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떠올랐다. 내가 왜 차별과 혐오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작년 4월이었다. 장동민이 과거 어떤 팟캐스트에서 ‘개보년~’ 어쩌구 했다던 이야기가 불거져 나왔을 당시, 나는 어떤 매체에 여성혐오에 관한 이야기를 실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지극히 익숙하고 관성적인 반론들에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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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하지 말자’, ‘혐오하지 말자’는 주장에 ‘우리는 책임감 없는 일부 여자들을 공격할 뿐’이라거나, ‘여자는 꽃이다라는 말은 칭찬인데 그게 왜 성차별이고 혐오발언이란 소리냐’는 반박 댓글이 달렸다. 아주 많이.
솔직히 처음엔 그 이해 안 될 반론들에 짜증이 났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런 반론들이 다분히 보편적인 인식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때부터였다. '혐오하지 말라'는 뻔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 그 4월 이후로 지속적으로 여러 차별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혹자는 궁금해 했고 또 일부는 직접 물었다. 내가 그런 부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무엇이냐고.
며칠 전, 장동민은 또 한번 익숙하고 나쁜 말을 꺼냈다. ‘개그로 보답하겠다’던 그가 들고 나왔던 개그는 ‘또 다른 약자’들을 향한 차별이었다. 나는 장동민의 이혼 자녀 비하 발언을 보고 문득 내가 왜 혐오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떠올렸다.
1) 어머니 : 아주 특별한 보통의 한국 여자
나는 흔하디 흔한 ‘한부모 가정’의 자녀다. 아비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도박에 빠져 생활비를 까먹었다. 그 수습은 온전히 엄마의 몫이었다. 엄마는 20년 가까이 버텨오다가 결국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결혼생활 종료를 선언했다. 내가 중학교 때였다. 물론 누구의 조롱과는 다르게 양육비는 없었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했나? 재미있는 건 내 주위에 한부모 가정에서 자란 친구들이 꽤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어머니 손에서 컸다. 다들 양육비 대신 누군가가 남겨둔 빚이나 짐을 상속받았다.
애 둘 딸린, 못 배운 여자가 한국 땅에서 벌어들일 수 있는 소득엔 한계가 있었다. 엄마는 지금 돈으로 따지자면 150만 원에서 200만 원 정도를 받은 것 같다. 엄마는 보통 식당에서 서빙을 하거나, 공장에 들어가 일을 했다. 쉬는 날은 일주일에 하루 정도였는데, 그마저도 늘상 방에 틀어박혀 끙끙댔다. 파스를 달고 살았다.
가난한 집은 가난하기 때문에 추가로 치러야 하는 돈이 있다. 단열이 잘 되지 않는, 가스 대신 기름보일러를 써야 하는 집의 난방비는 겨울마다 생계에 큰 지장을 줬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전세가 흔했지만 목돈을 마련할 여유가 없어서 적잖은 월세도 내야 했다. 인근지역의 땅값이 오르자 월세는 엄마의 월급 인상폭보다 훨씬 크게 뛰었다.
엄마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딸린 두 자녀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엄마는 종종 내게 소리를 지르며 하소연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벌을 받아야 하냐고. 엄마의 화풀이 방향은 옳은 건 아니었지만 그건 우리 식구가 같이 감당할 몫이었다. 나는 대들지 않는 방향을 택했다.
엄마는 여자로 태어난 게 억울하다고 말했다.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었으며 벌어들일 수 있는 소득에도 한계가 있었다고 했다. 노력으로도 극복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엄마는 자신이 여성임을 종종 저주했다.
엄마는 내게 결혼도 하지 말라고 했다. 책임 질 자신이 없으면 시작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건 고통을 전가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네가 결혼하고 이혼한다면 반드시 양육은 네가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엄마는 굳이 자식 편만 들지도 않았다. 제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보통 여성에 감정이입을 했다.
엄마는 똑똑했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노력 끝에 우리는 그래도 ‘입에 풀칠은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그 대가로 엄마는 지금 병을 달고 산다. 육십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엄마는 일년에 너댓날을 빼고는 일을 나간다. 물론 호강시켜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자식의 탓도 크다. 어쨌든 이 애 둘 딸린 한국 이혼녀는 노력 끝에 빈곤층에서 벗어났다. 같은 처지에 있는 몇몇들과 비교하자면 밥은 굶지 않고 애 둘을 대학에 보냈으니 어느 정도 성공한 삶이다.
그리고 이 여자의 삶은 내가 처음으로, 아주 가까이에서 목격했던 차별 받는 보통의 한국 여자의 삶이기도 했다.
2) 나 : 그 보통의 한국 여자의 자식
친구들은 종종 나를 원망했다. 내가 내 비밀 같은 걸 털어놓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내 속 이야기를 잘 해 본 적이 없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했나. 자기 이야기도 해 본 사람이 잘한다. 나는 내 이야기를 하는 방법을 몰랐다. 내 삶이 비참하다고 생각해서 말을 꺼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냥 안 해 봐서 못 하는 거였다.
엄마는 나를 사랑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렇게 제 몸 상할 정도로 죽을 고생을 해 가며 자식새끼 벌어 먹이겠다고 살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엄마는 나를 종종 때렸고 욕을 퍼부었다. 이혼 전에는 아비가 퍼붓고 간 스트레스를, 이혼 후에는 자신이 먹여 살려야 할 두 자식들에 대한 책임감으로부터 나온 스트레스를 맏이인 내게 풀었다. 종종 서운했지만 그 정도는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엄마는 나보다 충분히 더 힘든 삶을 살고 있었다.
그래서 감히 집에서 내 고민 같은 걸 풀어볼 생각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다. 우리 집에서 사는 누구에게나 그런 고민 상담은 사치였다. 그럴 감정적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대신 엄마는 종종 자기 방에서 목놓아 울었고, 그 무렵 나는 절대 울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와 동생은 애정결핍자였지만 그걸 발현하는 방식은 달랐다. 동생은 사랑받기 위해 애썼고, 나는 버림받지 않기 위해 애썼다. 말장난 같아 보이지만 이 두 종류의 사람이 실제로 행동하는 양식은 각각 다르다. 동생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좀 더 가까운 거리를 요구했다. 나는 미움 받지 않기 위해 가급적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다. 동생은 실수가 좀 있어도 예쁨받는 행동을 하려 했고, 나는 내 실수 때문에 관계가 파탄날까 두려워 최대한 보수적으로 행동했다.
나는 그렇게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 되었다. 관계가 끝나는 게 두려워 관계를 만들지 않기도 했다. 연애를 해도 깊게 빠지지 못했다. 나는 종종 연애 중 '넌 날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이야길 듣곤 했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무서웠다. 그 관계가 끝나면 절망감에서 헤맬 내 모습이 두려웠다. 나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대부분의 관계를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던 사이’인 것처럼 굴었다.
미움 받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을 먼저 알아차려야 한다. 그리고 관계에서의 욕망을 가급적 통제해야 한다. 내 요구가 타인에게 부담으로 다가가서 그 관계가 깨어지는 것은 큰 악몽이었다.
결혼도 단념했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함을 콤플렉스로 가지고 있었다. 그건 내가 포기한 것도, 실수해 잃어버린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 상견례날 이후 상대의 부모님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게 마음에 걸린다'는 말을 들을까 겁이 났다. 물론 이건 내가 결혼을 단념했던 정말 많은 이유 중 하나다.
넋두리를 늘어놓은 이유는 장동민의 발언으로 받은 상처를 전시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한부모가정에서 태어나 가난하고 초라하게 자란 수많은 애들 중 비교적 건강하게 자란 축에 속한다. 그리고 나는 장동민의 혐오개그를 보도로 보며 옛날 어느 날의 엄마와 내가 떠올라 울고 싶었다.
3) 장동민의 발언보다 나를 더 슬프게 하는 것들
누군가는 '혐오는 지능의 문제'라고 한탄하며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렇다고 생각진 않았다. 나는 혐오는 다분히 공감능력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어떤 차별받는 타인의 지금의 삶, 어떤 혐오받는 사람이 겪어왔을 아득한 고통의 무게, 나는 그런 것들을 헤아릴 수 있어야 혐오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같은 경험을 할 수 없고 대신 내 어떤 경험에 비추어 타인의 마음을 헤아려볼 뿐이다. '누군가가 차별받고 있더라'는 선언의 텍스트를 접한 사람보다는 내가 약자였을 때 느꼈을 기분을 지금 그 사람에게 대입해 그 사람이 겪는 차별과 혐오를 어렴풋하게 이해해 본 사람이 더 쉽게 혐오를 벗어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운이 좋았다. 미움받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남의 기분을 헤아려 보았다. 머리를 굴려 저 사람의 감정과 유사했던 내 경험을 끄집어내려 노력했다. 그런 버릇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남들보다 아주 조금 빨리 혐오에 대해 고민해봤던 이유는 고작 그 정도다. 나는 나쁜 사람이 되기 싫었다.
장동민에 대한 이야기를 쓴 지 1년째다. 다신 쓸 일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장동민 이야기를 또 하고 있다. 그 1년 동안 장동민이 저렇게 버젓이 큰 제재 없이 활동을 꾸려나갔고, 그가 계속하고 있는 혐오발언들은 ‘어떤 용기’로 포장된 채 지지받고 있다. 나는 이게 슬프다. 장동민 그 자체가 아니라 장동민이 비추고 있는 우리네 삶의 어떤 모양새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