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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덕중 Mar 30. 2021

질주의 역사 - 11

무임승차




손시정의 데뷔초 인터뷰 영상을 보면 “어떻게 자동차연구원이라는 바쁘고 힘든 직업을 갖고서도 시간을 내서 음악활동을 할 수 있었냐?”는 뻔한 질문에 손을 떨며, 식은 땀을 흘리고 말을 더듬는 손시정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건 손시정이 카메라에 처음 섰기 때문이 아니라,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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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20개의 장과 대략 500개의 조, 1,200여개의 항, 3,000여개의 목과 호로 구성된 길고 지루하고 난해한 계율 중 일부는 알파 개발자가 준수해야 하는 원칙에 관한 것이다. 비슷하게 생긴 골목길을 돌듯 그 길고 지루하고 난해한 조항들을 돌다보면 어딘가에서 “알파의 실험자는 실험주행 후 퇴근전까지는 테스트용 차량을 회사 지정 주차장에 주차하여야 한다.”는 취지의 조항도 있었을 것이다(명시적 규정이 없어도 여러조항들을 짜집기하면 위와 같은 취지로 해석할 근거는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연구원들은 그 규정을 편하게 줄여서 ‘반납규정’이라고 불렀다.


‘대테스트시대’의 연구원들에게 반납규정은 성가신 규정이었다. 그들이 겪어야 했던 수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시 당시의 사회상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2025년도에 개정된 근로기준법에 의하면 오후 6:30 이후로는 원칙적으로 근무가 금지되었다(이른바 ‘야근금지법’이라고 불렸다). 문제는 서울 및 수도권 지역의 시민들이 본격적인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기 전에 퇴근시간 극심한 교통난에 몸살을 앓게 되었다. 아무도 야근을 하지 않게되면서  퇴근시간만 되면 사무시레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게 화근이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은 미증유의 교통난. 평균퇴근시간은 2시간 정도에 이르렀고, 증차된 버스와 지하철은 초만원이었다. 지하철은 몰려드는 승객을 감당하지 못해 시시때때로 정차했고, 고장도 잦았다. 야당이었던 선진당은 “저녁을 버스에서 보내는 삶”이라는 재치있고 신랄한 캐치프레이즈로 여당이었던 자유선지당을 공격했다. 


당시 연구원들의 생활상을 보자면, 하루의 일과 대부분을 차안에서, 교외를 달리고 나서, 다시 차량을 서울 중심지에 있는 지정주차장에 세우고, 자신의 비자율자동차(이들은 이를 “원시자동차”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를 운전하고 2시간 내지 3시간을 달려야 겨우 교외에 있는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불합리였다. 연구원들은 계율의 개정을 건의했지만 회사입장에서 연구원들의 퇴근길 고통따위는 큰 이슈가 될 수 없었다. 이사회에서 잠시 언급되고 지나가는 수준이었다. “누구나 겪는 고통을 연구원들이라고 특별대우를 할 수 없습니다!”라고 큰 소리치며, 모두가 고통 받는데 연구원들도 마땅히 퇴근길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사도 있었다. 


연구원들도 성향때문인지 회사를 상대로 투쟁을 하는 것에 상당히 거부감이 있었다. 퇴근문제만 아니면 일단 대우가 좋기도 했다. 노조위원장은 “이 더운날에 길거리에 앉아 투쟁할 바에 3시간동안 차안에서 에어컨을 쐬겠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다고 합리성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 연구원들이 앞서 말한 불합리를 그대로 두겠는가? 연구원들 중 ‘일부’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불합리를 ‘시정’하게 된 것은 필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엔지니어는 가능한 것은 반드시 실현시켜야 하는 사람이다.  손시정은 알파차량에 설치되어있던 라이다 센서 등 ‘감각하드웨어’, 초정밀 GPS 및 네비게이션, 이미 설계되어있던 자동주차장치의 알고리즘을 개량하고, 알파OS의 부팅과정을 해킹했다. 2026. 1. 5. 그가 사용했던 알파차량은 아무도 탑승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울에서 목포로 달려가 그가 지정한 식당 앞에서 30분 정차한 후 다시 손시정의 아파트 앞으로 돌아왔다. 모든게 계획대로였다. 손시정은 그날 오후 6:35에 자신의 트위터에 “오예!”라는 짧은 트윗을 남겼다. 마지막 남은 문제는 차량 안에 아무도 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들키지 않는 것이었는데, 그는 외각도로에 흔히 있는 썬팅업자에게 10만원정도를 쥐어 주고 알파의 창문에 정말 찐한 썬팅을 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OS를 “고스트OS”라고 명명하고, 그 기술을 회사에 알리지 않은채, 오로지 자신의 저녁시간을 확보하는데 사용했다. 손시정은 아침 9시까지 서울 상암동 소재 연구실 주차장으로 가서 차량을 가동시키고, 그날의 일정에 따라 자율주행을 실험하였다. 그렇게 실험을 하다가 오후 4시정도가 되면 파주에 있는 자신의 전원주택(고스트OS를 개발한 후에 이사온 곳이다)으로 돌아와 자신이 좋아하는 과테말라 커피를 융천에 내려마시고, 향긋한 입욕제를 넣고 목욕를 한 후에 팬티바람으로 알파차량으로 돌아갔다. 약 30분 가량 알파차량의 알파OS를 자신의 고스트OS로 덮어씌우고, 차량을 연구실 주차장으로 돌려보내면 일과가 마무리되었다. 오후시간은 고스란히 그의 것이었다. 그는 온라인게임을 하면서 여유를 즐겼다. 그는 다음날 9시까지 버스를 타고 다시 연구실 주차장으로 돌아가 차량을 가동시키고, 고스트OS를 다시 알파OS로 덮어씌운 후 하루를 시작했다. 


손시정은 그의 회고록에서 “기술발전에 따른 혜택을 자본가의 몫으로만 귀속시키는 것은 불합리하다. 기술발전은 노동자의 노동시간의 단축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일기장에 적었다. 고스트OS는 그를 ‘자본가’로 만들어주기에 충분한 것이었지만, 그는 바쁜 자본가가 되기 보다는 여유로운 노동자가 되기로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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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모든 여행은 결국 고스트OS에 무임승차를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게 그에게 시간을 줬다. 차.


그래서 실용음악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오구연을 만났다. 차가운 피부, 곱슬머리, 사랑을 나눌 때면 온몸을 떨었다. 


욕조 속의 물고기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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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의 연구원들은 감정절차에 대략 1년반정도 걸릴 거라고 예상했다. 물론 그건 예상에 불과했지만. 실제로 정말 얼마나 걸릴지는 모를 일이다. 1년반이 지났을 무렵에도 이 주제는 연구원들의 안주거리였다.


중요한 건 그점이다. 세기의 재판이 술자리 소재로 전락 했다는 것.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도 몇개월이 흐르자 희미 해져간다. 감정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다시 유행병이 한번 돌고 나서 회사는 최초의 완전 자율주행 차량인 알파C1을 성공적으로 출시한다. 


김민주 사건이 영향을 미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대중을 설득하는데 필요한 건 논리적 결론이 아니라 태도였다. 회사가 거금을 들여 오직 감정만을 위해 감정소를 짓고(30억원 밖에 들지 않은 건 비밀), 세계적인 스타인 손시정을 감정인으로 모시고(감정료가 헐값이라는 것도 비밀), 유례가 없는 감정절차를 시작한 것이 여론에 잘 먹혀 들어간 것이다. 국내외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은 물론이었고, 회사가 그렇게 공들여 준비해둔 계율은 자연스럽게 여론에 홍보되었다. 계율에 대한 특집기사가 쏟아지고 회사의 후원을 받은 언론과 유투버들이 침을 튀겨가며 계율을 찬양한다. 자동차, 철학, 정치, 법률, 심지어 영화나 게임 유튜버들도 이 핫이슈에 대해 떠들어댔다. PR담당은 언론사 사장들과 승리를 자축하며 잔을 들어 올린다. 그간 기자놈들에게 먹여온 것이 마침내 빛을 발한 것이다.


“계율은 인류가 만들 수 있는 윤리의 최선”이라는 홍순기 이사의 발언은 포털사이트 1면에 탔다. 물론 그 옆에는 홍순기 이사가 아닌 정우령 회장의 비전으로 가득찬 듯한 거의 신격화된 얼굴 사진이 붙어있다. 단순한 재벌3세가 아닌 스타경영자 정우령. 이른바 ‘알파법’이 국회에서 통과된다. 예약대수는 50만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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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빠른 소비자인 김학모 역시 대만 산림 속에 있는 료칸에서 알파C1을 예약했다. 와이파이가 좋지 않다고 투덜거리면서. 언제 한국으로 돌아갈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일단 지른다. 


어차피 예약대수가 너무 많아 빨리 인수 하지는 못할 게 뻔했다. 하지만 너무 따분해서 차라도 사지 못하면 미칠 지경이었다. 매일 반복한 목욕으로 몸은 풀어질 데로 풀어졌고 마사지는 이제 지루하기만 했다. 테라스에서 내려보던 기막힌 경치는 이제 익숙한 병풍 같다. 음식은 지나치게 달았고, 영화는 지루하다. 테라스에서 비나보며 술을 한 잔 하는게 유일한 낙이였으나, 술상대가 없으니 지루하기는 매한가지. 


처음엔 지나치게 저자세 였던 료칸 주인도 비싼 료칸에서 한달이나 묵은 김학모를 수상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비용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여론이 악화 되기전만해도 ‘인중모’로 몰려들어온 후원금이 상당했고, 이규 박사는 ‘살인기계의 첫 피해자의 유족’이 고생을 해선 안된다며 거액의 대만 체류비를 대납해준데다가 후원금 일부를 위로금조 쥐어줬기 때문이었다. 고인겸이 약속한 50억은 아니지만 어렵지 않게 몇억은 손에 쥐게된 것이다. 그 점은 큰 불만이 없었다. 다만 묘하게 유명인사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처지가 된 것은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별거없이 영월이 그리웠다. 틈만나면 돈을 빌려달라는 술친구들. 노름판. 노름판 위에 던지는 주사위, 카드, 칩들. 김학모는 끝내 반쯤 미쳐서 타이베이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마카오로 넘어간다. 그리고 거기서 남아있는 후원금을 탕진한다. 


“김동지님, 우리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결국 기존 제도권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는 이제 일을 하러 국회로 가려고 합니다. 진짜 일 말입니다! 김동지님도 김동지님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주세요!” 


그러니깐, 정리하자면, ‘김학모 화이팅’. 


이제 그 그립던 영월 점집 말고는 달리 갈곳이 없었다. 김학모는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그는 공항에서부터 마치 유명 연예인처럼 모자를 눌러쓰고, 커다란 선그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입국했다. 그리고 아무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세상은 다른 일들로 충분히 시끄러웠다. 북한에 새 정권이 들어서면서 동아시아권 정세가 어수선했고, 백신접종으로 시끄러웠고, 선거철이였으니 누가 투기를 했느니 막말을 했느니 세상은 언제나처럼 어수선했다.


“할 수 있는 건 이미 다했습니다. 감정결과 기다려야죠.” 사실 고인겸 변호사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다.

김학모는 영월로 돌아가는 길에 영등포 일대를 들러 사기행각을 펼쳤다. 마카오의 술집에서 들은 수법이였다. 그는 행인에게 접근해서, 자신이 무속인인데(이 부분은 놀랍게도 거짓이 아니었다),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아들이 죽는다며 피해자에게 겁을 주고, 재앙을 피하려면 현금을 가방에 담아 가로수에 3일간 걸어 놓으라고 충고했다… 그리고 (왜인지는 알기 어려운 노릇이지만) 피해자가 겁을 먹어 시키는대로 현금을 담아 가방을 가져다 놓으면 그 가방을 가로채는 수법으로 현금을 가로챘다. 이미 십수년간 유행했던 수법이었으나, 피해자는 언제나 새롭게 나타난다.


 “내가 회사한테 50억원 받을 게 있거든요. 그거 받으면 피해자한테 돈도 돌려주고 정말 반성하겠습니다…” 김학모가 판사에게 애원했다. 


“피해자로부터 훔친 8,000만원은 어디에 썼습니까?” 재판장이 물었다. 


“강원랜드에서 도박으로 탕진했습니다.”검사가 대신 대답했고, 김학모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인겸은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인중을 누른채 고개를 숙였다. 검사는 김학모에게 징역 10년을 구형했다. 김학모는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제는 서울남부교도소에 수감된 채로 50억원을 기다리게 되었다.


“어쨌거나 몇 년 걸리겠지. 출소하면 받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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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재판장인 명예원의 예측이기도 했다. 김학모의 소식을 들은 명예원 판사는 김민주 사건은 재껴두고 다른 사건들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춘천지방법원 영월지원 2030가단1245호 사건은 명예원 판사가 갖고있던 가장 오래된 사건이었다. 처음 영월지원으로 부임받았을 때 배당받은 사건임에도 아직도 미제. 사건이 이리도 길어진 마당에 자신이 이 사건의 판결문을 쓰게 될 일이 없을 것이다. 아마 재판장으로서, 감정명령을 내리는 것까지 내리는 것이 그녀의 임무일 것이다. 왜인지 모르지만 이 사건의 판결문을 읽게 될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2032년도 2월 인사시즌을 앞두고 서울서부지방법원으로 전출을 희망한 상태였다. 영월 생활이 싫었던 건 아니지만 이미 몇 년이나 주말부부로 지내는 것에 신물이 나있었다. 


자신이 판사라는 것이 더 없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서울로 발령나면 감정소가 있는 고양시 망월산으로 등산을 가볼까. 그 감정소를 그녀가 짓게한 것이다. 


그녀가 김학모 사건을 다시 꺼내것은 전출 희망서를 내기 2달전이었다. 관례상 다시 서울이나 수도권으로 전출될 터였다. 명예원은 몇주에 걸쳐 김학모 사건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고, 자신의 검토사항, 심증을 상세한 보고서 형식로 남겨두었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감정사항에 대한 요약과 정리였지만, 가장 시간이 들어간 부분은 감정소의 관리 규칙이었다. 고생을 많이 하긴 했지만 보고서를 끝내고 나니 더없이 게운했다. 후임자에게 이 정도 인수인계면 충분할 것이다. 이것으로 김학모 사건은 그녀의 손을 떠날 것이다.


그녀의 마음 한켠에 영원한 자긍심을 남겨두고. 


2월말에 석응답 지원장이 그녀를 불러 전출희망이 부결되었다는 걸 알려줬다. 고등법원 부장으로 승진하여 전출되는 석응답 지원장이 그녀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었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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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이 언제 끝날지 대략적으로 예상할 수 있었던 사람은 감정인 손시정 뿐이다. 그리고 이제 이 일을 진지하게 여기는 사람도 그 뿐이었다. ‘세기의 재판’이라던 재판은 사실상 잊혀졌고, 그때의 흥분은 사라졌다. 남아 있는 것은 30억원 짜리 빈건물에 남겨진 잊혀진 사람, 잊혀진 스타, 잊혀진 감정인. 회사에서 형식적으로 보내던  확인 메일도 해가 바뀌면서 담당자가 바뀐 것인지 더 이상 오지 않는다. 그는 잊혀진 사원을 지키는 사제처럼 자리를 지키고,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신학’을 연구한다.


손시정은 감정소 인계를 받은 날부터 감정소에 입주해 감정절차에 필요한 사항들을 점검해 왔다. 감정인의 감정소 입주가 법적의무는 아니었지만 그 대안은 매일 약 한시간이 걸리는 감정소 출입절차였다(이제 신경쓸 사람도 없겠지만).  법원관계자의 입회하에 진행되는 절차였기 때문에 이들의 이동시간까지 감안하면 소요시간은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었다. 보안에 대한 회사의 요구는 아주 엄격한 것이었는데, 거액을 들여 감정소까지 지은 회사의 요구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법원은 회사에 요구대로 출입 프로토콜을 지정했다. 감정인이 만일 외출을 원한다면 현관문에 달린 도어벨을 누르면 된다. 그러면 최장 30분내로 관계자들이 달려올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입회하에 지루한 절차를 거쳐 외출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프로토콜은 한번도 활성화되지 않았다. 어디로 갈 이유도, 누군가를 만날 이유도 없었다. 외부로의 통신도 사실상 끊어져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연락 할 수도 없었지만, 어차피 연락할 일도 없었다. 


“어쩌면 난 이미 죽어 있고, 여긴 저승같은 곳이 아닐까?” 혼잣말만 늘어간다.


식료품이나 음식 같이 생필품은 스캐너가 설치된 통로를 통해서 배송되었다. 원한다면 배달을 시켜먹을 수도 있었지만, 원래 요리하는 취미가 있던 손시정에게는 요리시간은 길고 지루한 하루 일과 중에 얼마 안되는 휴식시간이었다. 이 감정소의 가장 큰 장점은 회사가 특수제작한 인간형 자동청소로봇이 설거지를 처리해준다는 점이었다.


자동청소로봇, ‘미관’상 머리가 설치되어 있다. 손시정은 머리에 그려진 패턴이 웃고 있다고 상상한다. 보안 이유로 회사는 심지어 청소도 특수제작한 자동청소로봇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설계했다. 그런데 자동청소로봇의 손길이 인간만큼 섬세할 수 없는 노릇이어서 손시정이 어질러놓은 감정소를 다 청소할 수는 없었다. 


대부분 시간을 감정소에 보내던 감정인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혼자 자동청소로봇과의 대결(?)을 펼쳤다. 청소로봇이 도저히 청소할 수 없는 곳에 쓰래기를 하나둘씩 숨겨둔 것이다. 그래서 감정소 내부는 주인이 조금씩 구석구석에 숨겨둔 쓰래기들이 뿜어내는 악취로 가득차게 되었다. 손시정은 그 악취를 “인간승리의 냄새”라고 자평하며 희희낙낙했다가, 악취가 심해져서 손수 그걸 치워야 했다.


감정소의 생활은 나름 만족스러웠다.


가장 시급하고, 무엇보다 그가 가장 관심을 갖었던 부분은 ‘공부’였다. 감정절차의 공정성을 위해 피고 측에 연락을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손시정은 부득이 혼자 교과서를 탐독하면서 망각 속에 묻혀있던 지식을 끌어올려야 했다. 가수로 전업하기 전에는 이미 십여년간 해온 공부였기 때문에 공부하는 것 자체가 힘들지는 않았다. 주된 공부는 알파개발에 쓰였던 프로그래밍 언어인 ‘트롤러’를 다시 익히는 것과, 트롤러 언어로 작성된 몬테카를로 트리 탐색 알고리즘을 다시 익히는 것에 집중되었다. 가우재가 개발한 데이터 복구 프로그램의 사용법을 익히고 이해하는 것도 일이었다. 손시정은 가우재의 천재성에 감탄을 멈출 수가 없었다. 공부는 즐거운 일이었다. 다시 무언가를 익힌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것을 익히고 나자 더 이상 어떻게 접근해야갈지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스트레스도 풀겸 때때로 인터넷상의 개발자 커뮤니티에 접속해 토론글을 보면서 공부할 정보를 취합하려고도 했지만 큰 도움이 되진 않았다. 


전인미답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직감과 분별력이다. ”나에게 그런 자질이 있을까?” 작곡과는 또 다른 부분이었다. 어둠 속에서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어떻게 알아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무얼해야 하는지에 대한 아무런 확신도 없없다. 


그러나 그게 싫지만은 않았다. 일정 부분 거기서 위안을 얻기도 했다. 어둠 속에 떠있는 질문. 알파. 그 질문이 그의 생각을 단순하게 한다. 그 질문을 쫓는 동안만은, 엉망진창인 삶을 돌아볼 필요가 없다.


그 질문을 중심으로 짜여진 그의 생활에는 ‘질서’라는 게 있었다. 


손시정은 온종일 책상 앞에서 목이 뻐근해질 때까지 공부를 하다가, 감정소 옥상으로 올라가 캠핑의자에 앉아 30분동안 낑낑가리면서 힘겹게 내린 커피를 마시거나, 숲을 향해 기타를 치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손시정은 가끔가다, 모종의 의무감에서, 스스로 냉혈한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대상도 없없지만, 증명하기 위해서 아내였던 오구연과 잃어버린 딸에 대한 노래를 만들곤 했다. 그는 숲을 향해 크게 노래하는 것이 어쩐지 부끄러워, 거의 웅얼거리 듯이 노래했다. 웅얼거리다가 울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그런 짓을 반복할 수록 무덤덤해질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빠르게 침착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내심 놀라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 겨울이 되었다. 긴 가을을 보내면서 어느정도 방향을 구상하기도 했다. 이제 그의 구상을 시도해볼 때가 된 것이다. 그에게 임무에 적합한 직감과 분별력이 있는지 확인할 시간이 온 것이다.


감정인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말 오랜만에 다시 ‘계율’의 첫장을 열어보았다. 


2030년도 당시 ‘계율’의 내용은 이미 수백차례에 걸쳐 크고 작은 수정을 거친 상태였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2030년도 기준 계율이었다. 계율은 그가 현직에 있었을 때와 비교해서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것은 계율의 성격에 비추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계율’의 주요부분을 이루고 있는 윤리판단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였다. 그것은 개발 및 실험과정, 데이터 수집과정에서 맞닥뜨린 딜레마들에 의해 끝없이 시험되어왔고, 그때마다 계율의 내용은 수정되거나 강화되어 왔다. “몽상” 속을 떠도는 알파의 질문이 던져질 때마다 계율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검토되었다. 39번동안 그 과정을 거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지속적인 수정을 거쳐, 마치 벽돌을 쌓아가듯이, 거대한 윤리의 도그마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한계는 끝없이 시험되어 왔고, 도전되어 왔다. 


계율은 단순한 윤리학적 논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실용적인 목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끝없는 수정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일례로, 계율의 구현이 프로그래밍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경우도 있었다. 윤리학자들은 이를 ‘윤리적 행동의 실현불가능한 한계’라고 불렀는데, 이 ‘한계’는 알파OS가 개발 되어가고, 알고리즘의 복잡성과 정합성이 증가함에 따라 점점 뒤로 물러났다.


계율의 작성자들은 그 한계가 확장됨에 따라 더 많은 가정적 상황들을 고려해야 했고, 윤리적인 이상을 위해서 ‘한계’는 가능한 적어야 했기 때문에 일단 계율이 새로이 쓰여지면 개발팀은 머리를 쥐어짜며 알파OS의 알고리즘이 수정해야 했다. 프로그래머들은 계율이 제시한 특정한 윤리적 결정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다시 당초에는 예상치 못한 딜레마가 나타나기도 했는데, 계율은 이때마다 개발자들로 하여금 다시 윤리자문사들과 변호사들에게 자문을 구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한계’가 뒤로 물러나는 것은 새로운 ‘윤리적 행동’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 행동의 가능성에 대한 계율의 판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알파OS의 발전이 계율의 수정을 불러오기도 했고, 반대로 계율의 발전이 알파OS의 수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수정된 계율과 알파는 몽상 속에서 새로운 질문을 던질 때마다 그들은 이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2030년도 계율은 회사를 대리하던 고인겸 변호사의 손에 의해 법원에 제출되었고, 이제 그 계율이 손시정의 손에 전달된 것이다. 고인겸 변호사가 피고로서 제출한 답변서에는, 회사가 이와같이 완전무결한, 심지어 자기수정의 매커니즘을 갖고 있는 계율에 근거하여 알파를 개발하였기 때문에, 알파OS를 탑재한 차량에 의해 사고가 발생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시대상황에서 ‘가장 윤리적인 결정’에 해당하기 때문에 회사에게 그 사고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알파OS는 인류가 오늘날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성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회사가 나중에 많이 써먹었던 구절이었다.


고인겸 변호사가 ‘원고 대리인’으로서 제출한 감정신청서에는 위 구절에 대해서는 3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첫번째, 과연 ‘계율’이 윤리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윤리레버의 조정에 따라 계율은 운전자를 살리기 위해 다섯명을 죽도록 결정하고 있다. 그리고 계율은 ‘비열하게도’ 그 책임을 운전자 개인의 윤리적 책임으로 돌리고 있다(손시정은 이 대목에서 뜨끔해한다).  윤리레버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나쁜 알파”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과연 윤리적으로 중립적인가. 과연 ‘계율’은 알파OS가 마주칠 무한히 많은 윤리적 딜레마에 대해서 모든 준비가 되어있는가.


둘째, 설령 ‘계율’이 윤리적으로 완전무결하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계율’의 내용이 알파OS에 그대로 반영이 되었는지 알 수 있는가. 


셋째, 설령 알파OS가 계율의 내용을 완전히 반영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알파OS가 언제나 그 내용을 완전하게 구현할 수 있는가. 프로그램 상의 오류가 없다는 것을 장담할 수 있는가.


고인겸 변호사는 김민주 사건의 발생 자체가, 적어도 두번째, 세번째 회의에 대해서는 상당한 근거가 된다고 논증하였다. 아무런 위험도 없는 상태에서 차량 스스로 절벽을 향해 뛰어들어 탑승자가 사망하였는데, 그것이 어떻게 윤리적 결정이 될 수 있는가. 도대체 절벽으로 뛰어든 알파OS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무슨 ‘윤리적 판단’의 결론이 김민주의 사망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즉, 김민주는 왜 죽었는가?


다시 그 오래된 질문으로 돌아 온다. 


결국 김민주를 사망으로 이끈 알파OS의 일련의 생각들(그것이 철학적으로 허용되는 표현이라면)을 정리하라는 것이 질문의 핵심이었다.


손시정은 천천히, 그에게 주어진 권능과 여유를 즐기면서 업무에 착수했다. 알파OS를 이해하고, ‘그’가 도출한 결론의 논리적 흠결을 검증하는 것.


2030 계율이 알파OS에 구현되는지 확인하는 과정은 어렵지는 않았으나, 다분히 지루한 것이었다. 그는 우선 알파OS가 계율을 구현한다는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의 오류가능성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검증을 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계율의 주석’이 큰 도움이 되었다. 계율의 주석은 윤리자문사들이 가상적인 딜레마를 만들기 위해 세워놓은 일련의 상황들과, 계율의 적용할 경우에 그러한 딜메마에서 이루어져야할 알파의 판단들과 그 근거를 모아놓은 것이다. 


손시정은 알파OS에게 주석에서 제시한 상황들을 제시하였고, 알파OS가 주석에서 나타난 논리과정과 결론과 똑같이 판단하는지 검증한다. 이른바 ‘모델검증’ 방법이었다. 문제라면 그러한 ‘주석’들이 거의 8만개에 달한다는 것이었다. 감정소에 있는 고성능 컴퓨터들은 알파OS가 특정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내릴지 시뮬레이션을 수분안에 해낼 수 있었지만, 문제는 알파OS에게 그러한 상황을 ‘제시’하는데 있었다. 


이 부분은 손시정의 손가락 끝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약 5천개의 상황을 제시하였을 무렵에 손시정은 도저히 이렇게는 일을 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2개월동안 문제상황을 시뮬레이션 장치에 쉽게 입력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그리고 다시 2개월 동안 검증절차를 거친 끝에 손시정은 알파OS가 계율을 구현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계율과 알파OS의 발전과정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론이었다. 손시정 스스로도 회사가 이미 내부적으로 이와 같이 기초적인 검증을 마쳤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 하긴 해야 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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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알파OS의 오류가능성을 검증해야 했다. 오류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오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프로그램 내부적으로 낭비되거나 모순되는 내용이 있는지를 검증하는 자동검증 시스템은 이미 알파OS의 일부로 탑재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감정의 속도를 올리기 위해 상당한 양의 매크로와 오토메이션 프로그램을 손시정에게 제공하긴 했지만 그건 코드의 건정성(soundness)을 검증하는데 도움이 될 뿐이었다. 그러나 법원의 질문은 그것이 아니었다. 법원은 알파OS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오류없이’ 계율을 구현하는지 묻고 있는 것이었다. 


이 작업을 구상하는데 6일이 걸렸는데, 7일째 되는 날 손시정을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알파OS는 무한히 많은 변수에 노출될 것을 전제하고 있는데다가, 이러한 변수들에 대비해 심층 Q-네트워크를 통해 알고리즘을 구현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알파OS의 오류없음을 검증한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넌센스였다. 통제되지 않은 환경에서 발생한 특정 상황에 대해서는 알파OS가 내리는 판단이 오류인지 오류가 아닌지 도대체 누가 판단한단 말이며, 그러한 판단이 언제나 오류가 아니라는 점을 어떻게 판단한다는 말인가. 


어떤 존재의 지적능력과 판단이 인간의 그것보다 뛰어나다면, 인간은 그 존재의 판단의 옮고 그름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그 존재보다 더 뛰어난 존재를 만드는 방법 이외에는 없었다. 손시정은 다시 한달 정도를 고심한 끝에 이와 같은 검증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오류가 없는 판단’을 사전에 보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오류’라는 것은 계율과 다른 결론을 이야기하는데, 계율에 대한 해석능력만 두고보자면 인간이 알파OS보다 뛰어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허용된 것은 알파OS가 내린 결정에 대한 사후적인, 가치론적인 논의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검증해야 할 것은 김민주가 탑승하였던 알파차량에 탑재된 알파OS가 ‘오류’를 저질렀는지 여부다. 한가지 걸림돌은 알파차량이 불에 타고 소금물에 젖으면서 알파OS를 저장하고 있던 물리저장장치도 일부 훼손되었다는 점이었다. 이 부분은 가우재의 데이터 복구 프로그램을 이용할 것이다. 과연 실제 그녀의 장담처럼 차량 내부 메모리는 98.4%까지 복원되고, 실제 동일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범위는 91.33%로 확인될지 지켜볼 일이다. 


실패할 수도 있지만, 손시정은 이를 큰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고차량에 있는 OS가 알파OS라는 점만 입증하면 그냥 다른 알파OS 0.983을 이용해 몽상에서 그 상황을 재현해서 검증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같은 OS라는 점은 복원된 코드를 비교 검증하는 것만으롣 충분할 것이다.


그러면 사건 당시 알파OS의 ‘생각’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 김민주가 죽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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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증불가능성에 대한 보고서’를 마친 손시정은 자신의 ‘감정소 생활’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였다. 손시정은 두번째 감정보고서를 법원에 제출하고, 그는 법원실무관에게 이제 곧 감정절차가 마무리될 것 같다는 취지의 이메일을 보냈다. 손시정은 처음으로 일련의 출소절차를 거치고 감정소를 나와 클래식 GX를 타고, 김민주가 달렸던 길을 따라 정동진을 향해 달려갔다. 정동진 앞 바다에서 그는 잃어버린 딸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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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시정은 사고차량에서 회수한 저장장치를 컴퓨터를 연결하고, 녹음장치를 켜고 OS의 복원을 시도하였지만 너무 많은 데이터 손실로 복원이 불가능했다. 가우재의 복원 프로그램을 가동하자 정말로 98.4%까지 복원이 이뤄졌다. 손시정은 그 데이터를 소스코드로 변환하고, 그 내용이 알파OS의 소스코드와 일치한다는 점을 입증하려고 했다.


쉽게 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계속해서 불일치가 발생했다. 손시정은 짜증을 삼켜가면서 불일치가 발생하는 원인을 찾아나갔다. 그는 왼쪽 모니터에는 회수파일의 소스코드를, 오른족 모니터에는 원본 알파OS의 소스코드를 띄워놓았다.


“이거 어디서 부터 시작해야 하나….”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왜 안되는거지?”


간단한 일을 빨리 마치지 못해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손가락에 묻어난 땀때문에 키보드가 잘못 눌리는 것도 짜증 나는 일이다. 키보드를 바꿀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때 눈 앞에 딸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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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시정은 잠시 눈을 감고 환영이 없어지기를 기다린다. 영원같던 30초 쯤이 지나고 눈을 뜬다. 그 자리에는 당연히 아무것도 없다. 떨리는 손을 키보드에서 땐다. 물을 마신다. 다시 키보드에 손을 올린다. 


하지만 키보드는 눌리지 않는다. 손시정은 왼쪽 모니터로 눈을 돌린다. 그는 찬찬히 코드를 읽어간다: 5분정도가 지나자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의문이 풀린다. 


잊혀진 신전의 사제는 마침내 결론에 도달한다.


손시정은 살면서 수많은 코드를 다뤄왔지만, 자기가 만든 코드만은 절대 잊거나 혼동하는 일이 없다. 왼쪽 모니터에는 그가 수년전에 만들었던 고스트OS의 소스코드가 펼쳐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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