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유학 4년, 중국 대학교 졸업생의 마지막 회고록
나의 중국어 실력은 미묘한 어투의 변화나 감정을 표현하는 수준에 다다르기에는 아직도 한참 멀었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중국인들의 문학적 소양을 배우기 위해 중국인 초등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초등학생 수준에서 고등학생의 수준까지 올라가려면 얼마나 걸릴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2012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영어 시험을 끝내고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있다.
한국인이 한국어만 잘하면 됐지, 영어를 왜 배우냐?
당연히 농담이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시험이라는 이 순간만 지나고 나면 평생을 살아가면서 영어를 쓸 일도, 영어를 볼 일도 없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영어는 그저 시험을 위한 재료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 한순간을 위해 외우고, 그 한순간이 지나면 미련 없이 잊어버렸다.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두려움도 없었다. 왜냐하면 난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누구처럼 계획적이고, 똑똑하게 살지도 않았다. 그냥 당연한 건 당연한 대로, 상식적인 건 상식적인 대로 살았다. 애초에 나라는 인간 자체가 천재라고 불릴 수준도 아니었고, 똑똑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특별히 성실하지도 않았다. 딱 평범했다.
외국어 고등학교나 과학 고등학교 같은 특수 목적 고등학교에 다닌 것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공립 인문계 고등학교 문과 출신이었다. 집에 돈이 쩔쩔 끓어 넘치지도 않았다. 그냥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치킨을 먹어도 집안 기둥이 흔들릴 걱정을 하진 않아도 될 정도였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하굣길에 떡볶이를 먹을 수 있었다. 두 번은 좀 고민해 봐야 했다. 딱 그 정도였다.
나중에는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았다. OA, 네트워크, 리눅스, 비서 등등... 배우고 싶은 것들을 배워나갔고, 재미있어 보이는 일들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1년 정도 시간을 보내니, 꽤 많은 자격증이 쌓여있었다. 지원 자격이 빡빡하지 않은 어지간한 자격증은 모두 취득했던 것 같다.
그리고 2018년 가을, 난 그것들을 모두 버리고 중국으로 떠났다.
2018년 9월, 난 고작 HSK4급 하나만을 가진 채 중국에 발을 들였다. 중국 현지 학교를 졸업하지도 않았고, 국제 학교를 졸업하지도 않았고, 중국어를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도 없었다. 당시의 나는 중국어도, 영어도 할 수 없는 한국인이었다.
上有天堂,下有苏杭
하늘에 천당이 있다면,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
어릴 적부터 한 도시에서만 자랐던 나는 시각이 꽤 좁은 편이었다. 그리고 성인이 될 무렵 그 시야를 넓히고 싶었고, 그것이 바로 중국으로 오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넓은 땅, 많은 사람, 그리고 그 속에서 자라나고 있을 다양한 문화... 어딘가에서 보았던 하나의 문장은 내가 가게 될 도시에 대해 무한한 기대를 품게 했다.
하지만 기대와 현실은 확연히 달랐다. 막연히 생각했던 생활들은 순식간에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다가왔다. 지금 당장 잠을 잘 수 있는 숙소를 구하기 위해서는 중국어로 소통해야 했고, 지금 당장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중국어로 원하는 바를 표현해야 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저거” 밖에 없었다.
중국어를 잘 못하는 외국인으로서 나의 손과 발은 한시도 쉴 수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는 온몸으로 열정을 표현해야 했고, 하기 싫은 것에 대해서는 온갖 찡그린 표정과 함께 양손을 X자로 그어야 했다. 이처럼 내가 원하는 바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경험과 기억은 나에게 소통에 대한 두려움을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교에 입학한들 극적인 변화가 있을 일이 없었다. 가장 쉬운 유학생 대상 수업에 들어가서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숙소로 돌아오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주위에 수많은 중국인 학생이 있지만, 나에게 그들은 여전히 외국인이었다.
나에게 길을 묻진 않을까?
혹시나 나에게 말을 걸진 않을까?
그러면 어떻게 대답하지?
항상 대화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그건 점차 나를 숙소로 몰아넣었다. 수업에서 발표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아주 간단한 질문조차 속으로 수십 번을 고민하다 결국 말 한마디 못 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나의 중국 생활에 중국인은 없었다.
하지만 중국어를 못한다고 해서 중국 문화까지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절강대학에는 우수한 학생들이 가득했고, 그 학생들을 보고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외국인을 만나는 건 무서운 일이었지만, 최대한 피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최대한 그들을 만나고, 그 두려운 상황에 나 자신을 던져두려고 노력했다. 중국어를 못하는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배우고, 느끼고 싶었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모든 활동에는 참여 신청을 넣었다. 말 한마디를 못 하더라도 꼭 참여하려고 노력했다.
영어도, 중국어도 못했던 나는 최대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기 위해 노력했다. 사람들과 만나 말하진 못해도 다른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으니까.
어떤 표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어떻게 발음하는지
어느 상황에서 사용하는지
어떤 모습으로 표현하는지
대화에 집중해서 많은 표현을 습득했다. 무슨 뜻인지, 어떻게 적는지는 몰라도 일단 기억한 다음 똑같이 사용했다. 상대방이 내가 예상한 반응을 보이면 성공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웃고 넘어가면 된다. 나는 조금도 손해 볼 것이 없었다. 대화 속에서 많은 정보를 얻기도 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들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이렇게 하나씩 표현을 모아가며 나의 언어 습득 능력과 다양한 문화적 수용력을 상승시켜 나갔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많은 활동에 도전했지만, 나에게 중국인은 여전히 외국인이었고, 중국어는 여전히 외국어였다. 열심히 활동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바깥으로 나돌았다. 그리고 1년이 지난 그때 이제는 도전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우리 학교는 매년 9월 학교 내에 존재하는 모든 동아리가 신입 부원을 모집하는 “백단대전”이라는 행사가 있다. 입학하고 지나가다 본 적은 있었지만 언어의 장벽에 부딪혀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난 1년간 적지 않은 도전을 했고, 그것으로 난 나 자신이 어느 정도는 성장했을 거로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처음 마음먹고 “백단대전”을 구경하러 갔던 그날, 나는 진정한 대학생이 되었다.
백단대전은 나에게 놀라움을 주었다. 나랑 똑같은 학생들이, 혹은 나보다 더 어릴 수도 있는 학생들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을 찾고, 조직을 구성하고, 홍보하고 있었다. 그 광경은 너무나 놀라웠다.
나는 학생이다
난 알게 모르게 이러한 편견에 갇혀 있었다. 학생이기 때문에 보호받아야 하고, 아직 어리고, 아직 무언가를 제대로 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바라본 학생들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스스로, 주체적으로, 능동적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그것이 평범한 대학 생활이었다.
1학년 때 참가했던 활동 중에 '중국어 교실'이라는 활동이 있었다. 그것이 동아리의 활동이라는 것은 한참 뒤에나 알게 됐다. 당시에는 당연히 학교에서 진행하는 공식적인 행사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체계적이기도 했지만, 나의 편견 속에서 전혀 안면도 없는 학생들을 모집하고, 그들을 위해 이벤트를 기획하고, 기획대로 이벤트를 운영하는 등의 행위를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외국인 유학생에게 중국 문화를 알리는 활동을 주체적으로 구성하고 개최하면서 동아리를 운영했었다. 그리고 그때의 경험은 중국어를 하나도 못 했던 외국인인 나에게 굉장히 감사하고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그 동아리의 일원으로서 유학생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이 동아리를 포함해 내가 관심 있는 여러 동아리에 가입 신청서를 넣었다. 얼마 후 면접을 보러 오라는 문자를 받았다. 사실 두려웠다.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굉장히 떨리기도 하고, 면접 도중에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1년간 해왔던 것처럼 열심히 대답했고, 웃었고, 분위기에 스며들기 위해 노력했다.
문법을 틀리면 나를 비웃을지도 몰라
결과적으로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내가 조금 틀리더라도 그들은 날 놀리지 않았다. 아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발음이 조금 안 좋더라도, 열심히 내 말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건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누군가가 길을 걷던 나에게 어눌한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고 가정하자. 난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열심히 알아들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발음, 문법을 틀렸다고 한심하게 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정상이었다.
점차 변할 수 없을 것 같던 편견들이 점차 깨어지기 시작했다.
편견을 깨고 나니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중국어라서 애써 외면했던 것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내가 유학생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국제 유학생이다
수많은 활동을 경험하면서 난 조금 더 성장했다. 중국에 오지 않았다면, 절강대학에 오지 않았다면, 내가 국제 유학생이 아니었다면 할 수 없었던 귀중한 경험들이었다. 일본, 콩고, 가나, 볼리비아, 러시아, 카자흐스탄, 스페인, 캐나다 등등... 다양한 학생들 속에서 어울리며 수많은 문화와 언어를 접했고, 그들의 문화 속에서 새로운 시각을 얻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모든 국제 유학생 활동 연습에 참여하고, 수업을 듣고,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동아리 활동을 빠지기는 싫었다. 6시 30분에 일어나 수업 준비를 시작하고, 8시부터 수업을 들었다. 2학년이었던 나는 항상 25학점, 30학점씩 수업을 들었기에 하루하루가 수업으로 가득했다. 수업이 끝나면 동아리 친구들과 모여서 회의해야 했고, 집에 도착하면 저녁 11시가 됐다. 그리고 내일 수업 준비를 하거나, 숙제를 제출하고 나면 하루가 지나가 버렸다.
그렇지만 이 순간이 마냥 힘들기만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금만 가능한 귀중한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어는 분명히 어려운 언어다. 그리고 난 중국어를 배우고 싶어서 중국으로 왔다. 그래서 절강대학에서의 첫 번째 전공을 중국어 문학으로 정했다. 문학은 그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을 담은 언어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나는 문학을 읽고,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중국어를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학생의 필수 이수 과목인 기초 중국어 수업조차 두 번이나 불합격했다. 기초적인 생활조차 힘들었던 나에게 대학교 수업은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같았다.
수업이 끝나면 바로 숙소로 돌아가 복습을 시작했다. 2시간 동안 진행된 수업의 모르는 단어를 찾는 것만 2시간이 걸렸다. 내용을 이해하려고 하면 다시 2시간이 흘렀다. 4시간 동안 한 과목을 겨우겨우 정리했다.
책을 읽어보려고 소설책을 구매했지만, 글의 흐름을 이해하기는커녕 그 단어가 무슨 뜻인지 파악하기 급급했다. 단어를 찾고 정리하는 것에 모든 시간을 허비했다. 이런 일은 일상다반사였다. 이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정말 시각적으로 쫓아갈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과 교류를 시작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도전하면서 나의 중국어 실력은 조금씩 성장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책을 읽을 수 있게 됐고, 4시간씩 걸리던 공부는 1시간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때야 다시금 내가 있는 곳이 대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난 원래 언어를 배우고 싶었다. 중국어를 배우려고 중국에 왔다. 현재 시점에 존재하는 언어와 문화를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중국어 문학 전공의 커리큘럼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문학 수업이었다.
문학은 대부분 과거의 산물이다. 이미 쓰인 책, 이미 쓰인 글, 이미 쓰인 시... 그리고 문학 전공자라는 이름을 달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열심히 배워야 했다. 현대 중국어를 배울 기회도 있지만, 현대 중국어 수업은 고작 한두 개뿐이었다. 대부분이 오래된 문학이었고, 고대 중국어였다. 내가 배우고 싶은 현대의 중국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전공을 바꾸자
물론 고대 중국어와 오래된 문학을 배우게 되면 더욱 깊은 중국어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것을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하기에는 적합한 신분이 아니었다. 난 유학생이었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중국 학생들에게 주어진 시간보다 훨씬 짧았다. 가성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난 절강대학에서 가장 깊게 현재의 중국어를 배울 수 있는 곳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그렇게 내가 정한 전공은 중국어 교육학이었다.
3학년이 되면서 교육학으로 전공을 옮겼다. 그리고 교육학 전공은 문학 전공과 교양 수업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학점도 공통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즉, 난 2년 안에 한 전공의 4년에 해당하는 모든 수업에서 합격하지 않으면 졸업을 못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그곳에는 내가 배우고 싶은 수업들이 가득했고, 두려움보다는 설렘으로 가득했다.
난 사실 1학년 때부터 내가 듣고 싶은 수업을 찾아서 들었다. 일본어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어 전공 학생들이 듣는 수업을 찾아가서 듣곤 했다. 그렇게 찾아가니 나중에는 교수님이 일본어 전공 학생은 잘 몰라도 나는 기억하시더라.
일본어 수업에서 사용하는 교재에는 일본어로 원문이 적혀있고, 중국어로 그 해석이 적혀있다. 그리고 난 한국인이었다. 하지만 재미있었다. 일본어를 잘 못해서 읽기가 힘들었지만, 매일 밤 꼬박꼬박 예습했다. 다음 날 수업에서 진행할 부분을 미리미리 해석하고, 발음과 단어를 찾아서 수업에 참여했다. 교수님들은 다른 전공임에도 열심히 하는 내가 신기했는지, 수업 시간에는 항상 나와 수다를 떨었다. 결국 일본어에 대한 전문적인 수업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나였지만 절강대학에서 JLPT2급 수준(중급 일어 1)의 수업에서 통과했다. 그리고 그해 JLPT 1급에 합격했다.
언어를 배우는 건 정말 재미있었다. 단과 대학에서 주최한 다양한 활동에서 일본 친구를 만났고, 대화를 하면서 완성할 수 없는 문장을 만나거나, 잘 모르는 말을 듣는 등 일본어 관련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꼈던 부분들은 전공 수업을 통해서 채울 수 있었다. 그럴 때는 마치 흩어진 조각들이 퍼즐처럼 합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의 중국 유학 생활은 마치 모든 것이 도전으로 이루어져 있는 듯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아무것도 못 했던 나는 어느새 일본어와 중국어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난 이러한 도전의 연속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중국에서 인턴으로서 일을 해보고 싶었다. 나의 중국어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알아보고 싶기도 했다. 나의 실력으로 회사에서 일을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렇게 또 나를 좋게 봐주신 교민분의 추천을 통해 좋은 기회를 잡아 한 작은 회사의 인턴이 됐다.
처음에는 그저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했다. 중국어를 사용한 소통은 기본이어야 했다. 전문성 있는 단어를 알아야 했고, 프로젝트와 관련된 부분을 중국어로 분석하고, 분석한 자료를 이해하기 좋게 정리해서 전달해야 했다.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중국어를 통한 단순한 소통의 수준은 뛰어넘어야 했다.
하지만 즐거웠다. 하루하루가 배움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수업을 듣고, 숙제를 하고,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출근했다. 모든 활동을 하면서 출근까지 하기 시작하니 다른 유학생들처럼 여행을 가는 것 따위는 꿈도 꾸지 못했다. 조금도 쉴 수 없었다. 출근해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렇게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다. 결국 이 회사의 인정을 받아 내가 그만두겠다고 의사를 밝힌 그 이후에도 남아있을 것을 제안받았다. 아직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난 10개월간 이곳에서 학생이 아닌, 한 분야의 책임자가 가져야 하는 사회를 배웠기 때문이다.
절강대학은 중국에서 굉장히 우수한 대학교이다. 미국의 우수 대학을 아이비리그라고 부르는 것처럼, 중국에서는 우수 대학들을 985 211 双一流라고 부른다. 그리고 절강대학은 그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최고의 대학이다. 그러나 외국인의 입장에서 입학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내가 입학할 때는 HSK 4급 증서만 있어도 합격이 가능했고, 그래서 많은 유학생들이 쉽게 도전했다. 그러나 졸업은 별개의 문제였다.
만약 유학생이라서 쉽게 졸업할 수 있다면 그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런 상황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상황일 것이다. 우수한 중국 학생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졸업을 못해야 한다. 만약 자기 능력이 부족하다면 당연히 노력해야 한다.
나는 중국어를 잘하지 못한 채로 입학했고, 초기에는 기초 중국어 수업도 제대로 듣지 못하였으며, 2학년 마지막 학기에 전공을 바꾸었고, 그래서 2년 안에 수많은 학점을 이수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쳤었다. 만약 내가 이런 상황에서조차 자신을 갈고닦으며 도전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만 있었다면 사실상 졸업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중국 대학교의 4학년 학생은 4학년이 되자마자 개인이 주도하여 하나의 완성된 논문을 작성해야 하고 그것을 졸업 논문으로 제출해야 한다. 논문 주제는 교수님이 정해주거나 자신이 정할 수 있었는데, 나는 마침 하고 싶은 연구가 있었다.
중국에 오래 살았던 한국인인데, 왜 이렇게 발음이 좋지 않을까?
구어 능력과 어법 능력이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많은 사람을 만나고 소통하면서 항상 궁금했던 것이 있었다. 그리고 이 답은 학교에서 들었던 한 이론 수업에서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었다. 미국의 유명 언어학자인 크라센이 발표한 제2 언어 습득 이론을 배우는 그 순간, 머릿속에는 한 문장이 떠올랐다.
어? 이거 내가 겪어본 일들인데?
난 중국어를 못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많은 일을 겪었고, 중국어를 못하면 왜 못하는지, 잘하면 왜 잘하는지 잘 이해하고 있었다. 대화에서 어떤 부분이 가장 중요한지, 어떻게 하면 상대방이 더 잘 알아듣고, 더 잘 이해하는지에 대해서 경험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난 이것을 언어학자의 이론으로 실증해 보고 싶었다. 이것을 실증하는 연구를 통해 유학생들을 돕고 싶었다. 유학생들이 나의 논문으로 자신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중국어 학습에 도움을 받기를 원했다.
이러한 행위는 나의 졸업에 악영향을 미쳤다. 내가 선택한 졸업 논문 주제도 쉽지 않은 주제였고, 내가 처한 상황도 바쁘고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일이었고, 어떻게든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했다.
학교 수업 중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바로 교수님께 연락했다. 교수님께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고, 그러면 교수님들은 수업이 끝난 후, 너는 잘 이해가 됐는지, 어렵지는 않았는지 물어봐 주셨다. 조금은 못하더라도 열심히 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면 교수님들은 도와주려고 하셨다. 논문도 똑같았다. 열심히 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면 교수님은 언제나 흔쾌히 의견을 주셨다.
바쁜 4학년을 보내면서도 나의 미래에 어떤 것을 하는 게 좋을지 고민했다. 내가 잘하는 것은 무엇이고,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래서 3학년 여름방학에 같은 지역의 대기업에 인턴으로 지원했다. 내가 잘하는 것과 내가 해보고 싶은 것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 좋게 이곳에서 능력 있는 사수를 만났다. 그에게 많은 것을 배웠고, 점차 이곳에서 나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인턴으로서 작은 일들을 했던 나는 1년이 지난 지금 한 프로젝트의 전체 현지화를 책임져야 하는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 전문가로서 한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내가 필요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좋은 기회를 통해 정식 입사가 결정됐다. 중국 최고의 대학을 졸업한 나는 이제 중국 최고의 현지 대기업 현지화 전문가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난 내가 4년이라는 기간 동안 적지 않은 성장을 했다고 생각한다. 중국어와 한국어는 전문가로서 인정받게 됐고, 일본어는 JLPT 1급은 물론이고 일본인 친구와 소통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작년에는 스페인어 A2급에 도전해서 합격했다.
이 모든 것은 4년 전에는 전혀 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난 4년간 유학 생활을 통해 이 모든 것을 배울 기회를 얻었고, 그 기회를 모두 잡으려 노력했다. 나에게 대학생 4년은 그 어떤 시간보다 가치 있고 소중한 기억들과 추억으로 가득하다.
난 똑똑한 사람도 아니고, 천재도 아니고, 재능이 뛰어나지도 않고, 특출나게 성실하지도 않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걸 찾으려고 노력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도전을 했을 뿐이었다.
4년의 생활에서 나쁜 사람도 정말 많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꼭 좋은 사람 한두 사람은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서 많은 걸 배웠다.
왜 하는 거예요?
졸업 후, 회사에 다니는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서 모교에 재학 중인 학생을 위한 정보 교류 활동을 시작한 나에게 누군가 이런 말을 했었다. 유학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같은 의문을 가질 만하다. 당연하게도 유학생 모두가 간절하고, 또 열심히 생활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간을 내서 선의의 도움을 주려 한들, 원하는 결과를 얻기는 힘들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때는 다른 이유로 둘러댔지만, 사실 내가 좋은 사람들에게 받은 걸 어떤 형식으로든 나누고 싶다는 이유가 시작의 동기로 작용했다.
고작 정보 따위가 부족해서 내가 어려웠던 일들이 많았다. 만약 한 명이라도 열심히 하고 싶지만 나와 같은 상태인 학생이 있고, 그들이 도움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참으로 멋지게 마무리하셨네요
누군가가 나에게 해줬던 말처럼, 참으로 좋은 기회로, 나쁘지 않게 4년의 생활을 마무리한 것 같다.
2022년
2012년으로부터 딱 10년 지났다. 언젠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10년 후의 나에게'라는 촌스러운 코너를 했었다. 하지만 그걸 보면서도 여기서 말하는 10년 후를 맞이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10년 전, 영어를 왜 배우냐고 말했던 나는 지금 중국어, 일본어, 스페인어, 영어를 할 수 있게 됐고, 3개의 어학 자격과 그동안 취득한 각종 국가 공인, 국가 기술, 국제 자격을 더하면 30개가 넘는 자격을 보유하게 됐다.
이렇게 보면 참으로 재미있게 살아온 것 같다
하지만 난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다
내일도 내가 뭘 하면 가장 재미있을지에 대해서 고민할 예정이다
인용 참고 자료
인물 인터뷰 | 병욱 : 멋진 미래를 향해 돛을 펼쳐라, 발행: 절강대학 국제교육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