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는 번아웃의 정의, 그리고 그걸 만나는 순간
올해 3월 중순쯤부터 번아웃이 왔다. 아니, 번아웃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은 순간이 왔다. 그리고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는 걸 보면 결론적으로는 어느 정도 잘 이겨낸 것 같다. 지금은 최소한 뭘 해야 할지 보인다. 사그라들어 재까지 삼켜버린 삶의 동력이 조금은 되살아 난 것 같다.
난 번아웃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짧으면 짧고, 길면 긴 시간 동안 겪었던 그 시간을 나 자신도 번아웃이라 정의한다. 그리고 정말 번아웃이라고 부를 만한 시기는 참 힘들고 어려운 시기라는 게 피부에 와닿더라.
평범한 나였다면 12시간씩 회사에 있다가도 저녁에는 헬스장에 들러서 운동 한 시간을 했을 것이고, 집에서는 최소한 무언가 쌓이는 일들을 했을 것이다. 10년 이상 지켜왔던 11시 취침, 6시 30분 기상도 당연히 그렇게 했을 거고, 항상 커리어를 고민하고, 다음 한 걸음을 계획했을 것이다.
하지만 번아웃 기간에는 아무것도 하기 싫더라, 그게 어떤 이유였든, 그걸 가만히 앉아서 고찰하고 해결 방법을 모색하는 것조차 하기 싫었다. 모든 길이 멈춘 것 같더라.
그래서 이렇게 번아웃이 어느 정도 지난 지금, 다시 그때를 되돌아보며 글을 써본다. 다음 번아웃을 기다리면서, 그리고 다음 번아웃을 준비하면서...
공백 제외: 4480자
1. 정의를 하는 순간 그건 변명이 된다
2. 번아웃은 무언가를 태워야 한다
3. 번아웃을 버티는 방법
-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라
-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도 좋다, 하지만 시간을 지켜라
- 번아웃은 돌아온다. 다음을 준비하라
난 불필요하게 많은 정의를 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정의... 즉, 프레임을 씌우는 걸 싫어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한국에서만 종교가 된 MBTI가 있다. 단순한 재미로 알아보는 걸 넘어 MBTI만으로 사람의 모든 면을 보지도 않고 판단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책 목차를 보지도 않고, 책 제목으로 모든 내용을 추측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라는 책의 제목을 보고 '기술이 발달해서 행복이 가득한 파라다이스 신세계'라고 판단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책 제목은 내용을 근거로 한 함축과 역설이라도 존재하는데, 이 한국판 성격 검사는 그런 근거조차 없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부분은 기존의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인격체가 MBTI를 통해 그 프레임에 스스로를 가두는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난 I니까, 소심한 건 당연한 거야!
난 번아웃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걷고 싶지 않아 질 때가 오는 건 들판에 부는 바람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뛰다가 지치면 걸으면 된다. 걷다가 지치면 앉으면 된다. 그것도 싫다면 누워버리면 된다. 그냥 자연스러운 걸음의 과정이다. 하지만 이걸 번아웃으로 정의해 버리곤 모든 생각과 과정을 번아웃 탓으로 돌린다.
나, 번아웃 왔네! 내가 지금 눕고 싶은 건 당연한 거야. 어쩔 수 없어, 해결할 수 없는 일이야!
만약 이 세상에서 살인 사건을 일으킨 범인들을 모두 사이코패스라고 부른다면 그 사회는 혼란만 가중될 것이다. 정말 사이코패스의 특성을 보이는 특정 집단 혹은 개인만을 사이코패스라 정의하는 것이 타당하다. 즉, 번아웃의 특성을 보이는 몇몇 행위만 번아웃이라 정의하는 게 타당하다. 그게 아니라면 번아웃에게 모든 걸 떠맡기지 말고 스스로 해결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래서 난 내가 겪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그 순간'을 어지간하면 번아웃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번아웃으로 정의했다가 그걸 변명 삼아 자기 합리화나 하는 순간을 지양한다, 그건 그 상황을 해결하는 데에 전혀 도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번아웃이 온 것 같았다. 왜냐면 확실히 무언가를 'burn' 했으니까.
잠깐 집중 안 되는 걸 번아웃이라고 부르고, 그냥 하기 싫은 게으름을 번아웃이라 부르면 세상 모든 변명이 번아웃으로 가득 찰 것이다. 번아웃은 무언가를 태운 뒤에 보인다. 방구석에 누워 유튜브와 틱톡으로 전두엽을 태운 건 포함하지 않는다. 스트레스를 받을 만큼 신경을 쓴 뒤에야 비로소 번아웃이라 부를 수 있다.
나도 이 때문에 내가 겪은 그 시기가 번아웃이었을 거로 생각한다. 작년 말, 새로운 도전과 발전을 위해 잘 다니고 있던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회사로 이직한 뒤, 역시 도전이라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내가 가진 모든 걸 다 버려야 했고, 철저한 을의 입장에서 모든 걸 다시 쌓아야 했다. 관리를 하던 위치에서 관리를 받는 위치로 바뀌니 새롭게 적응할 부분이 가득했다. 게다가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끝없는 평가를 받아야 했고, 직무 특성상 개개인의 성적표가 확실해서 안 그래도 '능력주의'를 사훈으로 삼은 회사에서 직무까지 '능력주의'에 확실한 이정표가 되니 스트레스가 끝없이 밀려오더라.
계속 누군가에게 '피드백'이라고 부르는 '매'를 맞아야 하고, 항상 '심사위원'의 마음에 들도록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한다. 내 개인 의견과 취향은 꺼낼 데도, 때도 아니다. '심사위원'의 심사가 맞든 틀리든 그 또한 고려할 바가 아니다. 그걸 따질 시간에 상대방의 요구치에 맞추는 게 훨씬 더 싸게 먹힌다. 그리고 그것 또한 실력이라고, 최소한 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6개월간 정말 신경 많이 썼다. 실제로 같이 입사했던 친구가 그 6개월을 못 버티고 '실력 부족'으로 잘리고, 부서 인원이 '능력 부족'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점차 줄어가는 걸 보면서 '나도 저 칼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라는 압박감 속에서 그 시간을 보냈다. 저 상대방의 마음에 들지 못하는 순간, 난 당장 팀원들이 수군거리는 '실력이 없어서 잘렸다던데요?'라는 그 한마디의 주제가 될 거라 확신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실력 부족, 능력 부족'이라는 이유로 회사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정말 6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날 살얼음판도 아닌, 칼날의 끝에서 걷게 하더라. 회사가 구조 조정을 한다, 회사가 분사한다, 다른 그 어떤 이유보다 '넌 능력이 없으니까, 필요 없어'라는 말은 마치 목을 옥죄는 듯한 기분을 준다.
이런 환경이다 보니 'burn'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서도 마음 편히 쉬질 못했고, 팀원들이 저런 가십거리로 하하 호호 웃는 걸 옆에서 장단 맞추면서도 속은 문드러져 갔다. 그래서 그런지 운동도 못 하겠더라. 헬스장에 가서 땀을 빼면 좋다? 운동으로 정신을 다른 데로 돌려라? 아니, 바벨 20kg을 밀면서도 딴생각하는데, 고중량으로 가면 깔려 죽을 게 분명했다. 유산소를 하더라도 속이 상해서 오래 달리질 못하더라.
회사에 와서는 피드백을 올려두는 문서를 클릭하기가 두려웠다. 또 얼마나 많은 피드백이 날 기다릴지, 그냥 잘리기 전에 내가 먼저 그만둘지 하루하루가 선택의 순간이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난 무렵, 난 다행스럽게도 그 도전에서 도태되지 않았다. 이 회사로 이직했던 이유 중 하나가 나 자신을 향한 시험과 도전이었다. 사실 이런 상황도 예상했던 상황 중 하나였다. 난 이런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도 버텨내는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그 속에서 분명 많은 걸 배우고, 또 느끼면서 성장할 수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예상하지 못한 건, 그 경험이 생각보다 큰 스트레스를 가져다줬다는 거고, 자칫하면 모든 걸 포기할 뻔했다는 것 정도다.
내가 겪었던 6개월이란 시간은 어쩌면 조금 독특할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에게 이런 특수한 상황과 환경이 조성되며 정말 무언가를 불태워야 하는 시기가 찾아오진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로의 상황 속에서 조금은 모양이 다르더라도 비슷한 시기가 찾아와서 스스로를 불태운 뒤 재만 남는 경우는 많을 거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때 어떻게 버텨야 할까?
번아웃이라고 생각된다고 해서 모든 삶의 고리를 풀어버리면 안 된다. 그러면 절대 돌아오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리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유지해야 하는 건 또 아니다. 자기가 살아가는 삶의 루틴에서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예를 들어서 난 원래 일주일에 여섯 번 헬스장에 간다. 그리고 가슴, 등, 하체 세 부분으로 나눈 루틴을 두 번 시행한다. 하루는 쉬는 날이다. 그리고 번아웃이 올 때는 일주일에 여섯 번 가던 헬스장을 세 번까지 가는 걸로 마음을 먹는다. 여섯 번 갈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운동이 전혀 손에 잡히지 않는다면, 마음이 그렇게 불편하다면 그냥 세 번만 가서 루틴 한 번만 하는 걸로 자기 삶의 고리를 살짝 풀어준다.
게다가 원래 헬스장에 가면 1시간 유산소에 30분 웨이트를 하는데, 고리를 푸는 시기에는 헬스장에 갔다는 것에 의미를 둔다. 유산소 15분에 웨이트 15분도 괜찮다. 총 1시간 30분 하던 운동을 그냥 30분으로 줄여버린다. 웨이트 하기 싫은 날은 그냥 유산소만 잠깐 하고 와도 된다. 중요한 건 자기 삶의 고리를 완전히 놓진 않는 것이다.
항상 다음 한 걸음을 준비해야 하고, 회사에 다니면서 사이드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친구들과 약속도 잡고, 영화도 보고, 여행을 보는 등 시간에 꼭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된다. 원래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일을 하던 그 시간을 그냥 무의미하게 보내도 된다. 가만히 누워있거나, 의미 없는 유튜브 쇼츠나 인스타 릴스를 넘겨봐도 좋다.
중요한 건 그 시간을 지키는 것이다. 난 원래 매일 저녁 퇴근과 운동이 끝난 밤 10시쯤부터 취침 전까지의 시간을 공부나 계획 등의 시간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11시엔 무조건 정리하고 잠을 잤다. 하지만 번아웃이 찾아오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공부? 계획? 잠이나 잘 자면 다행이다. 그래서 난 그 시간에 그냥 유튜브나 봤다. 인생 살며 전혀 도움 안 되는 그런 걸 보고 또 봤다. 그러다 보니 11시에 잠을 못 자겠더라, 12시에도 졸리지 않았다. 그래서 난 그냥 내 취침 시간 기준을 12시 전후로 밀어버렸다. 어느 날은 새벽 1시에 잘 때도 있었다. 그렇게 취침 시간에 대한 기준을 살짝 여유롭게 잡는 대신, 그 시간은 꼭 지킬 수 있도록 했다.
그러다 보니 원래의 삶보다는 살짝 피곤할 때도 있고, 건설적이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그 시기가 막 괴롭진 않았다. 자기를 너무 괴롭히지 않는 게 중요하다.
번아웃은 주기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한번 왔다고 해서 이젠 더 이상 볼 일 없는 게 아니다. 주기를 가지고 정기적으로 찾아온다. 그러니까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
또 이렇게 힘들어야 해?
하지만 첫 번째 번아웃과 두 번째 번아웃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그건 바로 내성이 길러진다는 것이다. 메르스든, 사스든, 코로나든, 전 세계를 강타한 전염병들은 지구에서 사라진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내성을 가졌고, 해결 방법을 잘 안다는 것이다. 독감 사망자가 많다고 해서 우리가 독감을 무서워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우린 치료할 수 있으니까.
번아웃도 그렇다. 처음 번아웃을 겪으면 사람이 완전히 망가질지도 모른다. 삶의 루틴이 엉망으로 변하면서 표면적으로는 살이 많이 찌거나, 피부가 안 좋아질 수도 있고, 보이지 않는 내면에서는 성격이 바뀔 수도 있고, 자신감이 떨어지고 소심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걸 한번 겪고, 또 제대로 극복한 사람은 다음 번아웃에서 그것보단 덜 망가진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건 자기가 번아웃인지 아닌지 확실히 '진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번아웃이라면 찬찬히 삶의 고리를 느슨하게 풀어보자. 너무 꽉 조이진 말고, 찬찬히 풀어서 전체적인 삶의 밸런스를 잡아보자. 그래도 망가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확실한 건, 예전보단 덜 망가질 것이다.
번아웃이 왔다는 건 뭔가를 태웠다는 뜻이다. 짧든 길든 어떤 순간을 열심히 살았다는 삶의 증거라는 거고, 그렇기에 그게 부끄럽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당연하고도 필수 불가결한 일이다.
중요한 건 그걸 어떻게 잘 버텨내느냐, 어떻게 잘 준비하느냐다. 잘 준비한 사람은 그 삶의 선을 많이 안 벗어나면서도 그 시기를 잘 보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다음에 찾아올 번아웃을 위해 열심히 살고, 또 준비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