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커피발전소가 문득 생각났다...

「비추는 기쁨」(by 공림)을 읽으며...

by radioholic

지금은 공원으로 바뀐 당인리발전소 앞에 '커피발전소'라는 카페가 있었다. 굳이 과거형으로 쓰는 이유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임경선 작가를 비롯한 여러 작가의 작업 공간으로 사랑받았던 그 카페는, 말수 없는 사장님이 묵묵히 내려주시는 커피 향과 카페 안에 흐르던 클래식 음악이 참 좋았다. 카페에 들어와 유리문을 닫으면 합정-상수 사이의 그 시끌시끌한 분위기와 완벽히 단절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곳에서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있는 바깥 풍경에 놀라 서둘러 짐을 싸곤 했다.


평일 낮의 커피발전소는 고요함과 자연광으로 채워진 곳이었다


언제든 망설임 없이 찾아갈 수 있는 나만의 카페가 있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다. 집에 있기 답답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어디 갈 데가 생각나지 않을 때, 나에게 편안함과 기분 전환을 동시에 줄 수 있는 공간으로는 단골 카페만 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커피발전소가 좋았던 이유는 언제 찾아가도 변하지 않는 그 카페만의 고요함과 그 속에 흐르는 여유 때문이었다. 세상은 빠르게 돌아가도 그 안에서의 시간만큼은 결코 그 세상의 속도에 휘둘리지 않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이젠 더 이상 느낄 수 없는 기분이 되었지만...




방금 구워져 나온 빵을 나르는 직원은 익숙한 듯 요리조리 인파를 피해 나아간다. 빈자리를 찾기는 어려웠다. 큰 규모를 자랑하는 쇼핑몰에서 주차 공간을 찾아 30분을 헤매다 보면 내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처럼,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각자의 자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겨우 찾아낸 빈자리로 속도를 내니 커피가 출렁출렁 흔들렸고, 다시 속도를 줄여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나를 쫓아내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나를 환영해 주지 않는, 그 치열함과 엄숙함에서 나는 도망치듯 나오고 말았다.(57~58p)
- 공림, 「비추는 기쁨」中


공림 작가의 「비추는 기쁨」에서 묘사된, 인터넷에서 소문이 자자하다는 카페의 모습은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혼자 카페가기를 좀처럼 하지 못하게 된 이유를 내 맘을 들여다본 것처럼 이야기해 준다. 분명 인테리어도 멋지고 분위기도 깔끔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쉰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요즘의 카페들이 난 참 별로다. 그냥 엉덩이만 살짝 붙였다 가라고 만들어놓은 듯한 예쁘고 불편한 의자와 테이블, 비트가 빠르고 세련되었지만 오래 듣고 있기엔 피곤한 음악으로 채워진 그런 카페는 잠깐이라도 쉬러 온 나를 몰아내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어디 카페만 그럴까. 우리는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점점 강하게 붙는 가속도에 따라 변해가는 세상을 만들어가면서 우리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있다. 물건을 주문한 뒤 하루를 참을 수 없어 번개배송이나 새벽배송을 찾고, 궁금증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우린 사람에게 질문을 하지 않고 Chat-GPT나 제미나이를 찾는다.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잠시라도 기다리는 그 시간 자체를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날 선 재촉 속에 극한 노동을 감내하며 새벽배송을 하는 것도, AI의 득세에 따라 일자리를 잃는 것도 다름 아닌 우리들이란 것을 우린 잊고 있는 게 아닐까. 그 속도감이 주는 편리함의 이면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속도라는 채찍으로 쉴 새 없이 다그치고 있다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동안 아주 느린 걸음으로 숲속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책이나 영화의 내용마저 유튜브의 짧은 동영상으로 소화하는 시대에, 이토록 느리고 깊은 호흡을 견지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글을 읽는 것은 참 소중한 일이다. 결코 크진 않지만 그렇다고 사소하지도 않은 일들 속에서 삶을 대하는 방법을 생각할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뭐든 빠르고 신속하게 대응하는 것이 미덕인 세상 속에서 정작 사람들이 소외되고 있는 요즘, 천천히 무언가를 응시하고 생각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우린 알아야 하지 않을까.




공림님이 쓰신 이 책을 읽으면서 이젠 더 이상 갈 수 없는 커피발전소가 생각난 것은, 책 전반에 흐르는 고즈넉하고 담백한 분위기가 그 카페와 너무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결코 과장되지 않고 담담한 시선으로 주변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 시선이 참 따뜻한 감정으로 채워져 있다는 점이, 특별히 꾸민 곳이 없이 무심하게 책들이 쌓여 있는 듯한 공간이지만 사실은 손님들이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 글을 쓰거나 쉴 수 있도록 해주는 배려심이 넘쳤던 커피발전소의 모습을 떠오르게 만들어주었다. 이 책을 커피발전소에서 읽을 수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것 같다는 부질없는 상상을 문득 했다.


쌓여있던 책들마저도 운치가 넘쳤던 그 곳...

나에게 소중한 공간이었던 커피발전소가 사라진 것처럼, 내 일상에서 또 어떤 것이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다. 그것은 아끼던 물건일 수도 있고, 당연한 줄 알았던 건강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소중한 사람들일 수도 있다. 세월의 흐름과 세상의 변화 속에 어쩔 수 없이 놓아주는 순간이 오더라도,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해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점점 느낀다. 나 역시도 그렇게 하나 둘 잃어가는 것이 생길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의 소중함을 아주 담백하게 표현해 준 이 문장들처럼.


소설 같은 특별한 일은 매일 벌어지지 않는다. 흥미진진하고 가슴 뛰는 재미도 나날이 펼쳐질 수가 없다. 아니,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침에 눈을 뜨고,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고, 자주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으로 배를 채우면서 똑같은 하루가 이어졌으면 좋겠다. 오늘도 어제처럼 변함없이 그대로.(208~209p)
- 공림, 「비추는 기쁨」中


공림 작가님은 지금도 브런치에서 좋은 글을 써 내려가고 계신다. 천천히 걸으며 흙과 나무로 글을 빚는다는 작가님의 브런치 소개글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문장들이 난 참 좋다. 그리고 모니터로 읽는 글도 좋지만, 책장을 넘기며 천천히 읽을 때 그 글들이 더 빛을 발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빠르고 정신없는 지금의 세상 속에서 잠시나마 조용히 숨을 돌리고 싶은 분들이 있으시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다.


제목마저도 따뜻한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