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객 여러분, 저희 항공사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도착했다. 11시간의 긴 비행이 끝나자 승객들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출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공항 유리창으로 쏟아지는 따뜻한 햇살에 누군가는 두꺼운 외투를 벗었고, 누군가는 선글라스를 끼며 한껏 멋을 부렸다.
나는 호빵처럼 퉁퉁 부은 얼굴로 두 번째 비행기 티켓을 쥐고 환승게이트로 이동했다. 나의 최종 목적지인 페루 쿠스코까지 가려면 11시간을 더 날아가야 한다. 아직 갈길이 멀었다. 인천공항 수화물 카운터에서 내 손에 쥐어진 세 장의 비행기 티켓을 보고 입을 딱 벌리던 승무원의 얼굴이 생생하다. 하긴, 한 방에 31시간을 경유해서 여행 가는 사람이 흔치는 않겠지. 하지만 놀랍게도 이것이 인천에서 쿠스코로 가는 최단 경로다! 남미는 정말 멀고 먼 곳이다.
환승 게이트를 지나자마자 이마에서 열이 끓어오른다. 쌀쌀한 기내 안에서 감기에 걸린 것이다.
'약봉투, 약봉투가 어딨 더라?'
나는 백팩에 넣어 둔 커다란 약봉투에서 타이레놀을 찾아 입에 털어 넣었다. 나이들 수록 늘어나는 건 약봉투밖에 없다.
'하, 두툼하게 입고 올걸... 안돼. 절대 아프면 안 돼, 나 혼자니까.'
나는 입술을 앙 다물고 백팩을 고쳐맸다. 착한 남편이 울며 겨자먹고리 보내 준 소중한 여행을 망칠 순 없었다. 남편은 나의 안전을 걱정했기 때문에, 남미에 혼자 여행을 가냐 마냐로 나와 몇 달간 실랑이를 했었다. 결과적으로 남편은 늘 그래왔듯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록 해주었지만 훌쩍 떠나가는 나의 발걸음은 결코 가볍지만은 않았다.
원래 결혼으로 맺어진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무척 안락하고 편안하지만 때로는 답답하고 불편한 법이다. 그래서 기혼자는 싱글을 부러워하고, 싱글들은 기혼자를 부러워하는가 보다.
출발층에 들어서자마자 전광판부터 확인했다. 다음 비행기는 지연 없이 정상 운행할 예정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이네. 쿠스코행 비행기도 잘 탈 수 있겠다."
비행기를 기다리는 대기 동안 빵이랑 물을 샀다. 남편에게 전화도 잊지 않았다.
"오빠, 나 잘 왔다용! 이제 페루로 간다 >_<"
"오오, 잘 갔어? 재밌게 다녀와!"
잠깐이나마 남편의 목소리를 들으니 힘이 나는 것 같았다. 남편은 언제나 든든한 나의 지원군이다.
이윽고 두번째 비행기로 갈아탔다. 어김없이 긴 비행이 이어졌다. 그리고 4시간 대기 후 마지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쯤 되면 정신이 반쯤 나가서 내가 비행기인지 사람인지 헷갈릴 정도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주 아주 먼 곳으로 여행을 가고 싶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에서의 삶을 다 잊게 해줄만큼 먼 곳이 좋았다. 친척들은 무탈한 인생을 살아온 내가 항상 행복하고 즐거운 줄 아는데, 사실 난 그렇지 않다. 인생은 멀리서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운명의 장난인건지 나는 학교에서 어려운 아이들을 참 많이 맡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과연 좋은 교사인가'를 고민하느라 마음이 까매질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아주 먼 곳에 가서 마음을 다시 하얗게 닦아냈다. 그렇게하면 다시 짠! 하고 원래의 나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여행은 '잃어버린 나를 찾는 마법'인 셈이다.
쿠스코 공항은 버스 터미널처럼 작고 아담했다. 나는 잔뜩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공항 밖으로 나왔다. 왜냐하면 쿠스코는 해발 3000m가 넘는 고지대라 고산병이 크게 올 경우 산소부족으로 쓰러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괜찮아, 정신만 바짝 차리면 큰 일 없을 거야!'
나는 우버를 불러 곧장 호텔로 이동했다. 자동차 창문 너머로 하늘을 맞닿은 듯 커다란 구름과 알록달록한 도시 전경이 보였다. 창틈 사이로 도시 전체를 감싼 매캐한 매연이 들어왔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여기는 아름다운 도시, 쿠스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