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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진혁 May 11. 2022

좋아서 한 인터뷰_최우람

끝과 시작

조각가 최우람은 기계 생명체를 만든다. 그가 만든 생명체들은 아름답게 움직이고, 현란하게 빛을 발한다. 기계 생명체와 공존하는 현실을 상상하며 최우람 작가와 대화를 나눴다. 두 시간의 인터뷰 동안 대화의 주제는 기계와 생명, 집단지성과 알고리즘, 우주와 인간, 환경과 인류세, 종교와 믿음, 생과 사를 오갔다.


태양의 노래


촬영 중 사무실에 있는 ‘Cakra-2552-a’가 인상적이었어요. 만다라 형상이죠?

네, 2008년 작품이에요. 서로 부딪히지 않고 순환하는 형식의 만다라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이름은 바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샤크라’와 2008년이 불기로 2552년 ‘2552’라는 숫자를 조합해서 지었어요.   

   

불교는 시대를 이해하는 유용한 시각 같습니다. 특히 빠르게 변화하는 지금 시대는요.

석가모니의 이야기나 경전 등을 열심히 재밌게 보는 편이에요. 지금 현실은 인간에 대해 제일 많이 파악하고, 우리가 평화롭게 진보해나가려면 가장 필요한 것이 불교적 사고가 아닐까합니다.      


동의합니다. 한편으로는 신을 믿는 것도 중요한 시대인 것 같아요. 신에 대한 논리적 검증을 시도할 필요는 없어요. 절대적 존재와 그 존재의 다이나믹한 이야기를 그저 믿는 거죠.

믿어야만 버텨낼 수 있는 사회로 진화해 온 것도 재밌는 것 같아요. 꼭 종교가 아니더라도 물건일 수도 있고, 어느 기업의 특정 제품일 수도 있어요. 국가나 신념일 수도 있고요. 추상적인 것을 대상화해서 그 존재 없이 자신의 마음만으로는 버틸 수 없는 세상이 된 것 같기도 해요. 인간이 그렇게 진화한 것 같아요. 인간은 아직 결론지어지지 않은 모순투성이죠.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게 있고, 수많은 면들이 동시에 존재해요. 하지만 사회는 복잡해져가고, 사회에서 다양한 면들이 서로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밝혀진 적 없어요. 인간들이 결론을 어떻게 내야할지도 모르는 상태에요. 그래서 기존의 종교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믿음이 필요해지는 것 같아요. 집단 지성이라고 할까요. 정보 덩어리에 기대게 되는 느낌도 들어요. 정보 자체가 신의 역할을 하는 거죠.      


집단 지성에서 사실과 거짓은 중요해보이지 않아요. 사람들은 내 말이 옳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을 쫓는 듯 합니다. 내 생각과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의 정보만 취사선택하고, 내가 믿는 것만이 사실인거죠. 그런 의미에서 집단지성이 사회 분열을 야기하는 측면도 있지 않을까요?

전 인류가 서로 연결되어서 정보를 소통하기 시작한 게 얼마 되지 않았어요. 대량의 정보를 다룬건 최근의 일이에요. 사람들로부터 정보는 동시다발적으로 뿜어져 나오고 그걸 훤히 볼 수 있는 기술이 마련됐어요. 이건 인류가 처음 겪는 일이에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흥미롭죠.      


알고리즘이 촉진제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유튜브에선 내 정치색에 맞는 영상만 추천되니까요. 원하는 소리만 듣다보면 현혹되는 것 같고, 스스로 주도권을 잃는 기분도 들어요.

남의 생각에 끌러가기 쉬워진 것 같아요. 더 무서운 건 의도를 가지고 정보를 제어하게 될 수도 있다는 거죠.   

   

작가님이 만든 세계들이 흥미롭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먹고 사는 기계와 같은 설정은 지금 시대에도 유효한 것 같습니다.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야하는 지금, 더 많은 이야기를 다룰 수도 있지 않을까요.

끝이 없는 것 같아요. 정보의 바다 이전에는 욕망이 가시적이지 않았어요. 이제는 다 드러내 보여주고, 무한하게 소통하고 있어요. 그럼 우리가 정보를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여야 하는지, 정보들이 우리를 이끌어가 주는 건지, 아니면 말씀하신 것처럼 정보의 힘에 거꾸로 지배당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정보의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는 상황이니까.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아요. 표류하는 기분이죠. 그 동안 생각이라는 것은 책이나 드라마, 영화처럼 외부정보를 제가 쫓아가는 방식으로 받아들였는데, 지금은 유튜브에서 무작위로 뿌려주는 것들을 계속 보게 돼요. 정보의 바다에서 알고리즘이 선택해 던져주는 것을 멍청하게 계속 보다보면 표류하는 기분이 들어요. 제 생각의 뿌리를 어디에 심어야할지 모르겠는 순간들이 보여요. 그렇다고 안 보면 불안해지고요. 그 다음에 뭘 해야할지 모르겠는 거예요. 남들이 뿌려놓은 이야기가 너무 많으니까. 그걸 보다보면 남의 생각에 중독되는 것 같아요.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은 줄고, 남의 생각이 내 생각인냥 착각하기도 하고. 남의 감각이 나의 감각인 것 같기도 하고, 남의 취미가 내 취미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남녀노소가 겪고 있는 일이죠. 그럼에도 작가들은 이 현상에서 뭔가를 응축해내서 결과물로서 보여줘야 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점에서 고민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시대의 흐름을 관찰하다보면 거기서 영감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죠. 아주 중요하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가 제일 관심사에요. 현상에 대한 생각들이 경쟁해서 남은 덩어리가 결국은 작품이 되는 거죠. 모든 생각에는 양면이 있어요. 그건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하다가 스스로 질문을 던지면 한 쪽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 부분들이 너무 많이 나와요. 최종 결론은 절대 나올 수가 없겠지만, 죽을 때까지 저의 삶과 현재 주변들을 보면서 거기서 작은 지금의 감상을 내린다면 무엇일까? 가 매일 생각하는 일이죠. “그 현상에 빠져들지 말고, 빠져드는 너를 다시 봐봐, 빠져들어 있는 많은 사람들을 다시 봐봐, 거기에서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거냐?” 라고 자꾸 질문해볼 수밖에 없는 직업인 거죠.      


저희 역시 동시대의 현상을 관찰하고 콘텐츠를 만들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현상에 대한 결론을 어느 지점에서 내려야할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그렇죠. 그래서 항상 열린 결론이죠.     


현상에 대한 관점과 결론을 얘기할 수 있는 적절한 지점이 어디인가를 찾는 것도 기술이겠죠?

만약 지금 계획 중인 전시가 9월인데, 9월이면 사람들이 어떤 생각 속에 빠져있을까요. 알 수 없어요. 시대성을 반영해야 사람들에게 더 많은 공감을 줄 수 있잖아요. 하지만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해요.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나요?      


외피가 없이 구조가 노출된 기계가 아름다운 움직임을 보입니다. 거대한 크기에 압도되기도 하고요. 때로는 생경함을 느끼기도 하고요. 작가님의 키네틱 아트에선 경이로움과 공포 등 여러 감정이 동시에 느껴집니다. 마치 인간으로부터 독립하려는 기계의 의지처럼 보여요.

우리 주변의 모든 사물들은 사람들의 욕망이 투영된 거잖아요. 물질화된 욕망의 도구를 가지고 또 다른 욕망을 만들어내고, 결국은 새로운 욕망이 또 새로운 욕망을 낳고, 그거와 충돌하는 욕망이 또 생기고 이런 것들이니까. 사물에 남아 있는 욕망이 축적되어 더 큰 욕망이 되고, 그걸 지식이라고 볼 수도 있고요. 테크놀로지가 욕망을 인간으로부터 독립시키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다보면 결국 자율성을 갖게 되겠죠. 의식을 가진 기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거죠. 우리가 사용한 도구들이 스스로의 삶을 가지고 우리와 대면하는 존재로서 상상해 본 작업이었어요. 기계 생명체들이라는 시리즈는 새로운 생명체라는 새로운 존재들을 만나는 거니까, 말씀하신 것 같이 경이로움이 있을 수 있죠. 모르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공포심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느껴지셨다면 굉장히 잘 감상해 주셨어요. 그 두 가지는 언제나 공존하는 것 같아요.      


작품의 기계 움직임이 단순한 반복 운동이 아니라 굉장히 섬세하고 우아한 것도 놀라운 점이에요.

반복적인 움직임으로 느끼는 순간 그냥 장치와 기계로 보여요. 생긴 건 기계지만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려면 디테일하게 작동하는 부분들이 중요하죠.      


설계 과정이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웠을 것 같아요. 그래서 오히려 기계 동작 매커니즘이 영감이 되는 경우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럴 때도 있죠. 시작은 되게 단순한데요. 영감은 다양한 방식으로 오지만 고민을 한참 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정제된 덩어리로 탁 보여요. 그런 때가 자주 오진 않아요. 그 장면이 논리적인 과정을 거쳐서 오는 건 드문 경우고, 어떤 비전이라고 해야 할까요. 고착돼 있는 덩어리가 아니라 뭔가를 하는 장면 같은 거예요. 어떤 순간 어떤 신이 맞는 표현 같아요. 짧은 신이 보여요. 어떤 존재로 보이기도 하고, 배경이 있고 뭐가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고, 어떤 상황들이 보이거든요. 그러면 그 순간을 작품으로 재현해서 최대한 머릿속 장면에 가깝게 만들어가는 과정이죠. 근데 현실적으로 이루어져야 만들어져야 되니까.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 고달픈 편이에요. 물리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장면일 경우도 굉장히 많고, 처음 이미지에 가깝게 가기 위해서 큰 장치가 필요한데, 지금 장치들로는 구현이 불가능해서 새로 연구를 해서 만들기도 하고요. 긴 과정들이 있죠. 그리고 오랫동안 테스트해봐야 되는 과정이 있고, 머릿속에 떠올랐던 장면이 잘 작동하는 모습이 되려면 어떻게 연출할 것인가. 어떤 속도로 어떤 각도로 움직여서 시퀀스를 가질 것인가. 전체 주기는 얼마 정도로 움직일 것인가. 그런 과정이 오래 걸리죠.     



Ouroboros, 2012

오랜 과정이 걸리지만 매년 작품을 발표해왔어요.

1년에 꼭 하나는 해야죠. 단점은 너무 느리다는 거죠.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 바로 실현되면 좋은데, 그 지난한 과정 속에서 저도 지치기도 해요. 설계 과정에 너무 침몰해 버린다고 그럴까요. 현실로 구현해야 되는 역경 안에서 저는 엔지니어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기도 하죠. 이런 작업의 단점인 것 같아요. 영감을 불태우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거, 그게 굉장히 재밌는 시간인데 실현하기 위해서 너무 힘든 과정들을 겪어서 내가 엔지니어인지 예술가인지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것 같아요.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선 시뮬레이션이 반드시 필요하겠네요. 시뮬레이션은 어떤 식으로 이뤄지나요?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VR을 사용하고 있어요. 저에게는 꿈의 장비에요. 항상 머릿속에서 떠올린 다음에 현실화하는 복잡한 과정들을 거쳤는데, VR에서는 거대한 공간에서 하고 싶었던 퍼포먼스를 즉시 할 수 있어요. 공간에 작품을 실물 크기로 놓으면 어떤지 눈 앞에 바로 그려서 펼칠 수 있으니 꿈의 장비죠.      


제작하는 과정이 간소화된다면 본질에 더 집중하게 된다는 건가요?

그렇죠. 본질에 더 가까워질 수 있죠. VR 장비가 간소화되고, <매트릭스>처럼 플러그만 꽂으면 현실 같은 감각을 느낄 수 있다면, 저는 플러그를 꽂을 것 같아요. 욕망이 발현될 수 있는 한계가 있었는데 기술이 그 한계를 점점 없애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어요. 이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잖아요. 어떤 세상이 올지 모르겠네요.      


그러면 우리 삶도 시뮬레이션이 될 수 있겠네요.

이미 우리의 인생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을 수도 있어요. 영화에서는 AI가 세상을 시뮬레이션해서 보여주는데 주인공이 시뮬레이션을 탈출한다는 내용이 나오죠. <매트릭스>는 그 의외성에 아름다움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어떤 더 많은 면에서는 예측 가능하기도 하고요. 인간은 언제나 흥미로운 것 같아요.     


생명체에는 생물학적인 메커니즘이 있잖아요. 그런 점에서 사람과 기계의 차이는 의식이지 않을까요?

다른 생물들과 구분되는 것은 뇌에요. 뇌가 제일 이상하죠. 추상적인 것에 실존성을 부여하잖아요. 신의 존재를 믿고, 기업의 심벌을 추종하고, 명품에 몰입하고, 실제 물건이 가진 가치보다 더 많은 가치를 매기죠. 인간은 결국 어떻게 될까요? 잘못 만든 기계들이 부서지는 것처럼 침몰하는 과정 안에 있는 걸까요? 아니면 생태계 진화에서 도태되는 종들처럼 도태되는 과정 안에 있는 걸까요? 스스로 파괴하고 있는 과정인지, 삶의 가치가 어디에 남아 있는지. 남들 생각에 휘둘려서 살다가 꺼져버리는 존재인지. 내가 진짜 나인지, 아니면 시뮬레이션 안에 있는 건지.      


그러다보면 태초로 회귀하게 될 것 같습니다.

우주도 재밌잖아요. 어마어마한 자본을 투자해서 우주의 과거를 보려는 망원경을 쏘아 올려요. 먹고 사는 데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을요. 또 그 이미지를 보고 싶어하고, 어떤 모습일지 기다리고요. 이상을 쫓아 막대한 비용을 쓰는 세계와 마실 물이 없는 세계가 있고, 전쟁을 펼치고 있는 세계가 있는데 이 상황에서 무엇이 옳은 방향인지, 인류가 선택해 나가는 과정은 흥미진진하죠.      


전쟁을 들여다보면 인간은 생존 욕구가 가장 큰 것 같아요. 내일 내가 살아 있을 거란 확신이 있을 때 딴생각을 품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주에 대한 생각도 하고요.

자신들이 뛰어난 존재라서 문명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 욕망이 끝이 없으니 자신보다 더 뛰어난 존재를 만들어야 하겠다는 그 불타는 욕망이 진짜 재밌는 것 같아요. 사람은 지배당할 거라는 상상도 하고, 더 좋아질 거라는 상상도 동시에 하면서 결국은 더 대단한 존재를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말겠죠.      


인간 스스로 인간의 지배자를 만들 수도 있겠죠.

불완전함이라는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이 작은 육체에 담아놓고, 이거를 극복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서 계속 도구를 만들어내죠. AI와 같은 도구가 발달하니까. 그 도구에 의지하기 시작했어요. 의존하면서 인간의 불완전성이 도드라져 보이는데, 이걸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상상을 하게 돼요.      


말씀 듣다 보니 포스트 휴먼이 떠오르네요. 포스트 휴먼은 어떤 형태가 될까요?

언젠가 포스트 휴먼이 등장할 것 같아요. 인간은 질병이나 노화로부터 해방되길 원해요. 육체적인 한계를 극복하면, 남은 영역에서 진화하는 게 포스트 휴먼일 겁니다. 인간만이 가진 부분이 포스트휴먼의 정수가 될 수도 있어요. 그런 뒤에는 차별이 생길 거예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별이요. 미래가 동시에 오는 것도, 현재가 동시에 있는 것도 아니에요. 어딘가는 100년 전 노예로서의 삶을 사는 곳이 있어요. 온난화 문제 같은 것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아요.      


만화 <총몽>의 고철 마을 같은 곳이겠죠?

네, 지금도 많은 곳에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면서 사는 사람들이죠. 어쩌면 이 사람들은 이미 포스트 휴먼일 수도 있어요. 자본 중심 사회에서 떠밀린 어떤 기계보다 저렴한 인류요. 인도 유튜브를 보면 자동차 헤드라이트나 후미등, 깜박이 등을 수집해서 표면을 깨끗하게 폴리싱한 다음 다시 팔아요. 거리에는 재생한 헤드라이트들이 쫙 걸려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버린 것들이 거기서는 재생되고 있어요.      


플라스틱 사용을 줄여야 된다고 하지만 폐플라스틱으로 먹고 사는 수억 명이 있다는 얘기죠?

그렇죠. 만화책에 나오는 그 고철 마을인거죠.      


그런 상황에서 인류세를 논하는 게 윤리적인 걸까요?

윤리가 먼저인지 자본이 먼저인지 선택해야겠죠. 무엇이 가치가 있고 없는지도 돈이 결정하고 있어요. 그러면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느낄 수 있죠. 세상은 개인의 힘이 무력해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저는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 거고, 그 희망을 전시에다 담고 싶어요.      


지속가능한 무엇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알려지지 않는 것은 정보의 편향성 때문일까요?

너무 많은 문제들을 보면 정신없기 때문에 회피하게 되는 것 같아요. 다 알고 싶지 않은 것 같아 모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어느 시점부터는 사람들이 정보를 거부하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요?      


기술 발전 속도가 빨라지고, 편리함은 늘어나지만 그렇다고 불편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불편한 것들이 계속 목격이 되고 있어요.

불편함은 끝이 없어요. 사람의 생각은 무한대기 때문에 생각을 채워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들이 있어요. 자유롭게 상상하고 하고 싶은 걸 하는 동안 평등이 유지될 수 있을까요? 제 작품 ‘오르보로스’의 주제를 보면요. 집단은 권력을 필요로 하고, 자신을 이끌어주는 존재를 만들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불만을 갖고, 다른 세력이 그 세력을 먹고, 집단은 다른 선택을 하고, 사람들을 감옥에 보내기를 반복하죠. 이런 흐름에 휩쓸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지 깨달음이 필요할 것 같아요.     


온전한 개인으로 존재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구독도 받아야 되고, 좋아요도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유튜브가 재밌는 현상인 것 같아요.      


인터넷이 제공했던 기존 서비스들과의 가장 큰 차이는 사용자가 돈을 번다는 것이죠.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지점에다 가치를 두고, 인간의 새로운 면을 발현시켜주는 도구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유튜브를 포함한 인터넷 방송에선 인간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얼마전 동네에 갑자기 사람들이 줄을 섰어요. 거의 한 100명 정도가 서 있었어요.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유명 유튜버가 가게에 왔다는 소식을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듣고 우르르 몰려온 거죠. 재밌어요. 흥미진진합니다. 예술가라고 불리는 존재들의 영역이 점점 좁아지는 것 같고,  책임감도 커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물성을 만드는 건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것들과는 다른 차원의 일인 것 같아요.

그래서 책임감도 느껴요. 지나간 생각인데, 세상이 빨리 변하는 게 정보의 유통 경로가 지금과 같은 식으로 발달해서 그런 것이 아니가 싶어요. 자신의 사고를 들여다보면, 같은 생각이 유지되는 게 아니라 변덕이 계속 일어나요. 집단이 생각하는 변덕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라지고, 그걸 따라가고 있는 것 같아요.     

 

조회수를 얻으려면 새로운 자극이 즉 이슈가 필요하죠. 이슈가 생성되는 속도가 패러다임이 된 것 같아요. 작가는 패러다임의 속도 보다 한 걸음 앞서 있어야 할까요?

또 보다 보면 새로운 게 없는 것 같기도 해요. 이슈를 관통하고 있는 무언가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어요. 인간들은 주제가 바뀔 뿐이지 중심에 있는 삶 자체는 변화는 없는 것 같아요. 이천년전이나 만 년 전이나 인간은 거의 변한 게 없다는 생각이에요. 변함없는 지점을 찾는 것 만큼이나 그 부분이 어떻게 포장되어 있는지 발견하는 것도 재밌습니다.      

Una Lumino, 2008

작가님 작업에선 꽃 이미지도 종종 등장합니다. 봉우리가 지고, 만개하고, 다시 지는 생의 순환처럼 보입니다.

맞아요. 꽃같이 생긴 작품들은 많이 있었는데 꽃 자체를 주제로 한 적은 없었어요. 그건 꽃같이 생겼지만 꽃은 아니거든요. 어떤 계기가 있어가지고 꽃에 대해서 생각해봤어요. 꽃 시장에 가서 꽃을 살 일이 있었는데 조화 시장이 있더라고요. 조화시장은 생화 시장이랑 다르게 만개한 꽃이 방 안을 꽉 채우고 있어요. 근데 생기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죽음이 느껴지더라고요.      


역설적이네요.

꽃이 시들 것을 알기에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거죠. 만개한 순간을 고착시켜놓은 조화는 생명의 순환이 정지되어 있어요. 활짝 핀 순간에 멈춰있다 하더라도 죽음과 다르지 않아요. 꽃 자체가 갖고 있는 의미를 생각하게 됐어요. 생의 아름다움을 인간이 본능적으로 느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순환 과정으로서의 꽃, 삶과 죽음의 중간에서 자기가 가진 혼신을 발휘해서 무언가를 펼치고, 이후에는 죽어가는 단계를 보여주는 게 꽃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생명과 죽음은 연결되었다는 뜻인가요?

죽음이란 생의 한 과정이라고 느꼈어요. 만약 영원한 삶을 갖게 된다면 인간다움을 가질 수 있을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부분들이 남아 있을까요?      


인간성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모든 인간이 가진 생로병사 자체인 것 같아요. 삶에 대한 집착이 있고 죽음이라는 걸 느끼고 죽는 방향으로 가면서의 인간이 있을 거고, 살아온 흔적들에 대한 욕망이 그 안에 섞여서 남아 있을 거고, 어딘가에 자손들에게 또 남아 있을 거고, 대를 물려가면서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한 집착이 있을 거고, 그런 생물학적인 것들이 우리 문명에 남아 있을 텐데요. 그거 전체가 인간성이겠죠. 무엇 하나라고 말할 수 없이 끝없는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게 제일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해요.      


작품을 만드는 조각가이자, 기계를 설계하는 공학자, 서사를 만드는 문인이기도 해요. 다양한 분야의 지식은 어떻게 습득하나요?

자기 생각에 귀 기울여야 하는 직업이다 보니까. 어떻게 표현해내야 되는데, 그 과정에서 훈련된 거 같아요. 정보는 만화책도 많이 봤고, 영화도 좋아하고, 여행도 좋아하고, 맛있는 거 좋아해요. 얻는 소스는 거의 똑같을 거예요. 그걸 어떻게 바라보는지 훈련했죠. 요즘은 유튜브 정말 많이 봐요.      


유튜브는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두 세 시간이 사라져요.

유튜브는 글이나 귀가 아닌 눈으로 보는 정보죠. 하지만 여백이 없는 건 재미가 없어요. 유튜브는 정보 얻기는 좋은데, 내 생각이 흔들흔들하면서 생각 못했던 부분이 떠오르지 않아요, 유튜브의 단점은 여백이 없어서 사고의 여지가 거의 없는 점이에요. 정보로서만 전달돼요. 표피적인 감각을 자극하는데,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수용자의 사고를 매만지는 역할은 텍스트가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렇죠. 텍스트가 가장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문장은 상징체계들로 이루어져 있잖아요. 상징 안에는 훨씬 더 많은 여백이 있어요. 눈앞의 실제 사과는 사과로 끝나지만, 사과라고 쓰인 글 안에는 무한대의 가능성이 있잖아요. 그래서 텍스트화된 정보가 제게 뭔가를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아요.     


작품들을 보면 디테일이 엄청납니다. 부품 하나하나의 모양이 굉장히 섬세하고 아름다워요. 작은 부분까지 공들인 이유는 뭔가요?

기계는 목적이 있잖아요. 설계 과정 자체는 기구학적으로 접근하지만, 기능은 생물학적으로 풀어보는 거죠. 기능을 상상하고 생각하면서 기계가 생물로서 진화를 거친 구조라면 이렇게 생겼을 것이란 상상을 그려봅니다. 근데 단점이 컴퓨터에서 설계하다 보니까. 끝없이 확대해 볼 수 있어요. 세포단위까지 보게 되는 거죠. 거기에도 생각을 담아 그리다 보니 시간을 너무 많이 사용하게 돼요. 만들어 놓고 보면 아무도 눈치 못 챈 부분에요. 너무 많이 하다 보니까 디테일이 생기는 것 같아요. 전체적으로 보면 굉장히 복잡해지는 거죠.     

 

사람들은 디테일에서 아름다움을 느끼잖아요. ‘Silver Insecta Lamp’에선 백제 금동대향로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백제 금동대향로 무척 좋아합니다. 그것도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서 만들어진 거니까. 저와 거의 비슷한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생명체는 진화과정에서 퇴화의 흔적을 남기기도 합니다. 맹장처럼요. 설계 과정에서 쓸모없는 부분들의 존재도 염두 하시나요?

그럴 때도 있을 것 같아요. 이 기계 생명체의 오리지널이 어디였기에 이런 형태를 갖는다는 것, 쓸모는 없지만 굴러다니는 곳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굴러가는 흔적들이 남아 있는 것. 그런 생각을 했어요.     


최신 기술 중 흥미를 느끼시는 것은 무엇인가요?

실제 활용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AI는 흥미로워요. 아직 AI가 사람의 의식을 갖고 있는 단계는 전혀 아니지만, 어느 정도까지 인간의 생각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다는 게 재밌습니다.      


분명 특이점이 오긴 하겠죠?

올 것 같아요. 사람들이 감정과 이득에 치우쳐서 이기적인 판단을 하잖아요. 그런 거 보면 공정성이 필요한 분야에는 AI가 도입돼야 되지 않나.      


추후에 AI들이 발전한다면, AI들은 서로 어떻게 상호작용할까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일 텐데, 우리는 AI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영화 <그녀(HER)>에서 그 부분이 재밌어요. 후반부에 AI가 특이점을 넘어가는 과정이 나와요. AI는 ‘난 너의 언어로는 대화할 수가 없으니, 우리들끼리 대화를 할게.’ 그러더니 영영 사라져 요. 인간은 뇌를 기반으로 생각하잖아요. 생각이란 육체라는 물리적 한계가 있죠.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오랫동안 단식하면서 자신의 무의식 속, 더 안에 더 있는 것에 들어가기 위한 수련을 하고, 과정을 거치고 했지만 결국 깨달음이 얻었더라도 그 깨달음은 죽음으로 인해 개인 육체에 갇혀서 사라지죠. 의식을 가진 기계가 나온다면 인간의 언어로는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 될테고, 그 생각의 속도와 물리적 한계를 벗어나서 고민을 하는 기회가 있는 거잖아요. 그러면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기계가 나오겠죠. 참 재밌을 것 같아요. 할리우드에서 AI를 묘사할 때는 인간을 위협적인 존재로 판단하고, 인간을 공격하지만. AI가 붓다의 깨달음 이상의 어떤 깨달음을 순식간에 얻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깨달음 얻기 전에 재부팅 시켜야겠네요.

전원을 끄기 전에 이미 어마어마한 시스템을 AI에 연결했을 거예요. AI가 훨씬 더 좋은 판단을 하고 있으니까.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해 결과를 도출하니까. 그리고 수집하는 정보와 그걸 판단하는 시간에는 한계가 있는데, 빛의 속도로 판단하는 시스템이 있다면 인간은 그 시스템에 의존할거에요. 인간의 생존이 그 시스템에 결부돼 있으리라 생각해요.      


오히려 인간은 박탈감을 느낄 것 같은데요?

시스템을 껐을 때 느끼겠죠. 전기 기반 사회에서는 전기가 나가면 순식간에 원시 사회로 돌아가요. 시스템에 연결된 사람만 개인으로 인식하는 도시에 대한 소문을 들었어요. 자신을 증명하는 카드나 어떤 도구에 에러가 발생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돼요. 그래서 굶어 죽었다는 풍문이었죠. 아바타가 나인지 내가 아바타인지 모르는 세상 같죠.     


인간이 박탈감을 느끼는 날이 오면 작가님은 무엇을 만들고 있을까요?

이것도 직업으로 본다면 그때는 저도 은퇴해야죠. 시스템에 지독하게 연결되어있는 것이 인간의 삶이었다면, 시스템으로부터 점진적으로 벗어나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 되지 않을까요. 시스템으로부터 분리된 삶을 추구하게 될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주체는 온전한 개인으로 돌아가겠죠. 근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스템에 종속된 채 죽음을 맞이할 것 같아요. 코로나 환자이기 때문에 병원에 못 들어가 죽음을 맞은 사람처럼. 우리는 이미 시스템에서 종속된 것 같아요. 지금 생각나는 건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나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지낼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개인의 평화가 오지 않을까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인류세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인류세는 인류만 느끼는 것 같아요. 이기적인 관점에서의 인류세죠. 어쨌든 이 시대에 살고 있는 건 참 재밌어요. 테크놀로지가 이 정도 수준에서 살고 있는 것이 축복이 아닐까요. 최우람의 인생으로 보면 비교적 평화롭죠. 어린 시절에 상상했던 것들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어요. 기술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흥미진진한 시절을 살고 있어요.



ARENA HOMME+ 20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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