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 속의 낙서
그 일이 일어난 건 그저 꿈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애니는 도서관 책상에 앉아 서가에 꽂힌 책들의 냄새를 맡으며, 그때의 일을 상기하려고 애썼다. 드문드문 남은 기억의 틈새로 폴의 얼굴이 보였고, 기억의 파편들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잔해처럼 흩어진 기억 속에서 간신히 건져 올린 폴.
폴은 애니와 마주 앉아 웃고 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난번과 달리 둘의 사이에 침묵이 종종 찾아든다. 버스가 지나간 뒤 정류장에 고요가 내려앉듯이.
그러나 애니는 이 침묵이 편하다. 심지어 느긋하게 침묵 속에서 여유를 느끼기까지 하는, 이런 본인이 신기하기도 하다.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을 앞에 둔 고요는 그녀를 불편하게 하곤 했던 것이다.
대화.
애니의 머리카락이 접시에 닿지 않도록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치우는 폴의 제스처.
애니는 그 시간들이 즐겁지만 동시에 그 시간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지나갈 걸 알고 있었다. 그건 마치 흘러가는 구름을 구경하는 것 같은 일.
'이건 진지한 일이 될 수 없어. 진짜라고 생각하면 안 돼,' 애니는 생각한다.
'나는 그의 여자친구가 아니고, 역시 그도 내 남자친구가 아니야. 나는 그에게 그 무엇도 될 수가 없고,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일뿐이야.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감정 문제가 아니라 일이야. 그 마음이 나와 같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