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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발화 불가 상태 이상 참치

신춘문예 응모 권유를 받던 내가 단 한 줄도 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by 정채린

뭐든 처음이 있기 마련이니 내 시작(詩作)의 시작에 대해서는 굳이 자세히 말할 필요 없겠다. 아무튼 시를 마흔 편쯤 써두었을 때, 본격적으로 시를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강범모의 『풀어쓴 언어학 개론』을 시작으로, 김진우의 『언어 이론과 그 응용』, 폴 휘트니의 『언어 심리학』, 조지 레이코프의 『삶으로서의 은유』, 움베르토 에코의 『기호학』,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 오규원의 『현대시작법』, 권혁웅의 『시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정끝별의 『시론』, 북클럽 『은유 3부작』,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 등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론서들을 읽었다." (세 달 정도 걸렸다)


그리고 공부 끝에 나는, 이제 시가 뭔지 모르게 되었다.


나는 분명 시에 재능이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내 습작이 마흔 편밖에 안 되는 걸 알고 놀랐을 정도다. 열다섯 번째 시를 제출했을 때 선생님께 시 공부를 오래 했느냐는 질문을 들었고, 서른 번째 시를 제출했을 때는 신춘문예를 권유받았다. 잘난 척하려는 게 아니라, 내가 시에 재능이 있다는 것이 자족적인 망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시를 많이 읽지는 않았다. 이상과 조향의 오타쿠이긴 하지만 현대시를 읽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좁은 경험으로 시를 쓰다 보니 오히려 선택지가 적어 좋았다. 그냥 내가 아는 방식으로 내 생각을 쓰면 잘 쓴다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얼떨결에 자전거를 배운 아이와 같았다. 나는 실제로 자전거를 잘 타는데 자전거를 어떻게 배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 단편적인 기억 속 나는 이미 자전거를 배워서 잘 타고 있었다. 한 번 배워둔 자전거 타기는 웬만해서는 잊히지 않는다. 한 번 익혀두면 페달을 밟는 타이밍이나 핸들의 균형을 잡는 법을 의식하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자전거 위에 올라타 넘어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마치 자전거를 더 잘 타고 싶어서 자전거 타는 연습을 열심히 하기보다, 책을 펼쳐 인체 해부학부터 운동 심리학까지 이론을 공부한 사람처럼 되어버렸다.

의식하지 않을 때에는 잘 되다가, 의식하기 시작하면 잘 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입 속에서 혀가 놓이는 위치, 숨을 쉬는 법, 눈 깜박임 등 신경 쓰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되던 것들이 신경 쓰기 시작하면 이상하게 꼬여버리는 경험을 다들 겪어봤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나는 시 위에서 넘어지고, 시를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모르고, 시로 숨 막혀하고, 시의 점멸(瞬滅)에 눈이 멀어버렸다. 시를 쓰는 행위가 무의식에서 의식적 능력의 영역으로 옮겨지면서, 내 뇌는 한 문장을 쓸 때마다 어색하게 삐걱이고 있다


어제 [상태 보통 참치]라는 단어가 재미있게 느껴져 시를 쓰려고 했지만 단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이전이라면 상태가 보통인 참치를 보면서, 보통 상태인 참치와 특상 참치와 하급 참치가 모두 바닷속에서는 삶에 최선을 다하던 최상의 참치였다는 이야기를 대충 시의 모양으로 써냈을 것이다.

'붉음은 바다에서 급속 냉동된 시간의 조각이다'라든지, '너는 그곳에서 이곳으로 튀어 올랐는가' 같은 문장을 그저 무의식적 감각에 의해 써 내려가면서 즐거워했을 테다.

하지만 이제는 한 문장을 쓸 때마다 온갖 잡지식이 시의 발화를 방해한다. 붉음의 시니피앙, 냉동이라는 시간의 기표, 상태의 윤리적 딜레마, 세 개의 상태로 대구 되는 시니피에들의 간격이 적절한가 등등. 그야말로 '시 발화 불가 상태 이상 참치'가 됐다고 할까...


나는 지금 시 발화의 골목에서 길을 잃었다. 지도는 있는데 걸음 내딛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한 발자국도 걷지 못한다. 나의 신분증에 '시적 언어 운용 장애 3급'이라도 찍혀 있을 것만 같다. 사실 시의 이론을 공부할 때는 선생님이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이론 서적은 충분히 읽을 만했고, 이해도 잘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이 장애를 넘어가는 일에는 선생님이 필요하다.


그래서 묻습니다.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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