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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인중당’은 1.14%의 정당득표율을 기록한다. 이규는 이를 두고 “기계화 세상에 맞선 인간혁명의 시작”이라고 자평했지만 결국 인중당에서 배출된 국회의원은 한 명도 없고, 국가보조금은 토해내야 할 처지였다. 이규 박사의 성명을 진지하게 실은 언론은 ‘오토리뷰’라는 자동차잡지 한 곳 밖에 없다. ‘이런 정당도 있어요’라는 짧은 소개. 이규는 여전히 ‘화제의 인물’이자 웃음거리였고, 인중당을 진지한 정당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이규가 무관심에 대한 분노를 토해낼 곳은 유튜브 채널 밖에 없었고, 이규의 유일한 수입 역시 유튜브 채널 밖에 없었다.
세상은 보다 잘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관심은 오래기간 동안 다수당으로 군립해왔지만 총선에 참패하면서 100석도 건지지 못한 선진당에게 쏠린다. 관심은 새롭게 제1당으로 올라선 자유민주당을 승리로 이끈 허주용 대표에게 대표에게 쏠린다. 그해 말에 열릴 대선에서 허주용 대표가 승리할 것인가? 하지만 ‘질주의 역사’를 논함에 있어 2032년도 총선에서 있었던 가장 중요한 사건은 인중당의 ‘쾌거’도, 정권의 행방도 아니다.
선진당에서 3선의원을 지낸 원희태 의원은 특별히 눈에 띄는 의원이 아니다. 자신의 지역구인 ‘평택-을’에서는 알아주는 지역인사였지만 3선이나 지내면서 당에서 최고의원은 커녕 대변인 한번 지내지 못한, 국회의원이 직업이라는 것이 특징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원희태 의원이 12년이나 의원직을 유지한 비법은 지역구에서 열리는 모든 결혼식과 장례식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그 외에도 아무튼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온갖 행사에 참여하고, 정권의 행방에 따라 민감하게 식사자리를 고르고, 가장 적당한 자리에 앉아 가장 적당한 술을 가정 적당히 따르는 가장 적절한 처신에 있다. 선진당의 거듭된 실정으로 총선패배는 이미 기정사실이었지만 원희태 의원만은 아무런 걱정이 없다. 12년동안 지역구에 축적한 인맥, 축의금만 몇 억원은 썼을 것이다. 모나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정적도, 안티도 없다. 지역지지기반이 공고하니 특별히 공천을 신청하는 양반도 없다. 상대후보는 줄을 잘못서다 ‘사지’로 몰려 나온 비서관 출신 39살 풋내기였다. 원희태 의원은 보좌관이던 유인호의 어깨를 툭치면서 말한다: “상대후보가 자네랑 동갑이네. 자네도 어여 뺏지 달아야지.”
유인호는 보좌관들 사이에서도 유능하고 야심차고, 마당발로 유명했다. 특히 보좌관들 사이에서 명성을 날린 것은 국회에 몸사태가 일어날 때마다 그가 보여줬던 무지막지한 전투력이었다. 소싯적부터 취미로 해온 이종격투기가 커리어에 큰 도움이 된 케이스라고 하겠다. ‘선진당 깡패’로 유명한 유인한.
그런 그가 무사안일에, 줄 잘서는 것만으로 3선까지한 원한태 의원 밑에서 일하는 게 된 것은 그가 ‘평택-을’, 즉 ‘송탄’이라고 불리는 지역 출신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참지 못했던 것은 원희태 의원의 무능함이 아니라,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의 ‘차례’가 아니라, 술만 먹으며 (보좌관에게만) 터져나오는 나리님의 주사였다. 며칠동안 원의원과 술자리를 갖고(선거기간동안인데도 원의원 캠프에는 아무런 긴장감이 없었다), 유인호는 선거사무실에서 다른 신참 보좌관들,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송탄지역 유권자들에게 밤낮으로 무작위로 유세전화를 돌렸는데, 그렇게 전화를 받은 사람 유권자 하나가 하필 유인호의 신경을 건드린 것이 화근이었다.
스팸전화에 진지하게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다. 유인호의 전화를 받은 송탄지역 유권자, 21살의 대학생 박새론이 유인호에게 “원희태 의원님이 자율주행자동차에 대해 어떤 정책적 비전을 갖고 있는지 궁금합니다.”라고 물었고, 유인호는 다소 당황한 말투로 “뭐…. 자율주행자동차…. 미래 먹거리, 일자리를 위해서는 반드시 추진해야 합니다….”라고 얼버무리려 하자, 박새론은 이어 “원희태 의원님은 국토교통위에 소속되어 있는데 명확한 비전이 없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과연 진정한 의미의 정책선거를 할 수 있을까요?”라고 따져 물었다.
유인호는 매뉴얼대로 “네…. 자세한 정책은 공약집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기호 1번 원한태, 꼭 한번 밀어주십쇼!”라고 말하고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으나 하필 눌리질 않았고, 통화가 종료되었다고 생각한 유인호는 혼잣말로 “뭐 이런 미친새끼가 다있어…. 술주정뱅이 원균놈 때문에 별짓을 다하네….”라고 중얼거리고 만 것이다. 깨어있는 시민 박새론은 그 내용을 녹취해서 인터넷에 올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원희태는 인터넷에서 ‘원균놈’이라고 일종의 ‘밈’이 되면서 조롱거리가 되었다.
당초 예상과 달리 선거는 박빙이었고, 12년동안 공든 탑은 한순간에, 너무나도 간단하게 무너졌다. 실언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정확히 알길은 없지만 좋은 영향은 아니었을 것이다. 원 의원은 낙선했고, 유인호는 보좌관직을 잃었다. 의원보좌관들의 경우 모시던 ‘영감’이 낙마하더라도 보통은 같은 당의 초선의원들이 갈 곳 잃은 보좌관들을 데려가는 경우가 많은데, 선진당이 참패했으니 일단 초선의원도 몇 명 없었고, ‘영감’을 격추시킨 유인호를 보좌관으로 쓰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언젠가 ‘원균놈’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국회의원을 하겠다는 유인호의 야심도 그렇게 한 순간에 무너졌다. 보좌관으로 일한지 10년만의 일이었고, 결혼한지 5년만의 일이었고, 첫 아들이 태어난지 3년만의 일이었고, 둘째 아들이 태어난지 10개월만의 일이었다.
상실감에 빠져있을 여유조차 없이 유인호는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집어 넣었다. ‘제2의 출발을 준비한다’고 말하기에는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에 자기소개서를 쓰고, 며칠간 이력서를 정리하면서 자신이 몇년도 몇월에 어떤 고등학교를 나왔는지, 어떤 대학교를 나왔는지 반추해가며 시간을 보냈다. 유인호의 SUV차량에는 보좌관 생활을 하면서 정리해온 수많은 입법관련 자료들이 쌓여 있었다. 금방 다시 보좌관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서 자료를 버리지 못했고, 그렇다고 말썽쟁이 아들 둘이 있는 집으로 가져가기에도 적당하지 않았다. 유인호는 그 자료들을 차량 뒷칸에 실고 면접을 보러다녔다. 어디 둬야할지 애매했던 자료들처럼, 세상에서 다시 그의 자리를 찾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선진당이 아닌 자유민주당 측 의원들에게도 이력서를 넣었고, 심지어 소속의원이 3명뿐인 진보당 의원들 쪽으로도 이력서를 넣었다. 그 소식을 들은 동료들은 그가 ‘깔끔한 퇴장’을 모른다며 혀를 찼다. 퇴장해도 인생과 생계는 계속된다는 것을 모른다는 듯이.
사실 끈이 떨어진 보좌관에게 가장 적당한 자리는 기업의 대관업무팀이었다.
정치적 야심으로 가득찼던, 자존심 높은 유인호에게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지만, 자존심을 굽히면 돈은 확실히 되는 일이다. 그 동안의 박봉을 보상하고도 남을 만한. 유인호는 2032. 5. 2. 정오에 한강공원에 차를 세우고 트렁크에 쌓인 입법 관련 자료들을 한장씩 꺼내, 과거 유학 당시 그랬던 것처럼, 서류 종이에 담배잎을 말아 피웠다.
신강변북로에는 정체에 갇힌 차들이 하수구에 흐르는 물처럼 천천히 지나가고 있다.
차마 이력서를 내지 못하는 곳은 ‘회사’였다. 국통교통부 3선의원의 보좌관 노릇을 하면서 온갖 ‘갑질’을 해댄 상대.
그때는 그의 권세가 그렇게 짧은 줄은 몰랐다. 권세라고 할 수 있다면. 하지만 지금 그가 갈만한 곳은 회사 뿐이었다. 두 시간 동안 줄담배를 피우고 유인호는 회사의 홍순기 상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홍순기 상무는 달라진 지위를 의식하지 않는다는 듯이, 여전히 유인호를 ‘작은 영감님’이라고 호칭하면서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그러면서 상무는 유인호에게 오는 금요일에 회사 1층 카페에서 커피라도 한잔 마시자며 자연스럽게 자리를 마련했다.
유인호는 금요일 아침부터 10번이나 넥타이를 고쳐맸다. 그건 좋은 선택이었다. 그가 회사로비에 들어서자 안내직원들은 그를 1층 카페가 아닌 대회의실로 안내했고, 거기엔 홍순기 상무 뿐만 아니라 정우령 회장도 앉아있었다. 거기까지 올라가는데 넥타이를 고쳐맬 시간도 없었다. 그들의 넥타이에는 넥타이 핀이 꽂혀있었다. 대회의실 창문너무에는 장엄한 바다의 모습이 보였다. 당시 유행하던 ‘스크린 윈도우’으로, 가상의 풍경을 창문처럼에 띄워주는 스크린이었다. 그는 잠시 그 가상이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잃었다.
커피가 아닌 티백녹차가 든 종이컵이 회의실 책상에 놓여있었다. 홍순기 상무는 더이상 유인호를 ‘작은 영감님’이라고 호칭하지 않았다. 그는 정확하고, 예전같지 않은 조용한 어조로 ‘유인호씨’라고 호칭했다. 그는 “10년 후의 자신의 모습이 어떨지 말씀해주세요.”, “자신의 성격적인 장점과 단점이 무엇인지 말씀해주세요.”등 면접자리에서 흔히 물어보는 그런 시시껄렁한 질문들을 던졌다. 괴롭히는 걸까? 질문 중에는 “왜 이직을 하시게 되었나요?”라는, 다소 짖궂은 내용도 있었다. 정우령 회장은 홍순기 상무 옆에 앉아 무심하게 자신의 핸드폰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다 상무가 ‘면접’을 마쳤다고 말하자, 정우령 회장은 핸드폰을 회의실 책상에 올려두고, 자신의 넥타이핀을 만지작 거리면서 물었다.
“각오가 대단하시네, 회사를 위해서라면 악마라도 될 것 정도야.”
회사를 위해서 악마가 될 사람은 ‘회장’ 뿐일 것이다. 하지만 가족을 위해서 악마가 될 사람은 지천으로 깔려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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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은 김학모는 그날 당장 법원에 항소장에 제출했다. 김학모는 당연히 고인겸 변호사가 자신의 항소심 변론을 맡아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세상사는 그의 생각만큼 순조롭지 않다. 고인겸은 김학모에게 항소심 판사에게 밉보이지 않으려면 가급적 사선변호사보다는 국선변호사를 쓰라는 둥 핑계를 대면서 변론을 맡지 않으려고 애썼다.
애초에 제1심을 맡은 것도 이규의 부탁때문에 무료로 봉사한 것인데, 총선결과가 나온 이상 이규도 이제 끈 떨어진 삼류 연예인/유튜버에 불과했다. 고인겸 변호사는 김학모에게 착수금 지급 없이는 절대 변론을 맡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김학모는 그런 고인겸에게 “아! 고변호사님, 50억 받으면 반 때준다니깐요? 우리 쌀점본거 기억안나요? 승소라고 승소!”라며 오기를 부렸다. 고인겸 변호사는 난감하게 웃을 뿐이다. 접견실을 떠나면서 그는 작게 주먹을 쥐어보이며 말한다: “김학모 화이팅.”
김학모는 인중당 이규 총재에게 장문의 탄원서들을 쓰기 시작했다. 평소에 이 총재님을 얼마나 존경하며, 자신이 학주형과 민주조카를 얼마나 사랑했으며, 자신이 이렇게 나락에 빠진 것은 모두 ‘기계’가 가족들을 앗아간 심리적 상처의 후유증의 일부이며, 이 총재님이 늘 건강하시길 기원하며, 하시는 사업마다 모두 대박나길 매일 신령님께 기도하고 있으며, 고인겸 변호사가 참 사람이 계산적이니 가까이 하지 말 것이며, 끝으로 어떻게든 꼭 좋은 변호사 한명 붙여서 감옥에서 빼달라는 내용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인지, 김학모는 2032. 7. 10. 드디어 간수로부터 접견이 잡혔다는 이야기를 듣게되었다. 오후 2시 접견.
점심시간이 끝나자 간수는 그를 불러일으켜 접견실로 인도했다. 다소 이상한 것은 간수가 김학모를 여자감옥, 일명 ‘여사’의 변호사 접견실로 안내한 것이었다. 여사 접견실은 언제나 면회인으로 바글바글한 남사 접견실과 달랐다. 출입문 옆에 교도관 한명이 앉아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남사 접견실에는 20개정도의, 유리벽으로 분리되어있는 개별접견실이 있었는데, 여사에는 두 개의 개별접견실이 있었을 뿐이었고, 남사와는 달리 변호사와 수감자를 분리하는 차벽도 없었다. 땀냄새 나는 남사와는 달리 에어컨이 돌아가 쾌적하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역시 이 총재가 방구 좀 뀌시는구만!” 김학모는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에어컨 바람을 즐겼다.
교도관은 역시 친절한 말투로 그의 수감번호와 이름을 확인해주었다. 교도관은 확인을 마치고 문을 열고 나가버렸고, 그 문으로 양복을 입은, 다소 탄 얼굴에, 체구 좋은 사내가 걸어들어왔다. 다리가 불편한지 사내는 지팡이를 짚고 들어왔다. 사내는 지팡이를 문에 세워두고, 김학모에게 좁은 접견실에서 말을 나누기가 적당하지 않으니 교도관의 책상 옆에 놓은 검은 소파에 앉으라고 권유했다. 변호사들이 대기하면서 앉는 소파였다. “역시 이 총재가 보낸 사람 답구만!”
“선생님이 김학모 선생님이시죠?” 김학모가 앉자 사내가 물었다. 김학모는 ‘선생님’소리에 다소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네. 제가 그 유명한 죽일놈 김학모놈입니다.” 김학모가 털털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변호사님은 우리 인중당 이규 총재님이 보내신 분입니까?”
사내는 대답없이 자신의 안주머니에서 명함지갑을 꺼내 들고는, 거기서 명함한장을 꺼내 김학모에게 내밀었다. 명함에는 한자로 단 3글자가 적혀있었다. ‘劉仁虎’. 김학모가 명함을 받아들고 ‘뭐 이런 명함이 있나’하는 표정으로 한자를 소리내어 읽으려던 참이었다.
“유인…”
사내가 김학모의 뺨을 쳐올렸다. 발음을 하려다가 갑자기 뺨을 맞은 김학모는 그만 혀를 깨물고 말았다!
난데없이 뺨을 맞은데다 혀까지 깨문 김학모가 자세를 바로 잡기도 전에 이번에 구둣발이 날라왔다. 사내가 김학모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이게 교도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인가?김학모가 고통스러워하자 사내는 일어서서 문 옆에 세워둔 지팡이를 들고와서 김학모의 정강이를 내려쳤다. 김학모가 고통에 신음하며 바닥을 뒹굴자 이번엔 발로 김학모의 허리와 옆구리를 걷어찼다. 폭행은 10분정도 이어졌다. 김학모는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도움을 구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운동을 마친 사내가 소파에 앉아 숨을 골랐다. 왼쪽 가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에 젖은 이마를 닦았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교도관의 책상으로가서 에어컨 리모컨을 찾았다. 리모컨이 없자 사내는 어딘가로 전화를 했고, 곧 방을 나갔던 교도관이 에어컨 리모컨을 들고 돌아와 사내에게 건내고 다시 나갔다. 김학모는 교도관에게 살려달라고 소리쳤지만 교도관은 들은 척 하지 않았다. 사내는 에어컨 바람을 키우고 바람이 떨어지는 자리에 서서 땀을 말렸다.
“선생님, 나 변호사 아니고, 인중당에서 보낸 사람도 아닙니다. 인중당에서 아무도 안 보낼거고. 그리고 할 얘기 좀 있으니깐 소파에 좀 다시 앉아봐.”
김학모가 몸을 추스르자 사내는 물을 한잔 따라 김학모에게 건냈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봐요. 선생님. 참, 때려서 미안하고, 당신 하는 짓을 봤는데, 전부터 기회 있으면 좀 때리고 싶드라고.”
김학모는 간신히 소파에 앉아, 두려움을 겨우 숨긴 채로 사내의 요구를 들었다. 요구사항은 간단했다. 첫째, 민사소송에서 고인겸 변호사를 해임하고 명함에 적힌 김칠중 변호사를 선임할 것. 둘째, 김칠중 변호사가 시키는 대로 할 것.
“회사에서 오셨구만, 그래 얼마나 주시려고 그러시나?” 김학모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그의 예감이 맞았다. 사내는 다시 매타작을 시작했고, 이번엔 5분정도 폭행이 이어졌다.
“선생님, 당신 한푼도 못받을거요.” 사내는 에어컨 아래서 양팔을 옆으로 벌린 채로 겨드랑이를 말리면서 재밌다는 투로 웃으면서 말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드라마 너무 많이 본거 아냐?”
김학모는 바닥에 주저 앉아 있었다. 사내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김학모의 턱을 잡아 올렸다. 요구대로 하지 않으면, 3년 6개월 징역 형을 10년으로 만들 것이며, 매일같이 찾아와 매타작을 할 것을 약속했다. 사내가 김학모의 형량을 올릴 수 있는지를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가 교도소로 찾아와 마음껏 매질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사내는 정수기 옆에 놓인 믹스커피를 한잔 타 마시면서, 김칠중 변호사가 오후 4시정도에 찾아와 필요한 절차를 설명해줄 것이라고 안내했다. 사내는 김학모에게 준 자신의 명함을 회수하고 다시 교도관을 다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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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오후 5시 35분 경에 경기도 안산시 반월터널 내에서 인천방향 4차선에 주행하던 차량이 터널 벽면에 충돌하면서 전복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보기드문 휘발유 차량이었던 사고차량은 대형 폭발을 일으켰고, 사고차량 내부에 있던 200리터 상당의 한꺼번에 타오르면서 터널 안에 거대한 불기둥이 타올랐다. 사고로 인해 반월터널은 즉각 폐쇄되었다. 안내가 늦어지면서 차량들이 터널 앞까지 몰려들었고, 우회하려고 돌아가는 차량과 몰려드는 차량들로 심각한 차량 정체가 일어났다.
멈춰선 차량들 사이로 소방관들은 오후 6시경에야 겨우 현장에 도착했다. 이미 모든게 연소된 상태였기 때문에 화재진압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급한 것은 터널 복구 작업이었다. 응급차가 오기는 했지만 상당한 규모의 폭발이었기 때문에 누군가 그 불길로 살아남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응급차는 연기를 흡입한 사람들을 실고 현장을 떠났다. 경찰들은 터널의 교통을 복구하기 위해 1차선을 청소, 정리하고, 2차서분터 4차선까지 차량이 들어오지 않도록 안내차량을 배치했다. 바쁘 움직였지만 오후 10시경에야 교통흐름이 복구되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뿐이었다. 폭발로 인한 터널 붕괴 위험에 제기 되었고, 곧 반월터널 전체가 폐쇄되었다.
경찰들은 그제서야 사고차량의 확인에 들어갔다. 다행히 터널 내부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차량이 흔적도 없이 연소한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확인결과 사고차량의 차종은 ‘클래식 GX’, 마니아 층이 있기는 하지만, 쓸데없이 비싸기로 유명한 차종이었다. 차량번호 34조9811, 사고차량 소유주는 가수로 잘 알려진 손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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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칠중 변호사는 약속보다 다소 늦은 시간인 2032. 7. 10. 4:20경에야 남부구치소에 도착했다. 여느 때와 같은 교통정체 덕분이었다. 유인호 부장이 이미 모든게 정리되었다고 연락을 한 상태였다. 김칠중 변호사는 서울남부구치소 정문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이야기는 모두 정리되었고, 나머지는 절차뿐이었다. 김칠중은 고인겸을 해임하고, 자신을 민사사건의 변호사로 선임하는 절차를 진행하기 위해, 선임계약서를 들고 구치소로 걸어갔다. 간단히 말하자면 지장을 받으러 온 것이다.
이것저것 번거롭기는 했지만 김칠중의 입장에서는 손해볼 것 없는 장사였다. 친구인 유인호 부장은 회사측에서 섭섭치 않은 몫을 챙겨줄 것을 약속하였고, 김칠중이 할 일은 잠시 소송을 진행하는 시늉을 하다가, 회사의 제의대로 사건을 마무리 하는 정도였다. 회사는 연출을 원했기 때문에 마무리 하는 과정에서 회사측 사람과 악수를 하거나 기자회견을 하거나 하는 정도의 일은 필요할 것이다. 김칠중은 대학동창 하나 잘둔 덕에 쉽게 큰 돈을 벌게 된 것에 기분이 좋았다. 그만큼 가벼운 마음으로 왔기 때문에 김학모가 접견을 거부했을 때는 그도 적잖게 당황을 하였다. 하긴 돈 버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은 법이다.
김학모는 왼손으로는 왼쪽 갈비뼈들을 혹시나 금간 곳이 없나 확인하면서, 오른손으로는 이규 총재에게 보낼 새로운 탄원서를 적어내리고 있었다.
“존경하는 총재님! 회사가 이제는 사람을 보내 저를 잡네요. 기계놈들이 우리형, 우리조카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 저도 보내버리려고 합니다! 우리 인류가 이제 일어나야 합니다!”
김학모는 일필휘지로 탄원서를 적어내리고는 곱게 접어 교정관에게 전달했다. 김학모는 다시 자리를 잡고 고인겸 변호사에게 탄원서를 적어내렸다.
“존경하는 고 변호사님!”라고 시작되는 탄원서는 이규에게 보내는 탄원서보다는 훨씬 복잡한 논증이 들어 있었지만, 주된 요지는 소송을 포기하면 김학모 본인은 물론이고 고변호사도 돈을 벌 수 없으니 반드시 폭행사건을 언론에 널리알려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꼭 제 편지를 언론에 알려주십쇼!”
김학모의 바램과는 달리 편지는 언론에 알려지기는 커녕 교도소 밖으로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편지들은 곧바로 소각로로 직행했고, 김학모의 서신은 애초에 접수기록도 하지 않았다. 김학모 스스로도 서신을 접수한 후인 저녁식사 무렵에, 서신이 외부로 전달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접견실에서 폭행을 당해도 모른 척하는 교도관들이 순순히 그의 서신을 외부로 전해주지 않으리라는 것은 당연했다. 김학모를 접견오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그가 폭행사실을 외부에 알릴 방법따윈 없다. 김학모는 교도소 어딘가에 밀반입된 휴대전화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기억이 났다. 만일 핸드폰만 찾으면 어떻게 이규에게 전화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학모는 밤늦게 뒤척이면서 어떻게 휴대전화를 찾을 수 있을까 궁리를 하다가, 어차피 휴대전화를 찾아도 자신이 이규의 전화번호를 외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기억하는 전화번호는 영월 용한점집의 유선번호 뿐이다.
다음날 점심식사 시간에 몇몇 수용자들 사이에 월드스타 손시정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얘기가 돌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 수용자들에게 월드스타의 죽음은 큰 흥미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러니 김학모가 티비 방송을 통해 이를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김학모는 남부구치소에서 유일하게 신문을 구독하는 것으로 알려진 수용자에게 몰래 숨겨둔 담배 두가치를 건네주고 그날의 신문을 받아보았다. 차라리 담배를 피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월드스타 손시정의 사진이 일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김학모는 떨리는 손으로 양말 사이에 숨겨둔 담배를 찾았다. 그제서야 김학모는 담배를 주고서 어차피 몇시간 후면 알게될 소식을 확인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담배가 있었으면 떨리는 손을 멈추는데 도움이 됐을 것이니 담배만 낭비한 것이다.
유인호는 오후 2시경에 찾아왔다. 그는 별말없이 전날처럼 끌려온 김학모를 매타작 했다. 그는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몸을 푼답시고 김학모를 앉혀놓고 팔굽혀펴기를 하기도 했다. 마치 헬스장에서 온 사람처럼 그의 몸짓은 가벼웠다. 유인호는 4시쯤에 김칠중 변호사가 올테니 잘 이야기 나눠보라고 언질을 하고 떠났다.
김칠중 변호사는 전날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20분일찍 사무실에서 출발했다. 그는 3:40에 차를 세우고,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근처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구치소로 들어갔다. 그 덕에 4:20에야 김학모와 마주 앉게 되었다.
김학모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제 모든게 변호사님한테 달려있습니다.”라고 말하고는 김칠중 변호사가 내민 선임계와, 고인겸 변호사의 해임신고서에 지장을 찍었다.
“제발 3년 6개월만 살게 해주십쇼.” 김학모가 말했다.
말하면서, 김학모는 혹시나 그 의미가 “3년 6개월 후에는 저를 죽여도 된니다.”라고 들리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김칠중 변호사는 이미 김학모의 형사 항소심을 맡기로 회사와 얘기가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떨고 있는 구속 피고인에게 느긋한 목소리로, “형사사건도 저한테 맡겨주시면 잘 처리해드릴계요.”라고 말할 기회를 그냥 넘어가진 못했다.
“제발 살려만 주십쇼.” 김학모는 말하면서, 혹시나 그 의미가 “목슴만 살려 주면 영원히 감옥에 있겠습니다”라고 들리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김칠중 변호사는 형사 선임계에도 김학모의 지장을 날인받았다.
2032년 8월 10일 춘천지방법원 영월지원 2030가단1245호 사건에 원고측 8번째 준비서면이 제출되었다.
“알파OS는 엉터리이기 때문에 피고는 원고 김학모에게 돈을 지급해야 한다”는 취지의, 이제까지의 주장으로부터 한발도 벗어난 것 없는 엉터리 서면이었다.
피고측은 8월 12일에 15번째 준비서면을 제출하였다. 언뜻 보아도 성의없는 서면이었다. 양측 모두 감정인 손시정의 죽음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조차 없었다. 새로운 감정인을 지정해달라는 내용도 없었다. 양측의 화해를 위해 조정기일을 잡아달라는 원고측의 신청이 들어왔다. 당사자가 조정기일을 잡아달라는데 재판장 입장에서 이를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명예원 판사는 2032년 10월 15일로 조정기일을 잡았다.
원고측에서는 김칠중 변호사가 출석하였고, 피고측에서는 변호사가 아닌, 새로 취임한 대표이사 홍순기가 직접 출석하였다. 명예원 판사가 절차대로 먼저 원고의 조정의견을 물었다. 김칠중 변호사는 원고가 이미 투옥까지 되어 사건을 더이상 진행할 여력이 없으니, 적절한 조건에서 합의를 할 의사가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홍순기 대표이사는 원고에게 10억원을 지급할 의사가 있으나, 조정조서에 “알파OS에 아무런 하자가 없음을 확인한다.”라는 취지의 문구를 넣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안 될거 없죠.” 김칠중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예원 판사는 법리와 실무관행대로 조정조서에 아무런의미 없는 문구를 넣는 것은 안 된다는 의사를 밝혔다.
“당사자 모두 조정을 원하는데 판사님만 원치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판사님만 분쟁을 원하시는 것 같네요.” 김칠중 변호사가 능글거리는 어투로 말했다.
“법률적으로 의미 없는 문구일지 모르지만 역사적으로는 의미 있는 문구입니다.” 홍순기 이사가 말했다.
조정은 5분만에 이루어졌다. 명예원 판사는 일개 서기처럼 당사자들의 요구사항을 키보드로 타이핑했다. 김칠중 변호사와 홍순기 대표가 차례로 서명하였다. 홍순기 대표는 조정실을 나서면서 명예원 판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판사님, 그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