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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는 계족산을 다녀왔다. 졸업도 했으니 이제 건강 관리에 들어가야지, 즐겁게 할 수 있는 운동을 고민하다가 대전 주위의 명산들을 올라야겠다는 결심이 세워졌다.
아주 어렸을 적, 어머니와 산을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새벽 4시, 5시쯤 잠들어 있는 나를 엄마가 깨우면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등산을 따라나섰다. 서울 노원구에 살던 때여서, 근처의 불암산이나 수락산을 주로 찾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슴푸레 날이 밝아올 즈음에 산 초입에 도착하면 가까이 살던 이모와 사촌 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넷이서 산을 열심히 오르다가 다다른 어느 봉우리에서, 이젠 환한 아침을 맞이한 우리 동네를 내려다보며 먹었던 컵라면과 김밥은 별미 중의 별미였다. 은박지에 싼 김밥과 신라면 작은 컵. 초콜릿과 오이, 컵라면과 믹스 커피를 위한 물까지 보온병에 알뜰히 챙겨 온 어머니들 덕분에, 우리는 산꼭대기에 근사한 아침을 즐길 수 있었다. 열 살도 되지 않았을 때였으니, 돌이켜보면 내가 한 자릿수 나이에 컵라면을 먹었던 것은 오직 산을 올랐을 때뿐이었다. 몇 해 지나 내가 형의 나이가 되었을 무렵, 그 형의 동생, 그러니까 내 사촌 동생과 다시 산에 올랐던 일도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때 내 기억으로는, 나는 산을 제법 잘 올랐다. 잔나비까진 아니더라도 한 마리 다람쥐처럼, 쪼르르 앞서가 나머지 사람들을 기다리곤 했다. 어릴 적부터 운동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나였지만, 산을 오를 때만큼은 숨이 차고 땀이 줄줄 흘러도 마냥 즐거웠다. 그 시절보다 나이도, 몸무게도 두 배는 훌쩍 넘긴 지금, 과연 산이 여전히 내 반가운 친구로 남아 있을지. 꼭 그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동창 녀석들과 산악회를 하고 싶다는 은근한 꿈이 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공과는 별로 친하지 않은 터라 조기 축구회는 내 인생에 없을 개념이고, 그래도 나이 들수록 건강도 챙기면서 사람들과 어울릴 구실 하나쯤은 있어야 할 텐데. 산악회를 통해 격주에 한 번 정도는 친구들과 산에 오르며 운동도 하고 우정도 이어갈 수 있다면 꽤 낭만적이지 않겠는가. (물론 진짜 목적은 하산 후의 막걸리 한 잔, 그 뒤풀이에 있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토요일 아침, 작은 숄더백에 미리 얼려둔 물 한 병과 수건 하나, 그리고 읽을 책 한 권을 챙겨 호기롭게 계족산으로 향했다. 자취방에서 산까지는 약 6km 거리였기에, 대중교통 대신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날씨 참 화창하다, 가볍게 다녀와볼까? 높이 500미터도 되지 않는 뜨내기 산이라며 만만히 본 그 선택의 대가가 어떻게 찾아올지는,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계족산은 대전 대덕구에 위치한 산이다. 나는 자전거로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등산로 출발점이 제월당정류소 쪽에 있기에 3구간 루트를 통해 산을 올랐다. 개인적으로는 3 루트,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다. 정상에 이르는 최단 코스이긴 하지만, 그만큼 가파른 길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일단 용화사를 지나 봉황마당까지 올라가는 구간은 산길도 아닌 게, 차가 다닐 수 있도록 포장된 도로인데 벤치 하나 없이 쉴 틈조차 없었다. 게다가 근처에 물가라도 있는지 날벌레들이 끊임없이 눈앞을 아른거려 몹시 거슬렸다. 왜, 그 하루살이 녀석들 있잖아요. 이마 위에 좌표계 원점을 찍고는 절대 떨어지지 않는 녀석들... 물론 35도에 가까운 더위 속에서 오른 것도 무리였겠지만, 진짜로 ‘산’이 시작되는 지점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렇다고, 시작도 전에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숨을 고르고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가볍게 산을 오르지는 못했다. 수건으로 계속 땀을 닦아내며, 자주 멈춰 서서 쉬어야 했다. 어느 벤치에 앉아 육수를 뚝뚝 흘리며 헉헉대고 있는데, 몇 분 전 빠른 걸음으로 앞질렀던 할아버지가 나를 다시 말없이 앞질러 갔다. 동화 "토끼와 거북이"에 나오는 토끼가 된 기분이었다. 변명 같지만, 더위에 공복도 한몫한 것 같다. 너무 더웠고, 아침도 먹지 않은 상태에서 오르다 보니 혈당이 떨어 어지럼증을 느끼기도 했다. (미련하게도, '그만큼 살이 빠진다는 뜻이겠죠?' 하며 견뎠다.)
그렇게 오른 계족산 정상, 봉황정이라는 정자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대전 시내가 훤히 보였다. 멀리 우리 학교도, 내 자취방이 있는 동네도 보였다. 빛이라면 찰나에 도착할 거리를 힘겹게도 왔구나, 생각했다. 그래도 정상을 찍었다는 성취감이 컸다. 하지만 더 솔직히 말하면 그보다 사실 간식을 챙겨 온 주변 등산객들을 보며 부럽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한 부부가 썰어온 파프리카를 안주 삼아 캔맥주를 나눠 마시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자 진짜 맥주 한 모금이 간절했다. 시계를 보니 11시, 태양이 뜨거웠고 지금 딱 내려가서 점심을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나는 땀을 말리고 다시 다음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계족산을 오른다는 결심이 섰을 때 '그래도 정상에 있는 표지석 한 번은 짚고 와야지,'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다른 봉우리에 있는 산성을 오르고 싶다는 마음도 컸다. 다른 사람들의 사진 후기를 보았을 때도 그렇고, 돌벽 너머로 대청호가 보이는 계족산성의 경치가 아무래도 조금 더 근사해 보였다. 또 최근에 본 넷플릭스 <케이팝 데몬 헌터스> 때문에 '산성 최고,'라고 생각한 것도 있었다. 그런데 봉황루와 계족산성 사이의 거리가 꽤 되는 것이다. 거의 3.2Km... 아니나 다를까 정상에서도 멀리 산성을 볼 수 있었는데 능선을 따라가려면 제법 많은 힘이 들 것 같았다.
그래도 걷기로 했다. 사실 동행인이 있었다면 그의 컨디션에 따라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그냥 혼자니까 가능했던 것 같다. 나는 좀 무리하는 것을 즐긴다. 무리도 낭만이지. 무언가를 무리해서 해냈을 때 더 많이 성장한다고 믿는다. 죽지 않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한다 어쩌구... 같은 발상으로 힘냈다. 다행히 산성이 정상보다 높진 않았기 때문에, 일단은 오르막은 더 없었다. 땀을 식힌 뒤여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훨씬 수월하게 걸었다. 그리고 그냥 산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중간쯤 가니 황톳길이 깔린 임도(林道)가 등장해서, 한동안은 거의 평탄한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약수터를 발견해서 물도 재충전할 수 있었다. 경치도 좋고, 공기도 좋았다. 황톳길 맨발 걷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신발을 벗을까, 생각했다가 그래도 산성 오르는 길은 또 운동화가 필요할 것 같아서 참았다.
조금 더 걷다 보니 계족산성 가는 길이 등장했다. 다시 한번 눈앞에 펼쳐진 무한 계단... 그래도 끝장은 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오르막길 위로 몸을 던졌다. 어느덧 시간은 12시,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도 다행히 초록의 그늘이 햇볕을 막아주었다. 또다시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일각(15분) 가량을 올라가니, 드디어 도착했다. 계족산성. 그리고 그 풍경은 계족산 정상에서 본 것보다 약 π(3.141592...) 배 좋았다.
일단 돌담이 멋있다. 도시가 보이지는 않는데, 초록의 능선이 잇따라 펼쳐진 전경은 오히려 마음을 활짝 열어주는 느낌이었다. 또 아름드리 큰 나무 하나가 서있었는데, 약간 시골 가면 종종 보이는, 아래 평상 하나 놓여있을 법한 그런 멋들어진 녀석이었다. 그 아래에서 산바람 맞으며 앉아있으니 몹시 행복했다. 들고 온 책을 꺼냈다. 김애란 작가의 <두근두근 내 인생>. 문학의 뜨락 소설 모임에서 읽기로 한 책이었다. 흔들거리는 나무 그림자 아래에서 책을 읽다가, 소설에 검정치마 - Antifreeze 노래가 나오길래 휴대폰으로 노래를 틀고 가사를 신경 써 들었다.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소설은 조로증(早老症)을 앓고 있는 신체 나이 80세의 17세 소년과, 17살에 결혼해서 그를 낳았던 그 부모의 이야기를 다루는 내용이었는데, 부모의 풋풋한 시절을 그린 1장은 <폭싹 속았수다> 느낌으로 재밌게 읽었고 2장도 작가의 문장력에 감탄하며 나름 재밌게 읽었다. 그러나 서서히 다가오는 신파(新派)의 파도소리... 후반부는 마냥 명랑한 마음으로 읽을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그쯤에서 멈추기로 했다. 무엇보다, 배가 고팠다.
공복 유산소가 몸에 좋다던데, 이렇게 하는 거 맞죠? 전날 저녁 이후로 아무것도 안 먹었으니 진짜 살은 빠지겠다. 약간 몸이 에너지를 원하는데 장에서는 더 흡수할 열량이 없으니까, 정말 '살을 태운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 고통 속 묘한 희열도 있었다. (근손실만 잔뜩 온 거 아님? ㅠㅠ) 서둘러 내려와야지, 하고 열심히 온 길을 되짚었다. 계단 특)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게 쉬움. 당연한 건가? 물 밥을 먹겠다는 목적이 훨씬 더 강한 동기로 작용했던 것도 있겠다. 사실 등산 뒤풀이의 정석은 막걸리에 파전, 도토리묵 같은 거지만 왠지 계족산 정식은 닭발에 선양소주가 아닐까 싶다. 일단 계족산 하면 이름부터가 닭발산이고. 대전·충청을 대표하는 선양소주와 계족산에는 깊은 연이 있기 때문이다.
계족산 하면 떠오르는 14.5Km 길이의 황톳길. 그것을 만들고 관리하는 것이 바로 선양소주 회사이다. 회장 조웅래 씨는 예전에 산행을 왔다가 하이힐을 신은 여성에게 자신의 신발을 벗어주었고, 맨발로 걸어본 그때의 경험이 너무 좋았어서 황톳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뭐 암튼 그렇다고 함. PPL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계족산 황톳길을 걷다 보면 선양소주 광고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솔직히 "린"은 맛있는 소주는 아닌데~ 제로슈가 라인인 "선양소주"는 병이 꽤 예쁘게 생겼다. 그리고 최근 GS25 편의점에서 볼 수 있는 "선양소주 오크" <- 얘는 좀 물건이다. 위스키 같은 맛을 기대하고 먹으면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소주의 뒷맛을 꽤 그럴듯하게 잡아준달까? 어라, 진짜 PPL 아닙니다.
암튼 암튼. 선양소주의 은혜에 힘입어 황톳길 맨발 걷기, 나도 해봤다. 솔직히 이게 몸에 어떻게 좋은지는 모르겠다. 황토의 효능~ 뭐 이런 동양 철학스러운 설명은 별로 과학적으로 와닿지는 않고, 실제로도 내려오는 길 초반에는 황토가 딱딱하게 말라있어서 별 감흥이 없었다. 아, 참고로 올라온 3 루트를 따라 돌아간 게 아니고 5코스 장동산림욕장 방향으로 내려왔다. 재작년 연구실 홈커밍 때 계족산 산행을 교수님과 온 적이 있는데, 그때 출발을 아마 거기서 했던 것 같아서. 그쪽에 발 씻는 곳도 잘 되어있고 꽤 잘 조성된 휴양림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서 교수님 없이(...) 다시 찾고 싶었다.
그렇게 5 코스를 따라 내려가는 길, 내려갈수록 슬슬 사람들이 많이 보이고 황토도 더 부드러워지더라. 약간 촉감놀이 하는 것처럼 발이 마사지되는 느낌이 좋았다. 황토의 효능은 모르겠지만 발바닥 지압 이런 건 진짜 효과가 있나 보다. 발바닥의 감각에 집중하며 걷는 그 시간 굉장히 즐거웠다. 또, 뭔가 이상하게 아름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까, 평평하게 잘 다져진 구간도 있었지만 또 황토가 질척이는 부분은 무슨 불길처럼 흙이 솟아있는 곳도 있었다. 사람들의 발자국 모양으로 땅이 들어가면서 흙이 올라온 것이었다. 그걸 밟는 느낌이 뭔가, 이 길을 혼자 걷는 느낌이 아니라 우리 대전 동료 시민들과 함께 걷고 있다는 느낌? 뭔가 이웃들과의 스킨십?? 그게 퍽 나쁘지 않았다. 나, 생각보다 대전을 많이 사랑하나 보다. (대전 시민 다 됐네)
선양소주도 그렇고, 성심당도 그렇고. 지역을 대표하는 기업이 존재하고, 그들이 지역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은 참 보기 좋다. 황톳길을 거닐며 즐거운 주말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조웅래 회장은 정말 성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도 가끔 얘기하고 다니지만, 삼성 회장보다 성심당 회장 같은 삶을 고 싶다. 최고의 부자가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두터운 인망이다. 하나의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선한 영향력까지 발휘하는, 좋은 이미지의 기업을 만든 것은 참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엄밀히 말하면 대전은 내 고향은 아니지만, 20대 전부를 대전에서 보낸 사람으로서 이 도시에 어떤 애정을 느낀다. 그 애정을 어떤 형태로든 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성공한 사람이 되고 싶다, 라는 작은 야망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장동산림욕장에 도착한 나는 자전거를 찾기 위해 다시 버스를 타고 제월당정류소로 이동했다. 시간은 벌써 3시였다. 닭발과 소주를 먹기에는 아무래도 좀 이른 시간, 그리고 기껏 소비한 2000 칼로리를 도로아미타불로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차가운 막국수로 그날의 첫 끼니를 때웠다. 나 진짜 다이어트에 진심이죠? (물론 이래 놓고 또 밤에 술약속 잡혀서 소주 두 병 깜;; 하)
오랜만의 산행이 무척 즐거웠다. 그래서 월요일에는 보문산도 다녀옴 ㅋㅋ. 높이로 따지면 계족산보다 조금 더 높긴 하네. 보문산은 글로 남길 정도로 대단한 감상은 없었어서, 사진으로 대신한다. 다음에는 어디를 가볼까?
목표를 위해 조금은 무리할 줄 아는 것은 낭만이다.
그 결과로 도달한 경지에서 정복감을 만끽하는 것도 낭만이다.
내 이웃과 고장을 사랑하는 것은 낭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