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카펫 사러 갈 껄.
카펫을 사고 싶어졌다.
재택근무를 하는 나는 거실에 책상을 두고 사무실처럼 써왔다. 처음에는 넓은 공간감이 좋았으나 집중하고 있을 때 누가 말을 걸거나, 주방에서 덜그덕거리며 요리나 설거지하는 소리가 나면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내가 점점 더 예민해지고 있는 걸까? 분리되고 밀폐된 공간에 있으면 나을까 싶어서 침실로 책상을 옮겨봤다. 결과는 대만족이다. 능률도 훨씬 오르고 마음도 편해져서 그런지, 결과적으로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분리된 공간에 혼자만 있다는 느낌에서 오는 편안함이 있다. 새삼, 내 집 거실에서도 그런 편안함을 못 느낄 때가 있다는게 신기하긴 하다.
지난주 커피챗을 했던 니콜라스, 그리고 주중에 만나 저녁을 같이 먹은 트위티는 절대로 집에서 혼자 일을 할 수 없어 무조건 사무실에 나가며, 집중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는 아는 사람들이 적은 사무실에 나가서 일을 한다고 한다. 코로나로 집에서 혼자 근무를 해야 했을 때가 정말 암울하고 어두운 시기였다고. 우리 인간은 정말 개개인이 고유하며 다르구나. Covid가 많은 걸 앗아갔지만, 재택근무와 관련된 기술 발전과, 무엇보다 재택근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에 변화가 생기는 계기가 되어, 코비드 이후부터 재택근무가 기본값이 된 나에게는 이 점이 정말 감사하다.
어쨌든, 안 그래도 휑한 거실에서 책상을 뺐더니 더 비어보여서, 그래서 카펫을 사고 싶어졌다. 바닥의 질감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공간이 분리되는 느낌을 줄 것 같아 모르는게 없는 나의 싱가폴 똑순이 푸린에게 카펫 전문 창고형 매장을 추천받아 지난 주말에 다녀왔다.
여기는 Tampiness라는 싱가포르 북쪽 지역에 위치한 카펫/러그 전문 창고형 매장이다. 일주일 내내 운영하며, 젊은 청년 사업가가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많은 손님들을 응대하고 있었다. 친절한 설명과 합리적인 가격, 실제로 촉감을 느껴보고 구입할 수 있다는 점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털이 긴 것으로 할지, 짧은 것으로 할지 조금 고민하다 촉감을 중시하는 남편이 긴 털로 하자고 해서 주문을 넣고 왔다. 일 주일 뒤 카펫이 도착했다.
처음 남편은 No carpet is the best carpet이라며 카펫 자체를 반대했다.
이에 나는 카펫이 있다면,
1. 공간을 분리시키는 느낌을 줄 것이며,
2. 한국 사람들은 소파 아래 바닥에 앉는 것을 좋아하는데 카펫을 사면 지금보다 그게 더 쉬워질 것.
3. 막상 카펫이 있다면 남편이 아마 그 위에서 굴러다닐 것이다.
라는 나의 주장에, '그럼 카펫을 구입하되 나는 매장에 가지 않겠다. 카펫을 원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니, 내 의견은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그러므로 카펫을 사고 싶은 사람이 매장에 가서 구입하고 오면 된다'라며 약간의 시위를 했다.
이에 나는 '소파 살 때도 그러지 않았니? 거실에 소파가 있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같이 소파를 보러 가서 당신이 원하는 스타일의 소파를 구입했고, 지금은 누구보다 소파를 좋아하는 당신. 카펫도 비슷할지도 몰라. 너의 의견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 그러니까 같이 가자. 가는 김에 데이트도 하고, 그리고 이게 나에게 중요하니까 같이 가줘'
돌이켜보면 이때 설득을 안했어도 됐는데.. 어쨌든 이렇게 설득시켜서 같이 다녀온 카펫 매장에서 남편은 이리저리 열심히 뛰어다니며 손님을 응대하는 26살 젊은 청년 카펫 가게 사장님을 보고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나네, 너의 허슬을 respect 한다. 나도 그땐 정말 열심히 일했어'라며 라떼 응원도 해주고, 카펫도 내가 마음에 드는 것보다 본인이 더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랐다.
일주일 뒤 카펫이 도착했고, 예상했던 대로 남편은 카펫과 사랑에 빠졌다.
'여보 당신 말이 맞는 것 같아. 카펫 매장에 가자고 설득시켜줘서 고마워. 카펫 너무 좋아.'
세상만사 모든 것에 호기심이 별로 없고, 루틴을 사랑하는 나의 남편. 이런 남편을 꼬드겨서 새로운 것들을 시도해 보게 하는 게 재밌다.
반면 나는... 카펫 털이 너무 길어 더워 보이는 느낌이 들고, 공간이 부해 보여서 'No carpet is the best carpet' 역시 없는 게 나았나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고 있다. 내 취향을 찾는 것도 어렵지만, 그걸 남편의 취향과 맞추기 위해 이리저리 타협하다 보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게 되는구나. 내 취향대로 하거나 아예 안 하거나..... 교훈을 얻었다. 그래도 이리저리 레이아웃을 바꿔보면 마음에 드는 구도가 나오지 않을까 하여 이것저것 조금씩 가구를 움직여보고 있다.
골프 공이 안 맞으면 좌절감이 든다. 공이 안맞아서 짜증이 나다가, 문득 - 나보다 골프를 훨씬 많이 치는 남편도, 그리고 프로 선수들도 골프 슬럼프에 빠지곤 하는데, 내가 뭐라고 골프가 늘 항상 잘 되겠어, 당연히 안될 때도 있는 거야 - 라고, 법륜 스님이 귓가에서 속삭여주셨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괜찮아졌다.
지난 주말 토요일에 만났던 동쪽 동네 친구들과 이번 주에 또 만나 저녁을 먹었다. 모두 다 여행, 출장이 잦은 편이라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몇 달 동안 못 보는 일도 있어서, 시간이 될 때 자주 만나야겠다는 것을 느꼈다며 저녁 모임을 주선해 준 모아나. Ros Lamul이라는 찐 태국 음식점에서 만났다.
https://maps.app.goo.gl/yxD5cGM8xyVJEoby8
메뉴 선택도 모두 한마음으로! 모두 다른 배경을 가진 우리들이지만 싱가포르에서 책을 사랑하는 한국인이라는 교집합 덕분에 만나게 됐다. 알고 보니 먹는 것도 좋아하는 맛잘알에, 어느 정도 모험을 감수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태국 음식을 맛있게 먹고 나서 Geylang river를 한 시간이 넘도록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가 가진 비슷한 점, 다른 점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이 즐겁다. 내가 이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기에, 서로가 가진 다른 견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이들의 표현을 통해 들어보고 싶다. 감정적으로 이해가 어려울 때도 있지만 적어도 머리로 인식하는 공감 능력은 길러지는 듯 하다.
우리가 '공감'이라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인식적 공감: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머리로 이해하기
감정적 공감: 상대방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감정적으로 느끼기
연민적 공감: 인식적 공감이나 감정적인 공감에 더해, 그 상대방을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
트위티는 나보다 훨씬 더 다채로운 감정의 틀과 렌즈를 가지고 있다. 트위티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녀의 기분에 대해 감정적인 공감을 느끼긴 어려울 때가 있지만 (정말 그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겠음), 인식적인 공감 - 즉 이해가 되고, 그녀가 힘들어한다면 그에 대해 도와주고픈, 연민의 마음도 생긴다. 게다가 내가 그녀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이들을 이해하는데 엄청난 윤활유 역할을 해준다.
'감정적 공감' 능력을 기르는데 어느 정도 한계는 있지만, 공감 능력과 감정의 채가 다채로운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이 능력은 올라갈 수 있다. 이에 더해서 소설을 읽거나, 경청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도 공감 능력을 높이는 방법이라고 한다. 소설을 읽을 때는 소설 속 화자나 등장인물의 입장이 되어서 사건들을 바라보게 되면서 공감의 폭이 늘어날 수 있다. 또한 상대방이 말로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서 어떤 감정을 느끼며, 어떤 마음이고,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지에 집중해서 듣는 경청의 연습을 하다 보면, 감정적인 공감 능력이 높아질 수 있을 것 같다.
말과 언어에는 한계가 있다. 말로 잘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고,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이해되고 느껴지는 감정들도 있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가지는 사람들과 연결되고 교류하면서, 말 이면에 어떤 마음과 생각들이 있는지, 말을 넘어서서 교류하는 것은 소중한 경험이다.
앞서 말한 3가지 유형의 공감 중에 1번과 2번, 인식/감정적 공감은 기술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즉, AI와 대화를 통해서도 공감받는 느낌을 얻는다. 반면 3번, 연민적 공감은 상대방을 도와주고 싶다는 '의지'가 투영되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AI는 '감정'을 가지고 있진 않으니, '연민적 공감'은 AI가 시뮬레이션 할 수 없는 영역이다.
나의 public speaking coach 알렉스와, 알렉스의 여자친구를 집으로 초대해 점심을 먹었다. 남편의 소개로 발표 불안/대중 연설 관련 코칭을 해주는 알렉스를 만났고 1년 정도 화상으로 코칭 세션을 가져왔다. 미국 애리조나에서 살고 있는 알렉스는 여자친구와 함께 3개월 정도 아시아에서 머무는 중이다. 서핑을 좋아해 지금은 발리에서 2달 정도 지내고 있으며, 우리를 만나러 주말 동안 잠깐 싱가포르로 넘어왔다. 화상으로만 대화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 트라우마 등 깊은 주제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눴고, 알렉스는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 중에 한 명이라 이미 엄청난 내적 친밀도가 쌓였다.
사람들은 이해받고 공감받는 것 만으로도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졸이 감소하고, 유대감 호르몬으로 알려진 옥시토신이 분비되어 신뢰와 애착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이해받는 경험이 좋았다면, 그 사람을 다시 만날 때에는 '이 사람과 있으면 기분이 좋아질거야' 라는 기대감 때문에 도파민이 나오기도 한다고. 우리 뇌가 이렇게 설계되어 있다니, 정말 신기하다.
남편은 소셜 배터리의 크기가 나보다 더 작은 사람이다. 본인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밥을 먹어도 2시간 정도가 최대이며, 남편 가족들과의 모임에도 오히려 내가 더 오래 테이블에 앉아있는다. 이번 알렉스 커플과의 점심식사에는 기록적으로 장장 4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우리 모두 다 재택근무를 하고, 문화적인 다양성에 끌리며, 거의 정반대의 어린 시절을 겪었지만 삶에 있어 중요한 가치관들이 너무나 비슷한 파트너를 만나 첫눈에 상대방이 인생의 동반자가 될 것임을 느꼈다는 점 등. 비슷한 점들이 너무 많아 대화가 끊임없었고, 게다가 특히 알렉스는 엄청난 공감능력과 그걸 표현하는 능력 역시 비범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놀랍게도 알렉스와 여자친구 코너는 발리에 도착하자마자 역주행하던 오토바이에 치이는 끔찍한 교통사고를 겪었고, 알렉스는 발목에 미세 골절이 생겨 거의 7주 동안 누워있어야 했다고 한다. 이들이 죽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그만큼 우리 삶은 예측할 수 없으며,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한순간에 당연하지 않아질 수 있다. 안전, 건강에 가장 큰 주안점을 둬야겠다고 다시 한번 느꼈다.
친구들을 초대하면 한두 개는 새로운 메뉴를 시도해 본다. 오늘의 새로운 도전은 멜론+부라타 치즈+허브 샐러드. 한국 출장 때 을지로에서 갔던 와인바에서 먹어보고 너무 맛있어서 사진으로 찍어놨었고, 맛을 떠듬떠듬 기억해서 만들어봤더니 대성공이었다. 앞으로 자주 메뉴에 올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