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이야기
그대로다.
전부.
인사과 김 대리는 예상했던 표정과 인사말을 건넸다. 아직 지원자가 모두 오지 않았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나는 준비한 대답을 했다.
김 대리가 대기실을 나가고, 살구꽃 원피스가 들어섰다. 본인 이름을 밝혔지만, 내가 있는 곳까지 들리진 않았다. 상관없다. 그녀는 회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앉았다. 단 둘 뿐인 넓은 대기실에서 굳이, 아니 역시 저곳, 시선을 돌릴 수 없는 자리를 골랐다. 간단한 눈인사가 오갔지만, 내 시선은 그녀의 매니큐어를 쫓았다. 차라리 화려했다면, 이토록 부럽진 않았을 텐데. 윤기 나는 단정한 손톱이 심장을 콕콕 찌른다. 생채기가 났다. 손을 테이블 밑으로 숨겼다. 가만히 손가락을 웅크려 주먹을 쥐었다. 손톱을 더 자를 걸 그랬나, 줄질이라도 해야 했나.
예의 그 질문이 오갔다.
“준비 많이 하셨어요?”
“네.” 짧게 대답했다.
“많이 긴장하셨나 봐요?”
“네? 무슨…?” 얼른 주먹을 폈다.
“여기, 땀이 맺혔네요.” 이마 쪽을 가리켰다.
황망히 이마를 더듬는데, 맺힌 정도가 아니다. 휴대용 티슈가 쓱 다가왔다. 잠시 고민했지만, 이 꼴로 들어갈 수는 없다. 한 장을 뽑아 땀을 닦으며 속으로 되뇌었다. 괜찮아 괜찮아 이 정도는 괜찮아. 쓰고 난 티슈를 돌돌 말아서 꼭 쥐었다.
김 대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일어나 방을 나서다 말고 멈칫했다. 땀을 닦아 낸 이마에서 살구 향이 났다. 티슈 고맙단 말을 못 했다. 어쩔 수 없다. 대신 어깨를 펴고, 허리는 세우고, 턱을 들었지만, 속이 쓰렸다. 생채기 때문이다. 면접실 문 앞에 서자, 갑자기 밭은기침이 났다. 김 대리가 물을 권했지만 사양했다. 좀 더 신중해야지.
면접관들은 시종일관 미소를 보였다. 다행이다. 예상했던 질문을 받았고, 준비한 대로 답했다. 다양한 분야에 대한 경험치가 필요한 일이라며, 당장 시작할 수 있느냐 물었다. 완벽하게 대답했다. 준비한 보람이 있다. 예감이 좋다. 회사를 나서는데 김 대리가 말했다. 곧 연락 주겠다고. 확답은 아니었지만, 그 이상을 바랄 순 없다. 건물을 벗어나서야 날숨을 뱉었다. 내내 숨을 참기라도 했던 듯 호흡이 가빠졌다.
띠링
‘면접 끝났어?’
근처에서 근무하는 친구에게만 오늘 면접 소식을 알렸었다. 잘 되면 연락하려 했지만, 녀석이 궁금한 만큼 나도 말할 상대가 절실했다. 친구는 근무 중 몰래 나왔다며 구석 편의점으로 나를 데려갔다. 수고했다는 격려, 따뜻한 캔 커피, 커다란 미소가 생채기를 지워낸다.
이렇게 보내서 미안하다며, 친구는 출근 첫날 자신에게 저녁 한 끼 뜯어낼 것을 종용했다. 같이 밥 먹자 그냥 말하면 될 텐데, 늘 주눅 든 채 뭐 하나 요구하지 못하는 나를 배려한 녀석만의 방법이다. 웃고 또 웃었다. 이렇게 편안하게 웃어 본 지가 얼마 만인지. 친구를 보내고 길을 돌아 면접을 본 회사 앞에 섰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야 꼭대기가 보인다. 높은 층수만큼 자존감도 높아졌다. 수녀님께 전화를 넣어 볼까? 용기도 쑥쑥 자랐다.
모든 게 완벽하다고 생각한 바로 그때였다. 코끝에 살구 향이 살랑 스쳤다. 심장이 찌릿했다. 고개를 휙 돌렸다. 생각이 툭 끊어졌다. 앞 버스정류장에서 살구꽃 원피스가 하늘거렸다. 하지만, 그럴 리 없어. 그녀가 저기 있었을 리 없는데. 난 이 장면을 본 기억이 없단 말이야. 기가 막힐 노릇이다. 게다가 그녀는 무척 신이 났다. 방긋방긋 웃으며 통화하는 중이다. 좋은 일이 있나? 설마, 그녀가 붙었어? 내가 아니고? 아니, 그럴 리 없는데. 달라질 수가 없는데. 정말 그 여자야?
끌려가듯 정류장으로 다가섰다. 버스를 쫓는 사람들이 무리 지어 움직였다. 그 틈에 섞여 그녀가 버스에 올랐다. 쳐다만 보는데도 심장이 쿵쾅거린다. 따라 탈 수 없기에 눈으로만 그녀를 좇았다. 버스는 아직 사람들을 태우는 중이었다. 창가에 자리한 그녀가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나를 봤을 법한 그 순간, 여자의 눈은 선선히 나를 통과해 빌딩에 닿았다. 면접을 생각하나? 나를 잊었나? 그래, 그럴 수도.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날 잊었어도, 저 환한 미소는 왜지?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에서 어지러이 날아다닌다. 다리가 힘을 잃자 몸이 휘청거렸다. 정류장 기둥을 붙잡고 간신히 버텼다. 맹세하건대, 나는 그날 여기서 저 여자를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내 착각이거나, 이번에도 실패 거나.
띠링
‘12:00. 260번 버스’
휴대폰이 다음 할 일을 알렸다. 역시 아직은 포기할 수 없다. 만약 예정된 버스를 제대로 탈 수 있다면, 아직 실패는 아니다. 그러니 지금은 버스를 기다려야 한다. 정류장 빈 의자를 찾아 앉았다.
어지럼을 견디려 눈을 감았다. 녹슨 엔진이 매연을 토하느라, 달궈진 아스팔트가 타이어를 태우느라, 또 그것들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내는 발소리가 주변에 가득했다. 갑자기 정적. 눈을 떴다. 열린 버스 문이 보였다. 기사는 금테 선글라스 너머로 내 승차 의사를 가늠하는 중이었다. 간신히 몸을 움직여 버스를 타고, 자리를 찾아 앉는 모든 과정이 물속인 듯 일렁였다. 눈을 감고 호흡을 세기 시작하자 곧 소리가 돌아왔다. 두 번, 그리고 한 번.
삐이——
삐이——
“카드를 다시 대주세요.”
삐이——
다행이다. 살며시 버스 안을 살폈다. 옆자리 아주머니도 기억대로다.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모두 제자리다. 모두 내 착각일 뿐. 난 실패하지 않았으며, 오늘이 완벽해질 가능성은 더 커졌다. 이번엔 산이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덩달아 커졌다. 다만, 몸이 좀처럼 의지를 따라가지 못했다. 식은땀에 소리가 사라지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지난번 보다 더 많이 긴장하고 있다. 살구 향 때문인가. 아니야, 다른 생각을 하자.
그래 산이를 생각하자.
"혹시 소원 있어?" 순댓국을 먹다 말고 산이가 물었다.
"무슨 소원?" 난 건성으로 대답했다.
"하나만 말해봐."
"하나로 안되는데." 뜨끈한 국물이 속을 데웠다.
"그러지 말고. 하나만. 어?"
"너, 집에 돌아가는 거."
"뭐래. 됐어."
"나도 됐네요. 갑자기 왜 그러는데?" 고개를 들었다.
"그 소원, 내가 들어주고 싶어서."
그제야 산이와 눈을 맞췄다. 눈동자에 내가 또렷하게 맺혔다. 얼마나 반갑던지. 한 달 만이었다. 저렇게 초점 있는 눈을 본 지가.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