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13년, 제가 취준생이었던 시절의 직장 생활 복장 트렌드는 '비즈니스 캐주얼'이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단어인 '비즈니스 캐주얼'은 말 그대로 전통적인 비즈니스용 복장과 캐주얼이 혼합된, '격식을 차린 듯, 차리지 않은' 복장을 뜻합니다. 드레스 셔츠를 캐주얼 셔츠로, 정장 바지와 구두를 면바지와 스니커즈로 대체한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패션에 무지한지라 제가 잘은 모르지만 여성의 경우에는 무채색 계열의 블라우스와 치마가 산뜻한 색감들로 대체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인턴 사원으로 입사했을 때 당시 회사에서는 인턴 사원들이 '비즈니스 캐주얼'을 입도록 권장하였었고, 회사 안을 돌아다니다 보면 저 사람은 누가봐도 '인턴 사원 이다' 라고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한 복장의 젊은 사람들을 많이 마주쳤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014년 반도체 회사에 입사한 이후, 저는 제조 현장 엔지니어 직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합니다. 반도체 생산 라인에서는 미세한 반도체 회로를 손상시킬 수 있는 파티클(Particle)이 유입되지 않도록 하는 '방진복'이라는 옷을 입고 근무합니다. 뉴스나 애국가 화면에서 반도체 회사 자료 화면에서 등장하는 새하얀 옷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주 라인 안을 왔다갔다 해야 하기 때문에 출근 복장 선택 시 최우선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은 '환복 편의성' 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트레이닝 복을 입고 출근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티셔츠와 청바지가 저의 고정 출근복이었습니다. 아직 인턴 시절의 '비즈니스 캐주얼'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푸릇푸릇한 신입사원 시절에, 입사 동기들이 항상 마치 집에서 아무 옷이나 주워입고 바로 나온 듯한 복장으로 등장하는 저를 신기하게 바라봤던 기억이 납니다.
2016년은 회사의 복장 규정에 큰 변화가 있었던 해입니다. 바로 반바지를 허용하게 되었습니다. 비즈니스 캐주얼은 다시 한 번 시원함을 뜻하는 '쿨 비즈'라는 이상한 용어로 진화했습니다. 이미 개방적인 IT 기업들과 굴지의 글로벌 기업들에서는 시행 중이었다는 점과 치마와 바지, 운동화와 샌들 등 비교적 제약이 덜했던 여성 직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기준이 적용된 남성 직원들이 목소리가 반영된 결과였습니다. 반바지를 허용함으로써 사실상 복장의 완전 자율화가 허용된 셈입니다. 물론 극단적인 트레이닝 복은 아직도 지양되고 있지만, 최근에는 신축성과 통풍성이 있는 다양한 소재의 슬랙스들은 사실상 트레이닝 복과 큰 차이가 없어보이기도 합니다. 이 시점 부터 한 회사 안에서도 정말 다양한 복장들을 마주칠 수 있게 됩니다.
2023년 현재, 다시 제 개인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저는 신입 때의 비즈니스 캐주얼과 엔지니어 시절 티셔츠의 청바지를 거쳐서 다시 셔츠와 슬랙스, 그리고 여기에 선선해지면 블레이저나 니트, 코트를 조합하는 보수적인 '노땅 패션'으로 돌아갔습니다.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어서 그런 점도 있지만, 약 10년 간 회사 생활을 하면서 바뀐 복장에 대한 생각이 크게 작용 하였습니다.
예전에는 저도 회사생활은 놀러온 곳이 아니라 일을 하러 오는 곳이기 때문에 복장은 최대한 업무 효율을 높일 수 있는 '편안함'이 최우선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회사 생활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높은 직급의 임원들이나 업무상 협의가 필요한 유관 부서원들과 마주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느날 문득 의상이 생각보다 크게 작용할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남성들에게 발목이 드러난 바지에 '페이크 삭스'를 신는 것이 유행했던 시절, 실내에서 그 복장에 슬리퍼를 신고 있는 제 자신을 바라보니 사람이 그렇게 가벼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직위 특성상 편하게 입기 힘든 임원이 저를 사무실로 호출 했는데, 반바지에 발목 양말을 신고 슬리퍼를 끌고 가니 과연 이 사람이 나를 완벽히 신뢰하고 업무를 지시하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것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 인원들도 있습니다. '무신사'에서 구입한 스트리트 스타일의 옷을 입고 유관 부서나 협력 업체의 고직급자와 업무 협의를 하러 갈 때면, 마치 내가 더 나이 어린 아래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결론은 적어도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동안'이나 '젊어 보인다'가 칭찬이지만, 회사 내에서는 만큼은 원래 나이보다 들어보인다고 손해볼 것은 전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저는 최대한 보수적인 복장으로 돌아갔고, 현재도 고수하고 있는 중입니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느낌이기 때문에 복장과 업무 효율의 상관관계는 '전혀' 입증된 바가 없습니다. 또한 역시 '일잘러', '에이스'들은 편한 옷을 입고도 능숙하게 업무를 처리합니다. 하지만 저에게 있어서 보수적인 복장은 현재의 회사 생활을 버티는 데 어느정도 도움이 된 개인적인 '징크스' 정도로 생각하고 계속 고수할 생각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날씨가 덥고 보수적인 복장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아재'의 상징인 레귤러 핏의 반팔 셔츠 만큼은 결코 입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나이들어 보이고 싶어도 최후의 마지노선은 유지하고 싶은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