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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덕중 Jul 15. 2020

통과

손덕중, 2004





때 이른 겨울을 마주하면 네 눈동자는 차갑게 아직 깨나지 않은 아침 하얀 쌀알들이 얹어진 지붕 너머 메마른 코트를 입은 길손들은 모두 어디로 가려는가 새벽의 어둠도 다 가기 전에 밤새 우리 그토록 깊이 잠든 밤새 정말 많은 것들이 내려와 우리를 둘러싸고 세상 아침은 늙은 엔진처럼 털털거리면서 일어나 젖은 신발만 신고 어디든 가고는 했지 나는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데 내일이든 언제든 나 너를 안고 있을 텐데 너는 여기에 있는데 남자는 여자에게로 돌아가고 그래 가로수들은 깃발처럼 휘날리는 밤 그 많은 밤에는 나는 너의 골목을 헤매고 있었지 이제 밤이 떠나버리면 너 또한 그렇게 쓸쓸히 떠나버리지는 않겠지 창가를 헤매는 수많은 길손들 버스번호를 확인하는 잿빛 눈동자들 차가운 동전들을 뒤적이는 손들 모두 무얼 찾고 있는지 모두 어디로든 돌아가듯 너 또한 그렇게 떠나버리지는 않겠지 그래 그래서 어느 날 어느 비 오는 날 우리는 잠들고 그래 그래서 우리 낯선 싸구려 일박 여관 우리의 섬에는 세상의 소리가 파도처럼 우리를 깨운다


웅성웅성 소란스러운 빗방울 하나 둘 세다 그만뒀지 세상 구석구석 그렇게 한 때뿐인 비가 내리는데 뭐가 그리 지루한지 창문에 흐르는 온갖 빗방울들 보고 있는 너 옆으로 누워 비 오는 해변 온갖 파도가 몰려와 산산이 부서지는 아침을 보고 있었으니 네 곁에 나는 다만 외로웠는지 돌아 누워 지나버린 온갖 날들 너는 모를 그 날들 나는 지나왔는데 너 나를 사랑한다 말해주었을 때 네 눈동자는 무얼 보고 있었을까 정말로 넌 모를 수많은 한 오후에 저리도 많은 비가 내리면 나는 우산도 없이 긴 거리를 걸어 내려오면서 고개를 들어 세상의 온갖 비가 내 얼굴에 내 입술 내 가슴에 내리도록 했지 그래 바람 불고 큰 숲은 그렇게 크게 웃고 있을 때면 나 너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혼자뿐이었으니 비는 이름도 없이 저렇게 내리고 있었지 그래 그래서 나는 그 오후들을 지나 지금 네 곁에 누워있는데 그래 그래서 너는 어떤 날들을 지나 지금 내 곁에 그 쓸쓸한 등을 내보이며 누워 있는 거니 너의 눈은 저 많은 빗방울을 보고 있는 거니 아니면 유리에 비치는 우리를 보고 있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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