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상속인은 피상속인과 다르다
가우재는 김학주의 영정 아래 하얀 꽃을 내려놓고 절을 한다.
평소와 같이 어딘가 어색한 표정의 영정. 여자가 절을 하는 방법은 남자와 차이가 있다: 남자가 큰 절을 할 때 여자는 평절을 한다. 어디서 나온 차이일까?
가우재는 영정 속의 곱슬머리를 한 남자를 바라본다.
천재적이고 어리석었고, 유쾌하면서도 우울했고, 몽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이었던, 분석적이면서도 미신적이었던 남자.
오랜 적수이자 협력자. 회장은 그를 알파의 아버지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 나는 알파의 어머니라 불릴 것이고, 아버지라는 타이틀은 김학주가 가져가겠지. 단지 그들의 성별이 그렇기 때문은 아니다. 계율이 알파라는 정신의 틀이라면, 알파의 육신인 트롤리를 만들어준 것은 그녀니깐. 전통적 세계관에서 볼 때 그렇게 틀린 비유는 아니다. 그렇다면 알파는 아버지를 잃은 것인가?
가우재는 천천히 김학주의 영장으로부터 시선을 뗀다. 상주에게 절을 올릴 차례이다.
말총머리를 한 남자.
김학주를 쏙 닮은 상주가 비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우재는 순간 김학주의 부활을 목격한 듯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검은 양복에 반바지, 거기에 노란색 양말을 신고 있는 남자는 어느 모 로보나 김학주와 달랐다. 김학주는 언제나 옷을 잘 차려입었다. 가우재는 진정을 되찾는다. 예를 차리고 평절을 올린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김학주의 쌍둥이 동생, 김학모는 맞절을 올린다.
고인과 똑같은 외모를 가졌지만, 상속인은 피상속인과 다르다.
김학주가 자살하기 전에 유서를 쓸 정도의 주의력이 있었다면, 자신의 모든 재산을 태워버렸을지 언정 그의 형제에게 재산이 돌아가는 일은 없도록 했을 것이다. 김학모와 김학주의 관계가 틀어진 이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불필요할 것이다: 17회에 이르는 사기 전과, 8회의 무면허와 음주운전, 4회의 존속폭행. 사기꾼의 가장 큰 피해자는 많은 경우 가까운 가족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결국 도와주다 도와주다 연을 끊고 사는 경우도 많다. 그 무렵 김학모는 강원도 영월에서 철학원을 열고 무당을 하고 있었다. 정말 신내림이 들었냐면 그건 아니지만.
그런 그에게까지 연락이 간 것은 회사의 덕이 컸다.
"아무리 그래도 상주는 있어야지." 정우령이 씁쓸한 목소리로 홍순기 이사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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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굿판을 벌이다 의절한 형의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김학모로서는 다소 어리둥절한 일이긴 했다.
"꼭 제가 가야 하나요?" 김학모가 귀찮다는 듯 말한다.
"네, 부탁드립니다. 아시겠지만 아내분도 따님도 돌아가셔서 선생님이 유일한 혈육이십니다." 홍순기 이사가 정중하게 부탁했다.
김학모는 찌뿌둥한 기분으로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그러다 톨게이트를 지나 고속도로에 오를 때쯤에야 그의 행운을 깨닫게 되었다. "아! 맞다! 조의금!" 그리고 고속도로를 빠져나올 때쯤 더 큰 행운을 깨닫게 되었다. "아! 보험금!" 그리고 호텔에서 잠을 청하다가 생각이 났다.
"학주 재산...."
장례식은 회사의 배려로 성대한 규모로 치러진다. 그 자리에 난데없는 사람이 혈육이라는 이유만으로 상주 모자를 쓰고 앉아있는 것이다. 의전을 모르는 김학모를 위해 회사의 비서까지 배치됐다. 아무튼 그렇게 정신없이 치러진 성대한 장례식에 (김학모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정우령 회장을 비롯한 유명 재계 인사들이 줄을 이었다. 김학모가 알아본 사람은 당대 최고의 가수로 유명한 손시정이었다.
"학주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었어?" 손시정과 악수를 나눈 김학모가 손을 만지작 거리면서 혼잣말을 한다.
아무튼 유명한 사람들이니 조의금도 넉넉히 주겠지. 김학모는 손시정이 주고 간 봉투 속을 들여다본다: 10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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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를 마치고 김학모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법무사 사무실을 찾아간다. 법무사의 조력 하에 김학모는 김학주의 모든 법률적 권리와 의무는 물론, 조카인 김민주의 모든 법률적 권리와 의무에 대한 상속절차를 마친다. 당시 김학모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전자의 상속관계였지만, 정작 역사에 중요한 것은 후자의 것이다.
김학모는 일을 끝내고 가정법원에서 걸어 나와 맑은 겨울 아침 공기를 느낀다:
“역시 서울 공기는 무언가 다르구먼!”
김학모가 말총머리 꼬리를 만지작거리면서 흡족스럽게 말한다. 서울의 커피는 영월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향긋하고 고소하고, 서울 아가씨들은 눈 돌아가게 섹시하다. 강원도 영월 금강공원길 끝자락에 위치해 있던 “영월용한점집”이라는 상호의 철학원은 2028. 1. 5.부터 개인적 사정으로 인한 휴무에 들어간다. “사장에게 할 일이 생겼습니다.”
조의금 봉투를 뜯고 돈을 모으는데만 이틀이 걸렸다. 이름과 금액을 기록하지 않았는데도. 그리고 보험금도 타야 했고, 또 다른 보험금도 타야 했으며, 그리고 또 다른 보험금도 타야 한다. 돈을 받는다는 게 그렇게 편안한 일은 아니었다. 보험, 예금, 부동산, 주식, 채권… 이것들을 확인하는 것도 일이고, 환가 하는 것도 일이었다.
할 일이 많지만 김학모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그는 인생을 즐긴다. 그는 그에게 찾아온 행운을 마다 하지 않는다.
오랜만에 다시 ‘필드’로 왔다. 상속인은 화려했던 지난 시절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젠 예전과 달리 정말로 ‘돈’이 있다.
그만큼 누릴 것은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시내 최고급 호텔에 머물면서, 아침에는 ‘아메리칸 스타일 브런치’와 아메리카노 한잔으로, 점심에는 유명한다는 초밥집을, 저녁에는 잘 나간다는 룸살롱을 전전하고 그간 보지 못했던 ‘사회 후배들’과 해후를 만끽한다.
양주잔 속 얼음을 돌리며 성공의 뉘앙스를 풍긴다. 그간 대단한 사업을 해왔던 것처럼 썰을 푼다. 프라이빗 클럽, 한강 조명이 내려다보이는 창가를 배경으로 앉는다. 창밖의 영롱한 불빛들은 '김학모'라는 남자가 이뤄낸 성공을 장식하는 것 같다. 후배들의 눈에 가득 찬 선망의 눈빛.
"들어, 즐기자고."
그게 바로 인생의 맛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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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술이 좀 깰 때쯤에 김학모는 김학주의 일산 자택으로 간다.
한 사람의 집을 보면, 특히 그의 서재에 꽂혀 있는 책들을 보면 그가 어떤 생각들을 하고, 어떤 목표와 꿈을 갖고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김학모가 원한 것은 그의 형제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김학모는 망인이 생전에 사모았던 책들을 묶어 헌책방에 내다 팔았다. 팔리지 않는 것은 폐품으로 분리해서 팔았다. 집안에 있던 모든 서류들(거기엔 계율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만한 내용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은 벽난로 불을 지피는 데 사용된다. 가구들도 팔려나간다. 비싸게 팔 수 있는 것은 비싸게 팔았고, 싸게 팔 수 있는 것은 싸게 팔았다. 그렇게 고인의 집은 빈집이 되어간다. 주택은 빈집 상태로 23억 원에 매각된다.
다음으로 회사로 찾아가 퇴직금과 위로금을 요구한다.
성대한 장례식과는 별개로 회사 내부에는 어쨌거나 김민주 사건으로 인해 회사가 큰 곤욕을 치르게 되었으니 퇴직금을 홀딩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법무팀 고인겸 변호사는 퇴직금과 망인에 대한 손해배상 채권을 상계처리할 수 있는지 검토하고 있었다. 이를 전해 들은 정우령 회장이 노발대발하며 직접 법무팀 사무실로 찾아갔다: 원색적인 표현이 동원된다.
정우령은 김학모를 불러 자신의 사무실에서 퇴직금에 자신의 사재를 보탠 20억 원을 손수 김학모에게 건네준다. 현금뭉치로: 아끼던 사람을 잃은 회장의 마지막 배려.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외면하고 말았던 친구에 대한 속죄.
“제 동지였던 사람이었소. 돈으로 사람의 목숨을 되돌릴 수 없고, 운명을 바꿀 수 없겠지만, 이 돈이 회사와 내 마음의 표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끼던 사람이라도 남의 가정사까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형제는 다를 수 있고, 상속인은 피상속인과 다르다. 더군다나 적당한 액수의 돈은 사람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역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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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 보면 어림잡아 70억 원이 넘는 돈이었다. 벼락부자가 된 김학모가 그 돈의 상당 부분을 탕진하는데 채 6개월이 걸리지 않았다.
과소비만으로는 이룬 일은 아니었다. 과도한 유흥으로 보유자금의 단위가 달라지자 김학모는 이른바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잘못된 관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는 생각한다: 남은 자금을 적절히 운용하기만 하면 다시 이 ‘70억’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문제는 그러기에 김학모가 돈을 조금 너무 좋아했고, 또 조금 너무 과감하고, 또 조금 급한 면이 있었고, 더 너무 겁이 많은 편이기도 했다.
그는 주식과 선물 시장에 발을 들였다. 몇 차례 단타 매매에 성공하자 김학모는 자신에게 ‘승부사의 감’이 있다고 굳게 믿기 시작했고, 마치 롤렛 판에 칩을 올리듯이 거금을 관심종목에 투자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김학모가 굳게 믿고 있는 ‘신기’의 힘을 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신이 있다면 신은 그를 그렇게 잘못된 길로 인도했다.
그렇게 49억 원을 날려먹었다. 그래도 아직 고향에서 여유롭게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한번 70억 원이라는 현금을 거머쥐어 본 김학모는 프라이빗 클럽에서의 그 밤을 잊지 못한다: 그 영롱했던 불빛들, 얼음잔, 독주, 향수 냄새, 무엇보다 그를 들끓게 했던 건 후배들의 그 눈빛: 이제와 못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그는 다시 한번 도약을 꿈꾼다: 그건 자신의 성공비법을 다시 한번 반복하는 것이다: 상속 재산 찾기.
궁리 끝에 김학모는 자신이 김학주뿐만 아니라 조카인 김민주의 상속인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럼 김민주가 갖고 있던 재산은 뭐가 있지? 17살짜리 고딩이?
몇 주 동안 불쌍한 무료 법률상담센터의 변호사들을 괴롭힌 끝에, 김학모는 불행하게도 어린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가여운 김민주양이 남긴, 이 보이지 않고, 신비롭고도 기묘한 마지막 재산의 존재를 알게 된다: 회사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
김학모는 흥분에 들떠 생전에 형이 사용했던 노트북을 써서 소장을 작성하였다: 원시 계율을 작성했던 바로 그 노트북. 소장은 2029. 12. 29. 에 춘천지방법원 영월지원에 접수된다. 소장은 형식도 엉망이었고, 오탈자도 많았으며, 군데군데 문법이 맞지 않는 부분도 많았고, 결정적으로 쓸데없는 내용이 정말 많았다.
하지만 이 길고 긴 서사시 같은 소장에는 사건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장이 한 줄 들어있었다.
“제 조카는 이 병신 같은 알파라는 것 때문에 뒤졌어요. 그러니 알파 만든 회사가 갚아야 하지 않것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