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 딜 EP33

Ⅸ. 가을 남자 ①

by 랜덤초이

가을


10월이 되자 이제는 늦더위가 물러가고 완연한 가을 분위기가 느껴졌다.


아침 일찍 등교를 위해 집을 나섰을 때

차가운 공기가 폐로 들어오자 선우는 문득 군복무 시절 초소 근무를 하던 당시의 기분이 들었다.


제대하고 자유의 몸으로 처음 느끼는 가을이 선우의 멜랑콜리한 감성을 자극해서인지

선우는 메신저 프로필에 올려뒀던 여름의 과일빙수 사진을 가을 분위기로 바꿔보려 했다.


길가에 만개한 분홍색 코스모스가 가을햇살에 그 색을 더 뽐내고 있었고,

선우는 접사로 찍은 코스모스 사진을 프로필 사진에 바꿔 올렸다.


프로필 소개글은 어떻게 바꿀까 고민하던 선우는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란 글을 적어보았다.


지하철에서 운 좋게 자리를 잡아 앉아 이동하던 중

선우는 급하게 바꿔놓은 메신저의 프로필 소개글이 너무 옛날 감성이라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의 놀림이 걱정되었던 선우는 급하게 '가을남자'라는 뜻의 한자 '秋男(추남)'으로 프로필을 다시 변경해 두었다.


그런데 학교 앞 지하철역에 도착할 때가 되자 이번에는 친구들이 '秋男(추남)'을 '얼굴이 못생긴 남자'라는 뜻의 '추남(醜男)'으로 몰아가서 놀릴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황급히 다시 바꾼 세 번째 프로필 소개글은 'the fall guy'였다.


선우는 자신의 의도를 영어로 바꿔서 적어 놓고서야 이제 좀 안심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늘은 우지훈 교수의 경영사례 분석 세미나 준비를 위해 조원들과 아침 일찍 미팅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선우는 약속 시간에 겨우 맞춰서 'Cafe cordial'에 도착했다.


사장인 소연에게서 다른 조원들은 모두들 이미 세미나룸에서 기다린다는 얘기를 듣자

선우는 콜드브루 커피를 주문하고 서둘러 세미나룸으로 들어갔다.


"어 미안하다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지?"

그런데 세미나실에 먼저 모여있던 다른 조원들이 선우를 반기는 분위기가 영 이상했다.



"어 추남 왔는가?" 천희의 인사에 선우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지현은 천희에게 한마디를 건넸는데, 그 얘기도 결국은 선우가 들으라는 내용이었다.


"오빠 추남이라뇨 그렇게 얘기하면 사람들이 오해해요. '가을남자'라고 하셔야죠"


입을 가리고 키득대는 승희의 반응을 보니 역시 조원 모두가 오늘 아침 선우가 프로필을 바꾼 모든 상황을 다 알고 있는 듯했다.


선우가 당황하여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이고 있을 때,

소연 선배가 선우의 커피를 전해주러 들어왔고 선우를 제외한 모두가 웃고 있는 상황이 궁금했던 소연에게 지현은 간단하게 아침에 있었던 일의 전말을 알려줬다.


지현이 설명한 내용은 선우에게도 충분히 이해되었다.


평소보다 일찍 Cafe에 도착한 천희가 선우에게 언제 도착할지를 묻기 위해 메신저앱을 열었을 때

선우의 '업데이트한 프로필'이 보였던 것이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란 감성 터지는 표현에 천희는 웃음이 터졌고

천희 다음으로 지현과 승희가 함께 도착하자, 그들에게 선우의 업데이트된 프로필을 확인하라고 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둘이 다시 확인했을 땐 이미 선우의 프로필이 '秋男(추남)'으로 바뀐 이후였다.


그리고 설명을 마친 지현이 다시 선우의 프로필 소개글을 확인할 때

그의 소개글은 또다시 'the fall guy'로 바뀌어 있었다.



앞서의 사정을 설명하는 와중에 또다시 프로필 소개글이 바뀐 걸 알자 조원들은 다시 키득키득 웃음이 터졌고, 천희는 못 참겠다는 듯 선우에게 얘기했다.


"야 너 진짜 가을을 엄청나게 타는구나. 그래 내가 너 가을 남자라고 인정할게"


선우는 단풍처럼 빨갛게 귀가 물든 체 다른 사람들을 따라 웃을 수 없었고,

세미나룸에 웃지 않는 사람은 선우 말고도 한 명이 더 있었다.




후배들의 웃음이 잦아들 때쯤 소연은 그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너희들 혹시 fall guy가 원래 어떤 때 쓰는 말인지 아니?"


"그냥 가을 남자 아닌가요?" 승희가 되물었다.


"Scapegoat라는 말이 있어 우리말로는 '희생양' 또는 '속죄양'이란 뜻이야

옛날에는 종교적 풍습 같은 걸로 양이나 염소를 제물로 바치던 일에서 유래한 건데

요즘은 어떤 집단을 대신해서 비난받거나 억울하게 다른 이들의 책임을 뒤집어쓴 사람을 얘기해

fall guy는 Scapegoat와 비슷한 뜻으로 쓰이는 단어야"


선우를 포함한 모두는 fall guy란 단어의 진짜 의미를 몰랐었다.

그저 가을남자란 의미로 알고 쓴 단어가 사실은 '타인의 죄에 대해 대신 벌을 받는 사람'이란 의미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되자 14조의 놀라움은 컸다.


소연은 모두가 전혀 몰랐던 눈치이자 이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사실 우리나라 직장인들이 쓰는 말에도 이런 표현이 있어

너희들 '욕받이'라고 들어봤니?"


"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잘못한 일에 대해 대신 욕을 먹는 경우를 말하는 거 아닌가요?

직장 다니는 삼촌들이 얘기하는 걸 들어본 적 있어요" 천희가 자신의 경험을 얘기했다.


"그래 사실 회사 같은 큰 조직에서 힘없는 누군가에게 잘못된 일에 대해 억울한 책임을 지우는 일은

자주 볼 수 있는 일이야

그래도 보통은 대신 욕을 먹고 마는 정도인데,

어떤 경우엔 법적 책임이나 인사적 불이익을 감당하도록 만드는 경우도 있어

그러니까 선우야

가을 남자를 하고 싶어도 fall guy란 단어는 바꾸는 게 좋을 거야

영어에 익숙한 사람들은 네 프로필 소개글을 보고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일 테니까"


선우는 소연의 얘기를 듣고 서둘러 프로필 소개글을 지웠고

지현은 궁금한 것이 생긴 듯 소연에게 물었다.


"선배님 그런데 scapegoat나 fall guy 같은 단어는 보통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안 쓰는 단어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정확한 의미를 알고 계세요?"


잠시 대답을 망설이던 소연은 간단히 대답하고 세미나룸을 나갔다.


"응 나랑 가까운 사람이 그런 일을 좀 세게 당해서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잡지식이 좀 생겼지 ㅎㅎ

그럼 세미나들 잘해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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