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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구 May 31. 2024

비전공자 5일의 전사, ADsP 후기

정말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지난 5월 11일, 제41회 ADSP (데이터분석 준전문가) 시험을 봤다.


사실 이미 취업해서 회사 멀쩡히 다니는 직장인으로서 스펙 쌓을 필요도 없었고, 그렇다고 실무와 관련 있는 것도 아니었고, 직종전환을 한다거나 승진심사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냥 한 번 시도해 봤다.


그 이유로 첫 번째는, 우선 엑셀로 겨우 피벗 정도만 돌리는 주제에 너무도 쉽게 '데이터 분석'을 한다고 말해왔는데 진짜 '데이터 분석'이 무엇인지에 대해 순수한 호기심이 생겼다. 이걸 공부한다고 감히 '데이터 분석'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데이터 분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두 번째는, 오랫동안 나를 잠식하던 '무력감'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내 최근 브런치 글들을 몇 번 읽어본 사람들은 눈치챘겠지만, 지난 3~4월 봄에 난 깊은 우울감과 상실감에 빠져 있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겪은 사소한 일들이 모여서 한 번에 터진 것인데, 그로 인해 한동안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력한 상태가 이어졌었다. 그렇게 예쁜 봄을 아주 파괴적으로 보내고 나니,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서 더 싫었다. 그래서 어느 주말, 큰맘 먹고 밖엘 나왔고 서점에서 ADSP 자격증 시험 책을 보게 됐다. 해당 자격증을 검색해 보니, 필기만 있고 내용도 어렵지 않아서 비전공자도 조금만 공부하면 딸 수 있다는 후기들이 많았다. 왜인지 스스로를 한 번 테스트해보고 싶었고 충동적으로 책을 구매했다.





한 달 전에 신청하고 일주일 전부터 공부하기


나의 가장 고질적인 병은 '미루기'이다. 대학 시절에도 이 '미루기' 습관 때문에 한 번도 멀쩡히 시험공부를 해본 적이 없었다. 시험범위 분량을 보면, 여러 경험치를 통해 적어도 '일주일'은 공부해야 한다는 예측치가 나오는 데도 그대로 실행하는 경우가 없다. 결국 미루고 미루다가 이틀이나 하루 전이 되어서야 울며 불며 책을 펴는 것이다. 과거의 나를 잔뜩 원망하면서.


이번 ADSP 시험도 '아니나 다를까'였다. 책을 사고 시험을 신청한 건 무려 한 달 전이었지만, 시간이 많다는 안정감 때문이었는지 곧바로 공부를 시작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막상 책을 훑어보니 어려워 보이는 용어들이 흥미를 떨어뜨렸다. 그래도 유튜브에 벼락치기 강의들이 많으니, 일주일만 공부하고도 땄다는 사람도 있으니, 조금만 늦게 시작해도 따라잡겠지 하는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렇게 한 달 중에 3주를 팽팽 놀다가 일주일을 남기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오늘부터는 진짜로 공부를 해야만 한다."





강의는 무조건 들어야 하는 이유


처음엔 이 시험이 합격률도 나름 높고, 모두 객관식이라고 해서 조금 우습게 봤던 것도 있다. (시험장에서 정말 큰코다쳤지만 말이다). 그래서 기출문제는 없지만 컴활처럼 모의고사를 몇 번 돌리면 눈에 익는 문제가 나와서 풀 수 있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1,2과목은 어찌어찌 그런 식으로 풀 수 있게 된다 쳐도, 여러 가지 통계 기법을 다루는 3과목 '데이터 분석'의 경우 개념이 없으면 아예 문제를 풀 수가 없었다. 처음엔 1,2과목처럼 밑줄 쫙쫙 그어가며 중요한 키워드 위주로 머릿속에 집어넣으려고 했는데, 통계학적 지식이 아예 없다 보니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정말 힘들었다. 결국 모든 파트는 듣지 못하고, 일부 중요한 파트 (가설검정, 회귀분석 등)에 대해서만 강의를 들었는데 개념이 이해되니 확실히 문제가 훨씬 잘 풀려서 도움이 됐다.


사실 책으로 개념 공부를 할 수도 있지만, 3과목은 다소 생소한 통계 기법에 대해서 설명하는 파트이기 때문에 비전공자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요약 강의라도 들으면서 대충이라도 이해해야 나중에 책을 봐도 훨씬 잘 읽힌다.


실제 시험장에서도 기출문제를 그대로 답습하기보다는, 개념을 이해해야만 풀 수 있는 변형 문제가 많이 나왔기 때문에 개념에 대한 이해가 훨씬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시험 합격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완벽하게 모든 파트의 개념을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은 불필요하고, 3과목 위주로 개념 공부를 확실히 해두는 것이 도움이 많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시험장에서 겪은 아노미 상태


저렇게 겨우 5일 공부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5일간은 나름 열심히 공부한 덕에 (퇴근하고 매일 4시간 이상씩) 마지막날쯤에는 문제집에 있는 모의고사를 풀었을 때 합격권의 점수가 계속 나올 정도는 됐었다.


그리고도 불안해서 당일 아침에도 일찍 준비하고 나와서 시험장에서 추가 공부를 했다. 그리고 시험 직전 소지품을 집어넣기 직전까지 본 모의고사의 점수는 80점대. 그래도 이쯤이면 떨어지진 않겠구나 옅은 미소를 띠고 시험지를 받았다.


호기롭게 1과목부터 푸는데, 약간 알쏭달쏭한 문제들이 몇 개 있었다. 은근히 쉬우면서도 헷갈리는 부분이 많아서 점수 나가기 쉬운 1과목이기에 긴장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눈에 힘을 줘도, 명확하게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많아서 찝찝했다.


그리고 2과목. 2과목도 마찬가지로 1과목처럼 전부 풀 수는 있으나 헷갈리는 문제가 다소 있었다. 결국 나중에 검토해 봐야지 하고 별표를 몇 개 치고 넘어갔다.


그런데 3과목 첫 페이지부터 당황스러웠다. 시간문제상 공부를 제대로 못한 파트가 있었는데, 언뜻 봐도 그 파트에서만 문제가 3문제 이상 나온 것 같았다. 게다가 공부를 충분히 했다고 생각한 파트에서도, 늘 나오는 문제형 식이 아닌 처음 보는 문제들이 튀어나왔다. 용어도 생소하고 계산도 안 맞았다. 명확하게 풀리는 건 거의 없고 한 페이지의 반 이상이 별표로 채워지는 것을 보며 속으로 직감했다. "아, 망했다!"


억지로 문제를 꾸역꾸역 풀면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건 푼다기보단 찍는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공부를 더 일찍 시작하지 않은 나에게 첫 번째로 원망이 들었다가, 동시에 의아함이 들었다. 그래도 난 교재에 있는 모의고사는 80점대 맞을 정도까지 공부를 한 건데... 이건 공부를 안 했다기보단 잘못한 게 아닌가? 내가 이런 걸 공부했었나 싶을 정도로 생소한 문제들을 보면서, 잠깐 교재가 불량은 아닐지 의심하기도 했다. 아무튼 머릿속이 완전 '아노미'였다.


시험장을 나오고 나서 든 생각은, 이거 정말 잘하면 턱걸이로 붙고 떨어져도 할 말 없겠다였다. 고득점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자체가 없었다. 고작 일주일이긴 했지만 공부한다고 여기저기 말해놨는데, 동료나 친구들한텐 뭐라고 말하지 창피했다. 그나마 시험 후기를 올리는 커뮤니티에서 여기저기 시험이 어려웠다는 후기들이 많은 걸 보고 나서야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하고 안도했다.




비전공자, 5일의 전사가 해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기다려왔던 예상 점수가 나오는 날이다. 딱 기대와 걱정이 반반씩 있었는데, 은근 기대했다가 떨어지면 상심이 클 것 같았다. 뭔가 떨어질 것 같으니 아예 보지 말아 볼까 생각도 했다. 4시가 되자 실시간으로 시험 카페에서 사람들이 합격 소식을 알려왔다. 나는 지하철이라 폰으로 보는데 4시가 된 직후에는 접속 대기로 볼 수 없었는데, 4시 40분 정도 되니까 화면을 볼 수 있었다.


실눈을 뜨고 보는데 떡하니 적혀 있는 '합격 예정'. 어? 지하철이라 크게 놀라진 못했지만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까스로 60점을 넘긴 건가? 일단 기쁨은 뒤로 하고, 내가 어떻게 합격을 했나 상세 점수를 눌러봤다.



무려 총점 72점! 잘해봐야 58점~62점 정도를 기대했었는데 생각보다 높은 점수였다. 무엇보다 많이 틀렸을 줄 알았던 1과목에서 겨우 1문제 틀린 것과, 반타작도 못할 줄 알았던 3과목에서 과반수 이상 맞은 게 너무 기쁘고 다행이었다.


정확한 합격 여부는 6월에 확정되지만, 특별한 사유가 없는 이상 예상 점수 그대로 채점이 될 테니 미리 기뻐해도 될 것 같다.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붙은 것이라 두 배로 더 행복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성취감


사실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난 '데이터 분석' 자격증이 크게 필요하지 않다. 이력서 쓸 때 한 줄 추가할 순 있겠으나 그게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주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뛸 듯이 기쁜 건, 이번 자격증 시험이 내 고질적인 무력감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었다는 데 있다. 비전공자이고 겨우 5일 공부한 정도지만 그럼에도 열심히 찍은 문제들이 운 좋게 많이 맞아서, 큰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동안은 뭔가 하고 싶어도 "난 안 될 거야", "그걸 지금 어떻게 해"라는 부정적이고 방어적인 모습이 튀어나왔었는데, 이제는 그래도 "한 번 해보지 뭐" 하는 긍정적인 기운이 좀 생겼다는 게 가장 좋은 변화일 것이다.


앞으로도 가끔 정신적으로 힘들 때, 오히려 이런 삶의 작은 성취를 이뤄보는 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24년 봄이 참 스스로에게 힘든 시간이었는데 ADsP를 준비하는 기간 동안은 공부에 집중하느라 오래간만에 아무 생각 안 하고 잠도 잘 잤던 것 같다.


누군가에겐 별 것 아닌 작은 자격증이지만, 오래간만에 인생의 자극이 된 것 같아 좋은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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