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혁' 소설
세 겹의 시간은 겹겹이 포개진 유리처럼, 서로를 비추며 하나의 빛으로 수용한다. '나이트 트레인'이 건네는 것은 흔한 여행의 기록이 아니고, 시간이라는 이름의 긴 길을 천천히 걸어가는 한 인간의 내면 풍경이다. 그 글에는 세 개의 문이 있다. 하나는 소설을 쓰는 시간, 또 하나는 1999년의 유럽을 횡단하던 젊은 날의 시간,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그 여행 속에서 다시 생겨난 또 하나의 이야기, 소설 속의 시간이다. 세 개의 문은 서로 닫혀 있는 듯 보이지만, 모두 연결되어 있어 한 걸음만 내디디면 다른 시간으로 스며들 수 있다.
문지혁 소설이 특별한 이유는, 그 문들이 단순히 과거와 현재를 나누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그것은 서로를 침범하며 뒤섞이고, 끝내 지금이라는 하나의 감각으로 응집된다. DAY 9200이라는 숫자는 그 응집의 시작점이다. 흔히 여행을 떠나고 돌아오는 기억으로 이해하지만, 문지혁 소설은 그 관념을 조용히 부수어 버린다. 여행은 떠난 날로부터 계산되는 것이 아니고, 살아온 모든 날들의 총합으로 확장된다. 그러므로 여행은 3주간의 유럽이 아니라, 9200일이라는 시간의 길이로 환산된다. 그 긴 시간은 지도 위의 이동이고 또 마음의 방향이 바뀌어 온 궤적이다.
이렇게 보면, 여행은 더 이상 장소의 문제가 아니다. 상태의 문제이고 인식의 문제다. 흔히 어딘가에 도착했다고 믿는 순간에도, 사실은 또 다른 길 위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 이 소설 속에서 시간이 지나서야 알아차린 것도 바로 그것이다. 여행은 끝나지 않았고 끝날 수도 없으며, 다른 이름으로 이어질 뿐이라는 사실.
그래서 그의 종착점이 분리수거를 하는 일상의 장면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 낯선 도시의 광장이나 밤기차의 창밖이 아니라, 가장 평범한 공간에서 여행은 비로소 제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그토록 멀리 떠났다가 돌아와야 하는 자리, 나로서 살아가는 현재의 자리다. 그곳에는 더 이상 이니셜로 축약되지 않는 이름이다. 이름을 되찾는다는 것은 그 고유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이다. 익명성과 거리의 감각 속에서는 미처 알지 못했던 감정들이, 일상의 반복 속에서 또렷이 기억되는 것처럼.
이 소설이 '고잉 홈'이라는 조용한 결론에 이르는 것도 그래서 자연스럽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단순한 귀가가 아니라, 자신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이해는 늦게 찾아온다. 인간은 늘 지나온 길을 돌아볼 때에야 그 길의 의미를 알게 된다. 시간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간은 기억을 흐리게 만들지만, 또 그 안에서 본질만을 남겨 두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반지를 버리려는 모습은 끝내기 위한 몸짓이지만, 역설적으로 새로운 시작을 암시한다. 무엇인가를 내려놓는 순간, 또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다. 버림은 잃음이 아니라 여백이고, 그 여백 위에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 소설 속에서 사라진 것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어딘가에서 다시 발견되고, 다른 형태로 되돌아온다. 그것이 기억이고 삶의 방식이다.
'나이트 트레인'은 하나의 원을 그린다. 시작과 끝이 구분되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움직이고 있는 원. 그 안에서 나와 은혜는 둘이면서 하나가 되고, 하나이면서 다시 둘로 나뉘며 살아간다. 인간은 그 원 안에서 돌고 또 돌면서,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고 믿지만, 사실은 조금씩 다른 높이에서 같은 풍경을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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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소설가 문지혁 소설이 남기는 것은 화려한 사건이 아니고 조용한 깨달음이다. 인생에 여행 아닌 것이 존재할 수 있느냐는 질문. 인간은 지금 어디에 머물러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어쩌면 모두 각자의 DAY 9200을 지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속에서 이미 수많은 결말을 지나온 채로. 그리고 오늘도,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 일상은 깊은 여행의 한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