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시청한 웰메이드 예능
시작 : 대중들의 가려움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기획
자주 가본 것은 아니지만, 흔히 유명한 쉐프들의 파인 다이닝이라 불리는 고가의 식당을 다녀오고 나면 아래와 같은 근본적인 의문과 생각의 흐름에 잠기고는 합니다.
과연 내가 순수하게 ‘맛’의 관점에서 지불한 가격대 만큼의 가치를 느꼈나? 물론 좋은 위치와 분위기, 서비스는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감안하면 납득이 되는 가격일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부대 비용이 가격에 포함된다는 것은 결국 오롯이 ‘맛’으로는 비싼 가격만큼의 가치가 없다는 것을 반증 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미각이 너무 싸구려 입맛이라 나만 가치를 못 느끼는 걸까? 유명한 쉐프들의 식당은 이제 ‘유명한 걸로 유명해진’ 수준이 된 것은 아닐까? 만약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나와 비슷하다면 결국 파인 다이닝 이라는 것은 난해한 현대미술이나 기괴한 하이엔드 패션쇼처럼 ‘그들 만의 리그’가 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현대미술도, 하이엔드 패션쇼도 제대로 못 즐기는 내가 유독 파인 다이닝에 비싼 돈을 쓰는 것은 합리적인 소비인가?
많은 사람들이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더라도 막상 주변에 생각을 공유하기가 힘듭니다. 일반 서민들에게 파인 다이닝이란 대부분 축하할만한 일이 있을 때 어쩌다가 한 번 가는 곳입니다. 좋은 날 같이 간 일행에게 저런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자칫 좋은 분위기를 해치는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섣불리 ‘그돈씨’를 말하기에는 ‘맛알못’으로 반격 당하기 딱 좋습니다. 이쯤 되면 정말 누가 한 번 속 시원하게 긁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생깁니다. 이런 가려움을 긁어줄 수 있는 가장 직관적이고 명확한 해결책이 있습니다. 바로 ‘블라인드 테스트’ 입니다. 이처럼 흑백요리사는 누구나 한 번 즈음은 겪을 법할 가려움을 시원하게 긁어주며, 런칭부터 화제 몰이에 성공합니다.
애피타이저 : 완벽한 심사위원 선정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해 맛으로만 요리를 심사하는 것은 완벽한 컨셉입니다. 이후 그 다음의 의문으로 이어집니다.
‘그럼 대체 누가 심사를 할 건데?’
다른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보다 흑백요리사 심사위원에게 요구되는 더 중요한 덕목은 ‘균형’ 입니다. 흑과 백 모두의 관점에서 균형 잡힌 심사가 가능해야 대중은 심사 결과를 납득할 수 있습니다. 대중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음식이 우승하는 것을 원치 않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다 아는 예측 가능한 맛의 음식이 우승하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백종원과 안성재는 서로가 서로의 완벽한 대척점 입니다. 대중적인 중저가 브랜드의 프랜차이즈 회사 대표와 미쉐린 3스타 쉐프는 완벽한 흑과 백을 상징합니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의 성장 과정은 현재의 위상과 정반대입니다. 흑 심사위원은 금수저 집안 배경과 젊은 나이부터 사업 성공으로 인한 부를 활용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산해진미를 맛보며 마치 요리계의 백과사전과 같은 지식을 쌓은 사람입니다. 백 심사위원은 가난한 이민자의 2세로 타국에서 오롯이 자기 실력만으로 쉐프의 정점에 오른 사람입니다.
이렇게 대조적인 두 사람의 조합은 심사의 ‘균형’을 제공합니다. 세계의 겪어보지 못한 맛과 재료, 조리법이 없을 것 같은 백종원은 셰프들의 창의성과 재료 활용도 측면에서, 변태적으로 완벽한 테크닉(최현석의 표현을 빌리자면)과 섬세함을 갖추고 있는 안성재는 완성도와 쉐프의 예술성 측면에서 가장 완벽하게 평가할 수 있는 심사위원들이었습니다.
초반부 : 존중과 스포츠맨쉽
처음엔 흑 수저들이 본명이 아닌 닉네임을 달고 나온 것을 보고, 그들의 커리어를 낮게 봤습니다. ‘고기깡패’란 닉네임과 먹방을 잘 할 것 같은 겉모습을 보고 동명의 유튜브 채널에서 고기를 맛있게 구워서 먹방까지 마무리하는 유튜버 정도로 했습니다. 아무리 프로그램의 흥미 때문이라도, 백 수저들과 저런 사람들이 대결하는 건 너무 백 수저들에게 굴욕적인거 아닌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흑 수저들 대부분 쟁쟁한 커리어에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는’ 라이징 스타쉐프들이었습니다. 흑 수저에 따라서는 현재는 ‘조리사’보다는 ‘관리자’, ‘경영자’, ‘개발자’, ‘예술가’의 역할을 더 많이 하는 중인 백수저들에게 순수 ‘조리 실력’으로 ‘언더독’ 취급을 당하는 것을 못 받아들인다 해도 저는 납득할 것 같습니다. 일반인으로 치환하면 회사에서 한창 실무에서 구르고 있는 대리가 코딩이나 엑셀 같은 실무로 상무님과 대결을 한다 하면 ‘해볼 만하다’ 생각 하는 것은 당연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폴리맛피아, 철가방요리사, 고기깡패가 파브리, 여경래, 에드워드 리 등에게 보여준 동종 업계 선배에 대한 존중과 예우, 그러면서도 물러섬 없이 당당하게 요리로 승부를 거는 모습이 초반부 흥미 포인트였습니다.
여기에는 백 수저들의 품격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고려시대 무신정변 직전 오병수박희에 참가하다 망신만 당한 대장군 이소응처럼, 이미 이루어 놓은 것들이 많은 백 수저 대부분의 입장에선 행여나 안 좋은 모양새로 패하기라도 한다면 업장에 타격이 갔으면 갔지, 득이 될 게 많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프로그램이 대부분 호평으로 마무리 되어 망정이지, 만약 어그로만 잔뜩 끌다가 흐지부지 끝났으면 프로그램의 완성도와 흥행을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참가한 백 수저들의 타격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도 젊은 후배들에게 패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그림이 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참가한 여경래, 심사위원일때 보다는 도전자일때가 더 재밌다는 최현석, 미국의 유명 쉐프가 아닌 한국인 이균으로 참가했다는 에드워드 리 등 백 수저들이 자신의 에고를 내려놓고 요리사 대 요리사로 진중하게 대결에 임하는 백 수저들의 품격도 보기 좋았습니다.
중반부 : 지니어스화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제작진의 노력, 하지만 아쉬움
초반부는 고수들의 진검승부가 하드 캐리를 했지만, 어쨌거나 흑백요리사는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입니다. 예전 서바이벌 프로그램부터 참가자가 줄어들수록, 상위 라운드로 갈수록 필연적으로 스토리의 볼륨이 줄어들기 때문에 캐릭터와 서사를 쥐어 짜낼 수밖에 없는 포맷의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제작진은 중반부터 팀전이라는 변화구를 주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팀전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개인적으로는 스타크래프트 리그에서 치킨 시켜놓고 임진록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헌터 3:3 랜덤 팀플레이를 하고 있는 듯한 맥빠짐을 느꼈습니다.
물론 제작진의 기대는 어느정도 성공하였습니다. 최강록-선경 롱게스트, 나폴리맛피아-요리하는 돌아이의 갈등은 프로그램의 긴장감을 높입니다. 그 동안 무림고수 같은 느낌으로 존재감이 미비했던 에드워드 리는 생존 본능으로부터 잊어버렸던 한국어가 갑자기 유창하게 나오며 ‘물,물..코기’, ‘벌써 싸워’ 등 명대사를 남깁니다. 팀전이 시작되자 예능 방송 경험이 많은 최현석이 확실하게 프로그램 전체를 휘어잡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잃는 점도 확실했습니다. 헌터 3:3은 임진록에서 마린-메딕, 저글링-러커간의 화려한 컨트롤 대결, 후반부에 드랍쉽-베슬 대 디파일러-울트라 등 고급 유닛이 총동원되는 진검승부를 보고 싶었던 시청자들에게는, 저글링/질럿/마린메딕만 주구장창 왔다 갔다 다니다가 제 아무리 임요환이라도 자리운이 좋지 않으면 다굴맞고 그냥 끝나버리는 허무한 상황이 종종 연출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국가공인 일식 명장 안유성은 1라운드를 통과했음에도 대회 내내 고급 생선으로 초밥 한 번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짐을 싸게 됩니다. 손이 빠르다는 이유로 서포트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이영숙과 급식대가에게는 팀전에서 특별한 것을 보여주고 싶어도 보여줄 수 없는 환경적 제약이 형성 됩니다. 두 번째 팀전에서 심사위원 총 예산이 2천 만원이라는 정보만 듣고 고가 정책을 채택한 최현석의 영리한 전략은 칭찬할만 하지만, 심사위원 1인에게 다 쓰지도 못할 과도한 금액 부여라는 시스템적 허점으로 인해 ‘느끼함 잡아주는 음료수를 5만원에 팔았으면 1등하는 구조’라는 비판에서는 자유롭기 힘듭니다.
이러한 불합리를 극복하려는 제작진의 시도가 첫 번째 팀전이 끝난 후 ‘패자부활전’과 두 번째 팀전의 ‘방출 시스템’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방출 시스템으로 인해 제작진이 기대한 ‘긍정적인’ 효과로는 서포트만 하느라 제 기량을 발휘하기 힘든 쉐프들이 필살 메뉴를 내놓을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 제공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제작진이 놓친 허점이 있으니, 새벽 시간대의 ‘재료 수급’의 변수입니다. 특히 ‘지정된 동네 마트’에서만 구입할 것 등의 제약이 없는 상황에서 수도권 연고의 쉐프들은 개인 거래처를 통해 질 좋은 비싼 재료를 싼 가격으로 원활하게 수급할 수 있었던 반면, 호남에 연고지가 있는 안유성은, 특히 신선한 재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일식 해산물 쉐프로서 회전율이 낮은 텐동을 해야 하는 극도로 불리한 환경에 놓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예능성과 경쟁의 공정성의 균형에 대한 문제는 흑백요리사(시즌 2를 한다면) 뿐만 아니라 모든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의 고질적인 숙제인 것 같습니다.
마무리 : 에드워드 리의 원맨쇼
초반부 문신으로 편견을 가지고 바라봤지만, 요리에 대한 진실성과 매 라운드에서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 나폴리맛피아는(오히려 맛피아의 도발적인 언행은 선을 넘지않는 자신감이 엿보여 개인적으로 보기 좋았습니다) 분명히 우승자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패로 귀결되어 더욱 여운을 남긴 삼국지 후반부 제갈량처럼, 프로그램의 후반부를 하드 캐리한 주인공은 단연 에드워드 리입니다. 팀전에서 팔로워, 리더로서의 상반된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며 예열을 마친 에드워드 리는 ‘가장 요리대회 다웠던’ 라운드인 무한 요리 지옥에서 완벽한 원맨쇼를 보여줍니다. 모두가 생존을 위해 부랴부랴 싱글 앨범을 준비하는 와중에 에드워드 리 혼자서 기승전결 스토리가 살아있는 정규 앨범을 발매하는 격이 다른 차력쇼를 보여줍니다.
모두가 장시간 비행과 준비시간 부족, 언어 핸디캡 등 에드워드 리의 불리함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가장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배경, 스테이크 전문가 에드워드 리가 아닌 한국인 이균의 정체성으로 참가했다는 에드워드의 마인드셋은 오히려 역으로 승부에 대한 마음을 깨끗하게 비워 더욱 창조적인 작품이 나올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흑 수저만 본명을 밝히는 결승전에서 백 수저 에드워드 리가 한국 본명 ‘이균’을 밝히고 이균이 평소 먹고 남은 떡볶이로부터 받았던 영감에서 탄생한 디저트로 대회를 마무리 하는 것은 저 같은 ‘요알못’도 비로소 요리라는 것이 서사를 가진 ‘예술가의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물론 좀 더 여유 있는 환경에서 자신의 필살기를 내놓아 요리의 본질적인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질래야 질 수가 없었던 권성준(나폴리맛피아)의 우승도,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흘러갈 수 있었던 ‘요리 대회’의 결승전이라는 측면에서는 완벽한 결말이라 생각합니다.
중반부 ‘대회’라는 측면에서는 분명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개인적으로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재미를 잊고 살았던 저에게 오랜만에 보는 내내 기대감을 가지게 해준 ‘웰메이드’ 예능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IMF시절 스타크래프트가 그랬듯이, 끝없이 침체되고 있던 내수 자영업/요식업계에도 활력을 불어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