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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리뷰합니다
by rae May 08. 2017

Parisiens.

Travel Guide Vol.39_Paris

마지막 도시 파리로 왔다.

개인적으로 파리와는 남다른 인연이 있는 도시이다. 30년 전 아버지가 파리 주재원으로 근무를 하게 되어 온 가족이 파리에서 4년 정도 산적이 있기 때문에 남다른 애정과 그리움이 있는 도시 일 수밖에 었다. 물론 그렇게 행복한 기억만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유년기의 4년은 내 인생과 가치관에 많은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이번 여정에는 숙소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짧게라도 파리 일정은 집어넣었다. 그 당시에 휴직 중이었던 M형과 파리 일정을 맞춰 함께 여행하기로 했다.

짧게 3박을 하였다.


파리에 대한 환상은 보편적으로 예술과 낭만 그리고 맛의 도시라고 하겠지만 내 기억의 파리는 좀 달랐다. 이민자의 나라, 인종차별의 나라 그리고 까칠한 프랑스 사람들과 더러운 개똥의 거리.

그렇다 30년 전의 프랑스의 기억이 더 큰 나에게는 오히려 부정적인 기억들이 많았다. 베트남을 식민 지배를 했었던 프랑스는 기본적으로 아시아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땐 88 올림픽도 열리기 전이라 한국이라는 나라도 잘 몰랐다. 현재도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Sud(남)? Nord(북)? 이렇게 물어본다. 학교에서는 백인 아이들이 나를 보며 눈을 찢는 시늉을 하였고 'CHINTUK(중국인을 낮게 부르는 말)'이라고 놀리기도 하였다. 그래서 자연스레 나는 아프리카 이민자와 아랍계 이민자들 그리고 베트남계 프랑스 혼혈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아마도 같은 처지의 친구들이라서),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는 날에는 어머니는  '너는 프랑스인 친구 없니?'라고 물어보았다.

여담으로 아프리카 이민자들과 알제리계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지금의 프랑스 축구 대표팀을 보면 가끔 그때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 게임을 했던 예전 그 친구들이 생각이 나기도 한다.

 물론 자연스레 2년 3년이 지나 백인 친구도 생겼지만 그만큼 프랑스의 자유, 평등, 박애 이미지는  많이 동떨어진 얘기 같았다.

30년이 지난 지금의 파리는 물론 많이 달라져 있었다.

개똥 투성이었던 거리는 비교적(?) 깨끗해졌으며 악명 높던 소매치기들도 비교적 사라졌다. 아마도 최근 몇 년 동안 일어났던 테러 때문에 치안이 더 강화되어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는 세상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는 것이다.



퐁피두 광장 앞에서 M형과 만나기로 하였다. 이틀 먼저 와서 여행을 하고 있던 M형은 S전자를 8년 다니고 기어코 몸이 망가져 요양차 여행을 다니고 있는 중에 파리 무료 숙소 찬스를 함께 공유하게 되었다.

숙소의 위치는 마레지구 한복판에 있는 작은 아파트. 여행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M형을 기다리며 오랜만에 파리의 공기를 맡아보았다. 내 기억으로는 퐁피두 어딘가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열리는 한국어 학교에 다녔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프랑스 초등학교는 매주 수요일이 휴일이었다. 그리하여 매주 수요일마다 엄마 손을 잡고 동생과 함께 퐁피두를 찾았다. 그 당시에는 조금 무서웠던 동네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이렇게 마레지구와 함께 가장 핫한 동네가 되었다.




숙소에서 짐을 풀고 저녁식사를 하러 나왔다. 마레 지구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예쁨이 있지만, 사실은 Marais는 '늪'이라는 뜻으로 매해 강물과 오물이 넘쳐 엄청 더러웠던 지역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개간 사업으로 17세기 이후로는 귀족들이 모여 살게 되었고 지금은 여러 공방과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되었다. 실제로 마레지구를 중심으로 걸어서 못 갈 곳이 없었다.

 

깊은 밤이 될 때까지 하염없이 걸었다. M 형과 함께 미래 얘기 사진 얘기하며 테라스에 앉아 맥주도 마시고 그동안 끊었던 담배도 한 개비 피웠다. 그냥 파리에서는 그렇게 하고 싶었다.

직장인이 된 지 10년 가까이 되었고 결혼도 하고 아기도 곧 생기게 되었다. 이제까지 왔던 파리 여행 중에 가장 여유로웠다. 생각해보면 10년 전 대학생 시절 배낭여행차 찾아왔던 파리는 배가 고팠다. 맥도널드를 얼마나 자주 갔었는지... 지금은 눈에 보이는 아무 레스토랑에 들어가 메뉴를 훑어보고 가장 비싼 걸 시켜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M형과는 나는  '우리 그래도 많이 출세했다'라고 자축하였다. 그렇지 배고팠던 학생 때와는 다르니깐....



라탕지구의 파르페 가게 아저씨.
아주 늦은 시간 저녁식사를 하는 노부부.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




마레지구의 흡연자들
퐁피두 광장의 명물 비둘기 할아버지. 여러 스트리트포토그래퍼에게 영감이 되는 모델.



'오늘은 뭐할까?'

다음날 아침 가장 먼저 했던 말. 이 정도면 정말 아무 계획 없는 여행이다. 나름 보겠다고 챙겨 온 여행책을 펴보다 문득 벼룩시장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맛집과 예쁜 카페를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면 시장이라도 다녀와보자!

그렇게 우린 파리에서 3대 벼룩시장으로 불리는 방브 벼룩시장으로 향했다. 마레지구에서 약 30분 정도 떨어진 곳인데 오 찾아가는 초입이 생각보다 험했다. 시장 초입에 있는 짭뚱 물건 호객꾼들이 비교적 터프하게 굴었는데, 내 목에 멘 카메라를 끈다던지 나의 팔을 거칠게 끄는 등 생각보다 기분 나쁜 호객질을 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인상을 쓰면서 한국말로 심하게 욕을 하면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물러난다. 여행을 하면서 얻게 된 기술 중에 하나는 그럴 때 오히려 세게 대들면 상대방이 꼬리를 내린다는 것.(물론 인적이 많은 곳에서 하면 이목이 집중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 쫄아 끌려 들어가면 안 된다.

특히 악명 높은 곳 중에 하나가 바로 몽마르트르 언덕이다. 친한 척하면서 말을 걸고 들어와 팔찌를 손목에 채운다 던 지 혹은 사진을 찍어 준다던지... 절대 강하게 대응해야 한다. 손목에 팔찌를 내어주는 순간 바로 10유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한국 욕은 만국 공통어. 의미는 전달이 되지 않겠지만 뉘앙스 만큼은 잘 전달이 되는 것 같다.




파리의 흔한 아침 출근길.우리에겐 여행의 출발길.



 방브 벼룩시장은 앤티크 빈티지 인테리어 소품의 천국이었다. 몇십 년도 더 된 소품들이 멋이라는 옷을 입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페 소품으로 쓰기에 좋은 제품들이 많았다. 찌그러진 펜던트 등이라던지 누가 쓰던 스위치라던지 정말로 없는 것이 없었다. 마치 황학동이나 동묘 시장에 와있는 듯한 느낌. 이런 유의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아니 두 번쯤 방문하여도 괜찮을 듯하다. 나 역시 몇 번이나 펜던트 등을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했었다.  

골목골목을 따라 구경을 하게 되면 어느덧 3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집집마다 판매되는 품목도 다르고 콘셉트도 제각각이다. 또 그 안의 상인과 손님들의 라이브 한 흥정 거림을 보는 게 즐거웠다.

 


녹이 슨 빨간 의자. 이런것도 판다.
중국인 고객과의 흥정.


머리가 떡진 모습으로 강아지 산책 나온 파리지엥


체스 한판 두는 상인들
물건은 팔건가?


흥정과 흥정
아직 보행중 담배가 허락되는 파리.
리암리슨 인줄..


아마도 모델 지망생인 듯한 소녀들




비를 피해 들린 테라스에서 찍은 사진
무지개


몇 시간 동안 시장 구경을 하고 탁 트인 파리를 보러 몽마르트르에 올랐다. 사퀴르케르 성당에서 물랭루주까지 이어지는 길은 가장 좋아하는 거리이기도 하다. 물론 예전에는 예술가와 보헤미안들이 모여 살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우리의 인사동, 북촌과 다를 바 없다.

그래도 그들이 남긴 흔적들이 아름다울 뿐.




메트로 출구




그리고 몽마르뜨 언덕, 사퀴르퀘르 성당.


야바위꾼의 농간에 혼을 빼앗긴 젊은 청년들



빛.

한참을 몽마르트르에서 시간을 보냈다. 저녁도 먹고 사진도 찍고 사람 구경도 하고 기념품도 샀다. 한참을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해가 지기 시작할 때쯤에 길을 나서는데 어디선가 구슬픈 기타 연주 소리가 들렸다. 한 거리의 음악가가 반쯤 취한 상태로 기타를 뜯고 있었다. 그 소리가 아니 그 모습이 그렇게 슬퍼 보였다. 듣는 이 아무도 없어도 그의 연주는 이어졌다. 옆에 놓인 술병이 그 분위기를 더했다. 수금함이 없는 것을 보니 그냥  혼자 흥에 취해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 구절 연주하다 말다 한 모금 마시고 또 연주를 이어가기를 반복 했다.

그 모습을 동영상으로 남겨오지 못한 게 뒤늦게 후회가 될 뿐.

아직도 그 특유의 분위기가 잊히질 않는다. 어쩌면 그대가 보헤미안.


구슬픈 멜로디를 퉁겼던 거리의 악사. 비닐로 가려진 술병에 마음이 빼앗겼다.






테라스의 사람들
택시드라이버





파리에서 짧은 3박.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 에어비앤비의 카피가 무색할 만큼 부지런히 먹고 걷고 찍었다. 마치 다시는 파리에 못 올 사람처럼. 휴양지에 여행 온 것이 아니라면 대기업을 때려치고 세계일주를 하지 않을 거라면 분명 여행은 그렇게 해야 마땅하다. 그 목적이 쇼핑 혹은 먹방이던지 한정된 시간을 최대한 쪼개며 생활하는 것.

나에겐 그런 것이 여행이다. 그리고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하기도 했다. 

 30년 전에 살았던 파리를 이렇게 몇 년에 한 번씩 여행차 돌아와서 보면, 파리는 참 잘 변하지 않는 도시인 것 같다. 그래서 다행이다. 그때의 기억과 추억을 더 쉽게 되살릴 수 있어서..

그리고 그때의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아직 파리에 남아 있어서 좋았다.

내가 다니던 교회, 우리 부모님과 친했던 어른들도 만났다. 그때마다 나를 반겨주는 모습에서 세월이 느껴지는 게 조금 슬프기도 했다.

아마도 그들은 미운 일곱살 시절의 어린 나를 기억하고 나는 그들의 젊고 당당했던 모습들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테러 이후로 무장 경찰들이 많아졌다
마레지구의 파란문 앞의 여자

30년 전의 파리의 모습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파리의 스카이라인에 감사하며 언젠가는 다시 이곳에 서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다음번에 오게 된다면 나의 가족과 함께 오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나의 딸에게 그러겠지.

믿기진 않겠지만 아빠는 아주 예전에 이곳에서 살았었더라고. 그땐 나도 파리지엥이었다고.

1987년 Paris.


다음 편은 몽쉘 미셀입니다.

https://www.instagram.com/rae_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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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여행을 떠나 사진과 글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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