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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덕중 Jul 13. 2020

질주의 역사 - 6

물론 돈 때문은 아닙니다

6/ 물론 돈 때문은 아닙니다




‘인중’으로 불려온 정치조직은 30년에 걸쳐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려왔다. 인간중심연합, 인간중심당, 통합인간중심연합, 인중천년당, 연합인중당, HCP(Human Central Party), 인중조, HS(Human State)… ‘인간이 먼저인 세상을 꿈꾸는 모임, 새인중연합 등’.... 그렇게 ‘인중’은 시대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려왔다. 


인중의 시작은 '인중'이라는 말을 창시한 이규 '박사'라는데 학계의 이견이 없다: 인간중심사상의 거인. 


‘거인’의 주활동무대는 대학강단이나 연구실이 아니다. 그가 대학강단에 서려고 무던히 시도하기는 했지만, 당시 그의 전공은 애초에 ‘사상’과는 아무 상관없는 지질학과였다. 석사논문은 대충 위키피디아에서 긁어온 듯한 그 시절 대학원생의 석사학위용 논문에 불과했다. 석사 다음은 박사인데,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대학연구실에서 나이가 들어갈 수록 이규의 초조함도 커져갔다. 친구들은 이미 가정을 이루고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가는데… 더군다나 그의 연구가 대단한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정말 시의적절한 것이 아니었다. 연구주제: ‘퇴적암석학’ 중 석유와 석탄 매장량의 측정방법에 관한 것. 화석에너지에 대한 의존율은 날이갈 수록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아직도 모르겠어? 에너지는 이제 땅에서 나오는게 아니라고 하늘에서 온다고!" 얼큰하게 취한 지도교수가 위를 가리키며 한탄한다.


그 말을 들은 이규는 멍하니 위를 올려다본다. 술집 천장에서 무심하게 돌아가는 선풍기. 깜빡이는 조명. 지도교수가 할말은 아니지만 어쩌면 교수님의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 


이제는 하늘에서 wifi가 떨어지는 시대가 아닌가. 


-



이규는 학부시절부터 SF영화나 소설에 심취해 있었는데,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초조함과 무료함을 죽일 수단으로 시간이 날때마다 블로그에 SF문화에 관한 글을 올리곤 했다(몇편의 재미없는 SF소설을 쓰기도 했고). 진척이 없던, 어찌보면 시대착오적인 연구주제와 달리 그의 ‘블로그질’은 그야말로 시의적절 한 것이었다. 세상은 한참 인공지능, 가상현실 등으로 떠들썩했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SF장르는 당시말로 한참 ‘핫’했다. 


블로그가 점점 유명해지자 이규는 SF문화에 대해 소개하는 유튜브채널을 시작했고, 내용은 부실했지만 잘생긴 외모 덕에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인기를 끌게 됐다. 구독자 10만명이 넘어서는데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영상편집이 점점 손에 익자 이규는 자신의 직업이 무엇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방송에서도 새로운 SF영화가 나오면 인공지능 이슈를 다루기도 했다. 관련된 토크쇼라도 열리면 이규만큼 적절한 패널이 없었다. 훌륭한 마스크, 적절한 말투, 적절한 옷차림, 적절한 학벌, 적당한 유명세, 그리고 적절하게 떨어지는 전문성. 그렇게 방송국 사람들과 안면을 터가자 이규는 영화소개 프로그램에서 한 코너를 맡게 되었다. 이규는 더 이상 자신의 직업이 무엇인지 헷갈리지 않았다.


박사학위 논문은 2027년도에 완성되었으나, 심사를 통과하진 못했다. 오자는 많았고 논리는 정치하지 못했으며, 인용된 데이터는 이미 업데이트 전의 오래된 자료였다. 이규가 더이상 학위에 미련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해보였다. 그렇게 박사졸업이 아니라 박사수료로 최종학력을 마무리했다. 그래도 이규는 어딜가나 ‘이규 박사’라고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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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시대를 풍미하는 방송인정도에 그칠뻔한 이규가 ‘인간중심사상의 거인’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얻게된 것은 김민주 사건이 터지고 나고서였다. 


물론 그 가능성을 상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상속, 그러니깐 픽션의 영역이였는데, 그게 현실로 벌어진 것이다. 이규가 이 흥분되는 소식을 듣고서는 곧바로 집필에 들어갔다. 


“기계의 복수”는 3개월 후에 출간되었다. 다분히 과대망성적인 미래예측으로 가득차 있었다. 별다른 근거도 없이 ‘김민주 살인사건’을 인공지능의 첫번째 살인사건이라고 규정지었고, 40년전 영화 “터미네이터”가 지나치게 많이 인용되어 있기도 했다… 그래도 책은 많이 팔렸다. 유명세가 있으니깐. 무엇보다 “기계의 복수”에는 후에 ‘인중’의 캐치프레이즈 정도에 해당하는 문구가 들어 있긴했다. 


"미래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서평: “언제는 인간의 손으로 안들었는가?” 

서평2: "이 책은 과연 인간의 손으로 만든건가?"

서평3: "셀럽의 알바"


이규가 유튜브를 통해 열렬하게 홍보한  "인간이 중심되는 미래를 만들기 위한 사람들의 모임 창립회"의 현수막에도 그 캐치프레이즈가 적혀있었다. 


나름 잘나가던 방송인이 이상한 짓을 한다고 하니 언론의 주목을 받기는 했다. 사람들은 재미삼아 창립회에 참석한다. 창립회는 주로 연예프로그램에서 보도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제 유튜브를 통해서 소식을 접한다. 가장 많은 댓글: “ㅋㅋㅋㅋ”.


비웃는 반응이 압도적이었지만 지지자도 있기 마련이다. 열댓명의 열성적인 사람들이 모였다. “인간이 중심되는 미래를 만들기 위한 사람들의 모임”은 카페를 하나 빌러 창립총회를 열었다. 한 무리 열성 지지자들은 목요일마다 정기적으로 모여 토론을 벌이기로 했다. 열댓명의 개성넘치는 사람들이 제각기 이 모음으로부터 기대하는 바는 달랐다. 영화얘기하고 싶은 사람, 철학얘기하고 싶은 사람, 술먹고 싶은 사람…. 그렇게 5주 정도 모임이 계속되었고 “인중모”의 구성원은 8명으로 줄었다. 이건 아이템이 잘못된건가? 모임을 살리려면 무언가 해야한다. 


"우리끼여 모여서 떠들면 뭐해요?" 모임에 참가자 중 하나였던 김필립이 싱겁다는 듯이 말했다. "아예 돈모아서 소송이라도 하든가.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규는 거기서 힌트를 얻었다. "진짜할까?" 


이규는 일종의 캠페인을 제안했다. 알파OS를 개발하고 있는 회사에 소송을 걸어 개발을 막자는 것이었다. 법에 대해 모르기에 가능한 아이디어이긴 했지만. 아무튼 막연히 모여서 막연한 미래에 대해 막연한 주제로 막연히 토론을 하고 있는 것보다야...


"필립씨가 소장이나 이런거 써줄 수 있어? 법대 나왔잖아."


"알바비만 주시면요."


이규는 끊었던 유튜브를 다시 시작하면서 캠페인을 열성적으로 홍보했다. 호응이 좋았다. 소송 준비 상황을 방송하고, 후원금이 들어왔고, 그 후원금으로 행사를 열고, 행사를 촬영하여 유튜브에 올리고, 후원금이 들어오고, 재판이 열리고, 법원 앞에서 촬영을 하고, 후원금이 들어온다. 


재판날에 인중 뱃지를 차고 법정에 나선다. 적극적으로 민주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세계의 멸망을 막는다. 21세기 시민정신은 이런 것이다. 


이규는 법원 앞에서 작은 기자회견을 연다. 꽤 그럴듯한 회색양복을 차려입고. 넥타이까지 매고.


"우리 인중은 인류를 인류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움직일 뿐입니다. 돈 때문이 아니예요." 


잘생긴 사람이 말을 하면 그럴듯하게 들리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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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은 이미 이들과 여러번 법정에서 부딪혀온 “크레이지 담당” 고인겸 변호사다. 


고인겸은 해고 당한 것보다는 자기보다 두살이나 어린 팀장에게 깨진 것에 대해 분개했다.


“고 변호사님은 사회생활 잘 모르시죠?” 비꼬는 그 말투가 귓전에 들리는 것 같다.


하지만 고인겸이 이규를 찾아간 것은 단순히 회사나 팀장에게 ‘갚아주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앙심이 없지야 않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는 모든 개업 변호사의 임무에 대해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헤드라인에 들어가라! 


전직 (악의 무리인) 회사의 사내변호사가 인중모에 가입하여 지구멸망을 막기 위해 소송을 벌인다, 서사가 있지 않은가. 인중모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는 이미 30만을 넘어선데다 날로 늘어나고 있다. 이게 곧바로 그의 홍보수단이 될 것이다.


방송물 좀 먹었던 이규 역시 회사의 변호사였던 고인겸의 합류가 의미하는 바를 알았다. 인중모에게 큰 힘이 될 것다.  무려 ‘회사’ 출신의 변호사라… 


"스토리가 되네요. 함께합시다." 


이규는 고인겸의 두손을 웅켜쥔다. 동갑내기 두 남자의 의기투합.


"대표님이 아셔야 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고인겸은 이규에게, 이제까지 이규가 그 존재조차 몰랐던, 고인겸이 그토록 ‘역사적 중요성’이 있다고 강조하는 소송에 대해 알려주었다. 


김민주. 인공지능의 첫 희생자. 그녀의 삼촌이 송사를 시작한 것이다. 


"이건 아마 운명일 것입니다. 민주양이 그렇게 희생된 것. 우리가 인중을 시작한 것. 고변호사님이 저에게 온 것." 이규가 말했다.


"대표님, 이건 개인의 운명을 넘어서는 겁니다. 이건 역사입니다. 이건 우리가 해야 합니다. 우리는 역사적 의무가 있는 거예요. 돈 때문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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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의무를 위해. 김학모, 고인겸은 한밤중에, 영월용한점집의 노란 장판 위에 쪼그려 앉아, 식탁에 흩어진 쌀알들의 모습들을 분석하며 소송의 승패를 점쳐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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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년 11월 2일


새벽 5시경부터 이규는 영월지원의 정문에 줄자를 걸어놓고, 영월지원 앞으로 나있는 언덕을 따라 줄자를 풀면서 걸어내려온다. 


줄자의 길이는 정확하게 100m. 줄이 끝난 지점에서 이규는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주머니에서 노란색 분필을 꺼내 아스팔트바닥에 줄을 긋는다. 


거기가 시위대가 합법적으로 시위를 할 수 있는 한계선이었다. 시민 정신은 언제나 법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인중의 촬영담당자는 그 장면을 꽤 그럴듯하게 편집해서 업로드했다. 후에 10억뷰를 넘어선 그 장면이, 진정한 '인중'의 시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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