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가 봄볕 같다
"세월을 붙잡아 매 두고 싶은 계절"이 왔다.
벚꽃나무에 화사한 꽃구름이 언제 내려앉을지 오갈 때마다 바라본다. 예전에는 꽃이 피고 나야 꽃이 핀 것을 알고 단풍이 져야 단풍이 졌구나 싶었다. 그런데 올봄은 다르다. 정작 벚꽃나무 보다 내가 더 목을 빼고 날을 세며 꽃을 기다린다. 하지만 봄꽃이 만발할 때쯤이면 이상스럽게 서글프기도 하다. 꽃송이들이 눈송이 날리듯 떨어져 땅바닥을 분홍 카펫으로 물들이며 질 것이기 때문이다.
고생의 징검다리를 자식 둘러업고 끼고 펄쩍펄쩍 건너뛰느라 자신의 고통조차 느낄 새도 없었던 엄마가 사진 속에 있다. 엄마는 분홍 진달래가 미친 듯이 피어 주체를 못 하는 것을 보며 "세월을 붙들어 매고 싶은 계절"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엄마가 꽃잔치에 나와 그들처럼 봄볕의 다정한 마사지를 받는 모습에 안도하면서도 서글프다. 엄마가 세월을 붙들어 매고 싶다는 말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날이 아름답다는 뜻일 것이다. 자식 노릇이란 그 시간 그 시절에 함께하는 것일 텐데 내가 놓친 시간을 상실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 있을 때나 여기서 살 때나 자식답지 않게 무심했었으니까. 그 고통의 시절들을 엄마의 마른 뼈와 살 사이에서 끄집어내어 엄마를 위로하시는 분이 계시긴 하다. 엄마는 하나님 없이는 못 사는 분이니까!
죄책감은 자신을 용서하며 해소한다는데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자식 노릇 못하면서도 나에게 관대했기에 그럴 마음이 지금은 없다. 그래서인지 지난주에는 계단에서 뒤로 넘어져 등 갈비뼈를 다쳤다. 내가 태어나 겪은 최고의 황당하면서도 놀라운 사고 아닌 사고였다. 어쩌면 스스로에게 내린 벌이었을까? 그렇지만 엄마가 내 육신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알기에 엄마 생각하며 침 맞고 물리치료받으며 회복하려고 애썼다. 엄마는 나의 온전함이 행복이다. 늘 괜찮은 것처럼 별일 없다고 했었던 나인데 이번에는 있는 대로 이야기했다. 엄마와는 이제 더한 일상의 디테일도 나눌 수 있게 친해졌다. 이제는 더 이상 시간을 놓치지 않고 싶다.
하지만 엄마는 멀리 계신다. 남편의 어깨에라도 기댈까 했는데 네플렉스에서 곰이 사람을 잡아먹는 영화에 눈길을 보내고 있다. 차라리 글이 위안이겠다 싶어 털썩 의자에 앉아 글을 쓰고 나니 마음에 봄볕이 내려앉은 듯하다. 넓은 창문을 활짝 열고 깊은숨을 들이켠다. 글쓰기가 봄볕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