만 일이라는 건 내가 노력을 해서 만족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지미 추 팀장님은 격한 방법으로 나에게 알려주었다. 업무라는 건 결과를 만들어내야 하고 그 결과는 내가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물을 받는 고객이나 상대방이 '감동해야' 일류가 된다는 진리를 알려준 것이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해외 연구기관의 기관장이 VIP로 방문했을 때였는데, 국제업무를 맡고 있는 부서였기에 해외 VIP의전도 주어진 업무 중 하나였었다. 물론 지미 추 팀장님의 스타일 상 방문 한 달 전부터 비행기 시간, 호텔 예약, 랩투어 동선파악, 매 식사시간의 적합한 식당예약 및 해외인사에 적합한 좌석 스타일 체크 등 하나 또 빠짐없이 고객의 만족을 위해 철저한 준비를 당부했었다. 


특히, VIP가 방문한 일정 내내 사진을 찍는 것도 요청했었다. 문제는 바로 사진이 바로 마치 동영상처럼 방문일정에 맞게 정리되어야 하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는 순간까지 담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진은 사진첩으로 제작되어 VIP에 전달되어야 하는데... 그 전달시점은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면서 찍은 사진까지 포함하여 대략 10분 뒤 그가 차에 타기 전까지 사진첩 전달이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로 들자면

10:00~11:00 기관방문 및 랩투어

11:00~13:00 식당에서 VIP오찬

13:00~15:00 회의진행

15:00 작별인사


의 스케줄이라면 그 전날부터 당일 스케줄에 일어나 장면들은 물론, 마지막 15:00에 악수하는 작별인사 장면까지 포함된 사진첩이 15:10 정도에 그가 공항으로 떠나는 차를 타기 전에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사진 한 장까지 담겨야 한다. 감동을 위해 뛰어라.'

지미추 팀장의 시각에서는 노력이라고 하면, 진행된 스케줄마다 빠짐없이 좋은 사진을 제대로 찍는 일이다. 하지만, 지미추 팀장은 받는 사람이 '감동하는' 하는 수준은 마지막 10분에 달려있었다. 

작별인사 사진을 찍고 마지막 10분은 팀원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마지막 사진기의 셔터가 눌러진 이후부터 , 


'사진기 사무실로 이동 - 파일 추출 - 사진출력 - 미리 정리해 놓은 사진첩에 마지막 사진 추가 - 최종 사진앨범 포장 - VIP 현 위치로 전달'


이 모든 순간을 진짜 첩보작전처럼 수행했어야 했다. 결과는 무조건 감동이었다. 백이면 백,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VIP들은 손수 감탄을 금치 못하는 감사 메일을 보내기 일쑤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미추 팀장은 빌런이었다. 이 모든 걸 팀원들을 갈아 넣으면서 시켜댔으니, 또한 그 과실도 본인의 공로로 가져가는 능력 또한 빌런의 마침표를 찍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지나니 작전의 고단함이나 빌런의 악랄함보다는, 이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이 나를 성장시켰음을 알게 되었다. (빌런 상사의 말도 안되는 악랄함을 미화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경험해온 어려움 속에서 앞으로를 위한 희망 하나정도 찾아보자는 의도일뿐...)


 이 작은 10분간의 첩보작전은 처음에는 불가능해 보였지만 여러 VIP들이 방문할 때마다 반복될수록 팀원들에게도 할만한 수준의 업무가 되었다. 하지만, 그걸 받는 VIP들의 감동은 그칠 줄 몰랐고, 여러 국가의 기관들이 마치 서로 후일담을 자랑하듯 글로벌 소식망을 타고 소문을 넘어 대한민국 어느 연구기관의 놀라운 환대방법으로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계획을 세우고 철저하게 관리하며 일해라

노력은 시작은 순간일 뿐이고,
최종 전달자가 감동하는 방법으로 진행되것이 일을 잘하는 것이다

실제로 해보면 안 되는 건 없다. 습관으로 만들면 더 빠르다.

빌런 지미추 팀장님의 명품 교훈이었다. 능력없는 빌런팀장은 아니었지만, 사실 가장 무서운건 똑똑한 빌런이다. 영화속에서도 그런 빌런이 가장 무섭다.


다음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빌런은 조니워커 팀장님이시다. 

To be continue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