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상으로
경화는 퇴원하자마자 초능력 센터로 향했다. 이미 경화에게서 초능력이 감지되지 않는다는 의사의 진단이 있었지만, 스스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뒤에 분에게 이 그림의 물건이 무엇인지 텔레파시로 전달해 보세요.”
봉사자가 스케치북에 그려진 기린의 사진을 경화에게 보여주었다. 뒷사람은 스케치북을 보지 못하게 안대를 하고 있었다. 경화는 텔레파시를 쓰기 위해 눈을 감았다. 먼저 경화는 천천히 속으로 기린의 그림을 그려보았다. 그리고 뒷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정신을 모았다. 하지만 힘을 모을 때마다 맥없이 튕겨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꼭 탄성이 떨어진 고무줄이 끊어지는 것처럼. 한참 기다렸는데도 아무 신호를 받지 못하자 수신자가 손으로 엑스자를 그렸다.
“정말이네요. 이젠 아예 텔레파시를 못 쓰시는데요.”
검사가 끝난 후, 센터 직원이 놀란 듯이 경화에게 검사지를 건네주었다. 전에는 F등급이었어도, 엄연히 초능인에 표시가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등급 칸은 비워져 있고, 비초능인에 체크가 되어 있었다. 이제 정말 확인사살을 받은 셈이었다.
센터를 나가는 경화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비록 F등급이었어도 자신의 무기였던 텔레파시를 이제 쓸 수 없다고 생각하니 조금 섭섭했다. 초능력은 숙자가 경화에게 남기고 간 하나뿐인 유물이었다. 그리고 경화는 늘 그 미약한 초능력에 많이 의존하고 있었다. 삶이 힘들 때마다, 경화는 자신 안에 있는 조그만 불씨를 생각하며 이겨냈다. 괜찮아. 나는 초능인이니까.
그러나 점점 경화한테선 기댈 수 있는 것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숙자는 죽고, 초능력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제야 경화는 본인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기대야 할 언덕이 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이제 홀로 뿌리내리는 법부터 배울 차례였다. 경화의 슬펐던 얼굴이 웃는 얼굴로 전환됐다. 시원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그날, 현장에서 바로 체포된 수형은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수감 이후로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좁은 창문 밖만 뚫어지게 쳐다보던 수형의 방문이 열렸다. 수인번호 720번, 면회.
수형은 부르튼 얼굴로 면회실로 향했다. 누구일까. 잘 예상은 가지 않았다. 부모는 모두 죽고, 그 일 이후 남은 친척들도 다 수형을 나 몰라라 하는데. 기대 없이 면회실에 들어간 수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창 맞은편에서 경화가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에 수형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어째서 본인의 딸을 죽일 뻔했고, 그로 인해 본인도 죽을 뻔했는데도. 저렇게 편한 얼굴일 수 있는지.
그동안 정말 경화에 대한 원망이 컸고, 그날 진심으로 지연을 죽이려 한 건 맞았지만 실제로 본인 앞에 있는 경화의 모습을 보니 수형은 이상하게 동요했다. 실제로 경화를 본다면 왜 자신의 부모를 놓고 혼자만 살았는지 따지고 욕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죽을 만큼 미워하는 마음만 들 줄 알았는데... 그것보단 가장 먼저 자신의 부모가 생각났다. 살아계셨다면 지금쯤 저 아줌마랑 비슷한 나이 대였을 텐데.
수형이 여러 가지 감정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쭈뼛거리던 사이, 경화가 먼저 수형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수형이 놀라서 숙였던 고개를 쳐들었다.
“10년 전에, 세탁소에서... 나만 살아남아서 미안해요.”
경화의 얼굴은 젖어 있었다. 수형은 오래 입을 다물고 있어 말라버린 목소리로 탄식을 뱉었다. 수형은 경화를 마주치자마자 깨달았다. 아니 사실은 그날 확신에 찬 지연을 보면서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경화가 고의로 자신의 부모를 불 속에 내버려 두고 도망치지 않았을 거란 걸.
“그날, 옷들에 불이 붙으면서 천장이 무너졌어요. 난 파편에 다리를 찔려서 중간에 고립됐고, 사장님 부부와도 단절됐어요. 아이러니하게도 중간에 건물이 무너지는 바람에 처음 불이 난 곳과 분리되어 가스를 덜 마시고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어요.”
“......”
“나도 핸드폰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우리 엄마가 나를 텔레파시로 직접 찾았어요. 엄마도 텔레파시스트였거든요. 먼저 텔레파시로 내 위치를 알고... 직접 현장에 와서 건물 더미를 돌아다니면서 나를 찾았고... 그리고는... 바로 기력을 소진하고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어요.”
“......”
“내가 구출되고 바로 119를 불렀는데, 엄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사장님, 사모님이 어떻게 됐는지 몰랐어요... 정말 미안해요.”
수형의 눈에서 소리 없이 계속 눈물이 떨어졌다. 정말 모든 게 거짓말처럼 불운했던 사고였다. 애초에 알고 있었다. 같은 피해자였을 뿐인 경화를 탓할 수 없다는 걸. 자신도 그날 엄마, 아빠를 잃었지만 경화 또한 그 사고로 엄마를 잃어야 했다.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그냥 같은 피해자를 공격했던 것이었다. 자신이 10년간 그리도 혐오하던 가해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수형이 뒤늦게 밀려오는 후회스러움에 고개를 푹 떨궜다. 그리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지연이... 그렇게 해서....”
“괜찮아요... 그래도 결국은 구했으니까.”
경화는 수형을 격려했지만, 수형은 끝내 경화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수형의 무릎에 눈물자국이 하나둘 번졌다. 어긋난 복수심에 빠져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를 만큼 제정신이 아니었고, 뒤늦게 정신을 차리니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엄마, 아빠를 죽인 범인에게 복수한다는 명분은 실체 없는 허상일 뿐이었다. 울음을 참는 수형의 어깨가 조용히 흔들렸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의외로 일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경화와 지연이 회복하자, 한준은 다시 방송에 나가기 시작했다. 온갖 매체들에서 한준을 인터뷰하겠다고 난리였다. 그리고 질문에는 죽을 걸 알면서도 텔레파시로 지연을 살린 경화에 대한 내용이 필수적으로 들어갔다. 인터넷에서도 난리였다. 기사에 난 경화의 사진을 원더우먼에 합성한 합성 사진이 돌아다니며 히어로 영화의 주인공 같다는 밈이 떠돌았다.
하지만 한준이 이런저런 데서 얼굴을 알리는 것과 달리, 실제 주인공인 경화는 여전히 집안일을 하고, 한준의 내조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경화로 인해 방송에 나가는 한준의 일처리를 경화가 떠맡는 상황도 있었다.
“당신, 내일 백화점 좀 가서 픽업 좀 해와. 김 교수 주려고 겨울용 장갑 하나 샀는데, 재고 없어서 예약 걸어뒀거든. 내일 들어온다고 방금 문자가 왔어. 늦지 말고 갔다 와야 돼! 또 꾸물거리다가 뒤늦게 하지 말고.”
방송에서 가정적인 이미지를 굳히는 한준은 집에 들어와서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다 먹은 찻잔을 대충 싱크대에 던져두곤, 식탁에 앉아서 본인이 나온 방송을 모니터링했다. 아내가 죽음의 문턱까지 갈 만큼 아팠지만 그것에 대한 고맙거나 미안한 기색은 전혀 없는 듯했다. 그저 자신의 모습에만 관심 있는 한준이 방송을 보고 흡족한 듯이 미소 지었다.
“저희 아내가 원래 딸을 끔찍이 생각했죠. 원래 부모의 마음이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TV에서 나오는 가짜 한준과 진짜 한준의 괴리감에 질린 경화가 거실로 나왔다. 한준이 어질러 놓은 책더미를 정리하는데, 현관문 번호키 소리가 들렸다. 책을 내려놓고 경화가 얼른 현관으로 뛰어갔다. 지연을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경화의 얼굴이 밝아졌다.
“엄마, 나 밥 안 먹을게.”
그러나 지연은 들어오자마자 화장실로 직행했다. 오랜만에 학교에 가서 적응하느라 힘들었을 지연에게 맛있는 밥을 차려 주려고 이것저것 장도 많이 봤는데 말이다. 역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건가. 경화가 내심 서운해하려는데, 지연이 화장실에서 고개를 쑥 내밀었다.
“엄마. 나 아까 친구들이랑 점심을 많이 먹었더니 더부룩해서 그래.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좀 쉬어.”
“그래? 뭘 먹었길래...”
다시 화장실로 들어간 지연이 크게 소리쳤다. 떡볶이! 뷔페여서 너무 많이 먹었어! 그제야 서운했던 경화가 표정을 풀고 웃었다. 딸 속이 안 좋다는 게 기쁠 일은 아니지만, 엄마가 걱정할까 봐 사소한 것마저도 속 시원히 말해주는 게 귀엽고 좋았다. 알았어. 그럼 오늘은 저녁 먹지 말고 내일은 맛있는 거 먹자. 경화가 후련한 마음으로 거실로 향했다.
여전히 자신의 방송분을 모니터링하며 낄낄대는 한준과, 여전히 아직은 마음을 알 듯 말 듯 모르겠는 딸 지연. 그러나 아무것도 안 변한 줄 알았지만 조금은 변했다. 변하고 있었다. 비록 경화의 초능력은 사라졌지만, 경화는 더욱더 지연과 연결될 것이다. 텔레파시가 없어도 이제 엄마와 딸, 서로가 서로와 소통하는 방법을 점점 맞춰 가고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