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이 내게 미친 영향력
한때 런던이라는 도시에 푹 빠진 계기가 있었다.
2014년쯤이었을 것이다. 매일 지겹고 재미없는 일을 하며 옴짝달싹 못하는 감옥과도 같은 곳에서 하루하루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집과 사무실을 시계추처럼 오가며 월급을 받기 위해서 스트레스받고 살기엔 인생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업이 무슨 자아성취, 자기 계발이라는 건 개나 줘버리라지 하고 있었다.
힘든 시간을 버티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나름 해결책을 찾았다.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듯, 내가 현재 지금 보이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부스러기 같은 일들에 연연할게 아니라 다른 세계 속에서 산다면 현실을 극복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매주 공공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그중 다시 보고 싶거나 소장하고픈 책이 있으면 구입을 하곤 했다.
그때 박웅현의 <다시, 책은 도끼다>를 빌려보게 되었는데 그 책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국 기행>을 인용한 글이 있어 바로 구입하게 되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카잔차키스를 그리스인 조르바 작가로만 알고 있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카잔차키스의 자서전적 이야기로 한 번쯤 읽어봐야 할 명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내게는 별 감흥을 주지 못했었다. 오히려 <영국 기행>을 읽으면서 작가의 천재성은 물론이며 문장 여기저기서 전율을 느끼게 되어 자칭 '문장 수집가'가 된 계기가 되었고 영국이라는 곳, 특히 런던이라는 곳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1883년 크레타섬 이라클리온에서 태어났다. 크레타섬에는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미노스 왕의 아들인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살았던 크로노스 궁전이 있다. 아테네가 9년마다 젊은 남자 7명과 여자 7명을 제물로 그 괴물에게 받쳐야 하는데 아테네 왕자 테세우스가 미노스 왕의 딸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괴물을 물리치고 같이 탈출하지만 나중에 공주를 버리게 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고향이 이곳이라니 놀라웠다.
크레타섬은 그리스 밑에 있는 섬으로 미노아 문명이 그리스보다 먼저 발달했다. 크레타섬을 거쳐야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그리스로 들어갈 수 있어서 문명의 중심지였다.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와 아틀란티스 신화도 이곳에서 유래되었다. (아틀란티스는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책에 나오는 전설의 섬), 오늘날 산토리니라고 불리는 테라 섬에서 기원전 1500년경 화산 폭발이 있어서 대규모 화산재가 크레타섬을 덮어서 미노아 문명은 몰락하였다. 20세기 초에 크레타섬에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노스 왕의 궁전인 '크로노스'궁전이 발견되었다. 미노스 왕의 부안 파시파에 왕비가 수소와 사이에서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을 낳았고 미노스 왕은 괴물을 가두기 위해 미로를 만들었다......
< 영국 기행>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는 1939년 영국문화원의 초청으로 7월에서 11월 동안 영국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셰익스피어의 고향 스트렛 피드 어폰에서 생활하면서 셰익스피어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읽었다고 한다. "영국 기행"의 마지막 부분에선 셰익스피어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카잔차키스의 눈으로 본 1930년대 영국의 생활상, 영국인들의 성품과, 대영제국과 신사의 탄생 등을 읽으면서 현재 영국인들의 뿌리 그들의 영혼을 볼 수 있었다. 유발 하라리는 < 사피엔스>에서 영국인들을 제국주의자들이라고 했다. 제국주의자로만 알고 있던 영국인들의 다른 면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의 문장력에 감탄하게 되어 런던에 빠졌는지 모른다.
영국인들의 성향은 토끼라기보다는 거북이처럼 묵묵히 청교도적인 생활을 해왔으며 이런 모든 것들이 모여 현재의 대영제국을 만들었고 귀족계급이 대접받는 사회지만 누구나 노력에 의해 귀족이 될 수 있다는 점이 다른 귀족사회와 다른 점이다. 그들은 그가 어디에서 왔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어떤 능력을 가졌는가에 관심이 있다. 한마디로 문호가 개방되어 있는 귀족제의 나라이지만, 자기보다 우월한 사람들을 우습게 보면서 그런 지위의 부당함에 격렬하게 반항하는 성향도 있다. 영국은 영국의 힘을 키울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환영받는다.
18p : 이곳의 정적인 정직하고 기교 없고, 메아리가 없고 불편함이 없다. 그 정적은 마치 진한 꿀처럼 사람의 이맛살을 부드럽게 펴준다. 이곳이 영국인가? 이곳이 영국이란 말인가? 나는 가볍게 놀라면서 중얼거렸다.
15p : 나는 영국인을 사랑했고 그들의 미덕을 존경했다. 사실 영국인들의 당당함, 품위, 단호함, 저항능력, 자제력, 말없음, 많은 행동, 위대한 인간애 등은 인간의 기본적 미덕이 아닌가?
27p : 이 땅에서는 신중함이 하나의 덕목으로 꼽힌다. 침묵은 거대한 아우성을 누르는 뚜껑이 되고 느린 걸음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된다. 이 나라의 토템이 토끼가 아니라 거북이란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28p : 영국에 오면 누구나 일상이- 작은 사건들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 것들에 복종하고 꼼꼼하게 따라야만 비로소 그런 것들을 초월할 수 있다.
29p : 영국은 '청렴 강직한 아르테미스'에 바쳐진 신전이다. 이 나라에서는 피가 줄줄 흐를 때까지 자기 자신을 채찍질한다. 입술을 깨물고 전진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55p : 영국의 해안-엄청난 기쁨과 엄청난 고뇌, 그리하여 맨 처음 영국을 접한 내 영혼은 마치 창에 꽂힌 듯 그 땅에 꽂혔다.
77p : 만약"시간"이 투숙하는 집 같은 것이 있다면 시간이 지난날 자신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소중히 기억하는 우아한 귀족이라면 그 집은 분명 영국박물관이었을 것이다.
이 문장을 보고 나는 영국박물관을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79p : 나는 영국박물관에서 지속적으로 사랑해온 세 가지 것을 찾아냈다, 아시리아의 부조물, 동방의 세밀화, 그리스의 대리석들 사이에서 황홀경에 빠진 채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방황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내 마음은 대영박물관으로 달려가고 있다. 카잔차키스가 아끼는 앗시리아 부조물 꼭 봐야겠다. 아시리아 부조물에 대해서는 양정무의 <미술이야기 1>에 자세히 나와있다.
92p: 외양은 오스트레일리아인으로 로디지아인으로 북미인으로 변해갔지만 속살은 여전히 영국인이었다. 무역, 정복, 고상한 매너를 바탕으로 대영제국은 시작되었다.
95p : 영국의 귀족계급은 폐쇄적 사회가 아니다. 해적질이나 상업으로 큰 재산을 모은 부르주아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고 있다. 따라서 출신에 관계없이 자격을 갖춘 사람은 누구나 귀족이 될 수 있다. 이 나라에서는 사람의 출신성분을 묻지 않고 그 사람의 능력(기술)을 먼저 묻는다.
101p : 14세기에 끔찍하기 짝이 없는 '흑사병'이 돌았다. 때로'운명'의 작용이 아주 미묘하듯이 이 끔찍한 참사가 대영제국을 형성하는 주요 요인의 하나로 작용했다. 흑사병에서 목양의 필요가 생겨나고 목양이 풍부한 양모를 낳고 , 이 풍부한 재화가 상선과 군함들이 탄생하게 된 내력이다. 그리고 이 함대들이 대영제국을 낳은 것이다.
운명은 단시간 내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1시간 단위가 아니라 백 년 단위로 움직인다. 바로 이것이 '운명'이 작용하는 미묘한 방식이다. 영국은 이 같은 재해 속에서도 또 다른 운명을 맞이하여 인생이 더 역전되는 좋은 운을 가진 나라라고 한다.
영국인들이 수백 년에 걸쳐 최고의 의무로 생각해온 것은 단 하나, 오직 자기 자신의 양심에만 복종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양심이란 외부의 압력이 아니라 내적 압박을 말한다. 개인과 국가의 오랜 싸움에서 유일한 목표는 개인의 자유였다.
113p : 영국인들은 여전히 강하다. 그래서 몇 가지 야만적인 결점을 고수하는 사치를 즐긴다.
120p: 그러나 시간은 아름다운 것을 숭배할 줄 모른다. 시간이 역사의 어느 순간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법은 없다. "멈춰라, 너는 너무나 아릅답구나" 시간은 서둘러 이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흘러간다.
이 부분도 잊을 수 없는 대목이다.
161p : 인간 영혼의 어디에선가 불이 밝혀지면 그 빛은 사방으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게 된다. 교황에게서 해방된 영국인들은 곧바로 또 다른 멍에로부터 해방이 절실하다고 느꼈다.
명문학교 이튼스쿨에 대한 부분이다.
176p : 이튼의 공기에는 영혼들이 꽉 차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일부러 찾을 만큼 숭배하는 명승지나 건물 혹은 물건을 마주하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떤 사람의 기운 같은 게 신비롭게 응축되어 있음을 느끼는데, 이튼에는 그 기운이 뚜렷하다. 이튼의 공기를 들이마실 때 받는 느낌이 바로 이 증류된 갈망과 향수이다. 지난 수세기, 영국 민족의 지도자였던 사람들 거의 전부가 여기에서 이 담장 안, 이 운동장과 뜰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187p : 그들은 느리고 과묵한 영국적 움직임을 면밀히 연구했다. 여기에 말과 행동을 통합하여 하나의 전통을 창조함으로써 그 움직임이 분산되는 것을 막았다. 생의 리듬은 아주 미료하고 아주 신비로는 균형이다.
앵글로색슨, 켈트, 바이킹, 노르만족 등 다양한 피가 섞여 현재의 영국을 만들었다.
200p : 진정한 영국인이라면 결코 상대방에게 무엇을 아느냐고 묻지 않는다. 다만, 당신은 어떤 사람이냐고 물을 뿐이다.
다음은 민중 계급의 청년들을 선발하여 옥스퍼드, 캠브리지에서 전액 무료로 공부할 수 있게 해주는 법률을 통과시킨 바 있는 교육학자 피셔와 대화 내용이다.
201p : 그가 하루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런 식으로 영국 최고의 교육을 받은 빈곤계층 청년들은 결국 귀족 및 중산층과 더불어 대영제국을 통치하게 됩니다. 우리는 노동자 계급의 유력한 구성원들에게 국가적 의무를 지고 국가 통치의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지요. 놀라지 마세요. 우리나라 최고의 두학교는 앞으로도 항상 귀족적인 본질을 지켜 나갈 겁니다".
귀족이 되고 싶어 하는 능력 있는 노동계급 청년들도 개인 노력 여하에 따라 귀족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영국 "신사"가 만들어진 이야기다. 신사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설렌다.
206p : 영국은 여기,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에서 신사라는 놀라운 인간형을 창조해냈다. 귀족의 고귀함, 군주의 당당함, 인간의 존엄성 아주 오래된 뿌리를 가진 이런 미덕들이 세련되면서도 우아한 방식으로 꽃을 피웠다. 신사는 아주 오래된 양육법의 뛰어난 결과물이다.
209p : 영국 신사는 위대한 상상력을 배제시킨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거동은 꾸밈이 없었고 복장도 수수했다.
210p : 신사는 개인의 업적, 다시 말해 자수성가의 승리였다. 이제는 고지식한 정직, 금용적인 도덕, 뭐든 못마땅하게 여기는 매너, 배코 친 머리카락, 거무칙칙한 차림새, 호주머니에 꽂힌 성서 등이 신사의 필수요건이 되었다.
211p : 이제는 자기 나름의 개인적, 사회적 개성을 조화롭게 계발한 사람, 열정을 자제할 줄 아는 사람, 자기 자신에 대해 절대 말하지 않고 남을 헐뜯지 않는 사람, 다시 말해 자기감정의 주인 "자기 영혼이 선장"이 신사로 받아들여졌다.
212p : 신사란 누구 앞에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 그런 편안함을 함께 있는 사람 누구에게나 나눠주는 사람입니다. 자아 숭배와 숭고함, 감수성과 심리적 통제, 열정과 자제 사이에서 저울을 살며시 기울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힘, 우리는 계산되지 않는 언뜻 보면 사소한 것들에서 한가닥 암시를 받는다. 목소리의 어조, 걸음걸이, 옷 입는 스타일, 식사, 즐겨하는 오락 등에서도 신사를 알아볼 수 있고, 전원, 스포츠, 여자, 말, 타임스 신문 등에 대한 차가우면서도 단호한 애정에서도 신사의 한 자락을 읽어볼 수 있다.
250p : 영국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허영심이 적으면서도 가장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 위엄,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 적은 말수, 현란하지 않는 제스처, 자신이 직접 뽑은 지도자들을 신뢰하기 때문에 아무리 무거운 의무도 묵묵히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나는 이런 인간적 미덕이 부러운 반면 우리 민족도 그랬으면 하고 바랐다. 기율이 잡혀있고 영국 역사상 가장 끔찍한 대 폭풍우의 와중에서도 조금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사람들, 승리는 투쟁과 끈기의 결과라는 것을 학 신하는 영국 사람들..
252p : 내가 영국에서 체류하던 초창기에 알게 된 아주 특이한 영국 속담이 하나 있다. "다리에 도달하기 전에는 다리 건너는 생각을 하지 마라"
이것은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혔을 때만 해결을 시도하라는 말로, 한마디로 어떤 계획성 없이 문제를 내버려 두는 것처럼 보인다.
253p : 영국인들은 현실을 클로즈업해서 보는 것을 좋아한다. 현실을 만져보고 또 현실이 자신을 만져보도록 내버려 두면서 마치 장님 코끼리 다리 더듬듯이 전체적 윤곽을 모색하다 보면 어디로 나아가야 이익을 얻을지가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다음 전진한다.
때론 운에 맡기며 나가도 언제도 좋은 결과만 내는 그들 선조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262p : 영국은 폭넓고 튼튼한 기초 들위에 서 있다. 영국의 사회 정체 체제 전체는 시간의 퇴적층과도 같아서 해가 가고 세기가 바뀌는 가운데 반항과 불확실성과 혼란이 서서히 줄어들면서 영국이라는 나라가 탄생한 것이다.
264p :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지옥의 망령에 의해 끊임없이 고초를 겪는 청교도인들이다.
그들 조상의 청교도적 영혼이 그들을 흔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웨스트민스터 성당' 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카잔차키스의 묘사력에 내 영혼이 심하게 요동쳤다.
267 p : 친구가 얘기하는 동안 나는 길 건너편 마지막 일광 속에 분홍빛으로 변한 웨스트민스터 성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당은 무수한 꽃잎을 가진 한송이 거대한 장미가 진흙탕에서 솟아오른 듯 더 한층 영묘하게 반짝거렸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을 어떻게 이렇게 신비롭게 표현할 수가 있을지 또 한 번 감탄하게 된다. 처음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성당으로 알고 갔을 때 책 속의 묘사와 너무 달라 놀랐다. 잘못 찾아간 것이었다.
275p : 우리는 인간이란 이름의 흙덩이, 그러나 결코 쉽게 먼지로 해체되지 않는 흙덩이임을 믿어야 한다.
다음은 그가 그렇게도 찬사 한 '에이리번의 백조'라고 부르던 '셰익스피어'에 대한 이야기다.
294p : 만약 신이 창조한 인간들이 사라지고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인간들이 그 빽빽한 지면에서 튀어나온다면 세상은 한결 더 좋아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336p : 셰익스피어가 창조작업에 임하면서 유념했던 오직 한 가지 목표는 바로 자기의 영혼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현생에서 불행하게 살다 간 셰익스피어를 영국은 그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을 정도로 그는 영국의 자부심이라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 있다.
343p: 한 민족의 본질적인 성격은 그 민족의 가장 위대한 영혼들 속에서 드러나는 법이다. 영국은 셰익스피어에게서 자신의 얼굴을 본다. 앵글로 색슨의 실용주의, 켈트의 공상, 바이킹의 용맹함, 노르만의 기율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자리 잡은 자유를 획득한 사람, 그가 셰익스피어 인 것이다. 나는 영국의 해안을 따라 걸으며 한 가지 괴로운 문제를 생각했다
위대한 민족에게는 모두 저 나름의 파랑새가 있다.
카잔차키스는 서두에서 영국의 파랑새는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던졌다. 책 말미에 그것은 "자유"라는 것이 나온다.
347p : 세상에는 조금 신비로운 법칙이 있다.(만약 이것이 없었다면 이 세상은 벌써 수천 년 전에 멸망했을 것이다.) 절대 어길수 없는 엄격한 법칙인데 처음에는 항상 악이 승리하지만 끝에 가면 반드시 패하게 되어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이 이 특권을 사들이기 위해서는 무수한 땀과 눈물이 필수적으로 따르는 모양이다. 그리고 자유는 인간이 가장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값비싼 물건이다.
카잔차키스는 < 영국 기행>에서 영국인들의 성품과 그 민족이 어떻게 대영제국이 되었는지, 노동자 계급에게도 귀족이 될 수 있는 문호를 개방하고 그들은 신사의 품격을 지니고 있고, 그들이 낳은 천재 셰익스피어까지 다 찬사 한다. 하지만 마지막에서 영국에게 조용한 경고를 하고 있다. 그 부분에 대해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 영국이 독일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에 대한 경고로 보인다.
348p : 언젠가는 <깨끗한 양심>이 그 전능을 향해 돌을 전질 것이고 제국의 목을 잡고 늘어져 제국을 망하게 할 것이다. 거대한 제국들은 항상 그런 식으로 침몰해 왔다. 그렇다. 인간의 가슴이 항의했다. 오 위대한 제국이여, 각성하라!
이 책을 읽은 후 영국 관련 책들을 수집하고 런던 여행을 준비했다. 전원경 <런던 미술관 산책>, 미셀 리 <런던 이야기>를 읽으며 구체적 계획을 세웠다. 역사적 배경을 알면 수박 겉핥기식 여행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드디어 2016년 사십 대 후반에 처음으로 초등학생, 중학생인 두 딸들과 생애 첫 자유여행을 떠나게 된다. 26살 때 유럽 6개국 패키지로 런던을 다녀온 이후 21년 만의 첫 자유여행인 셈이다. 그 후 2018년에도 2016년에 다 보지 못했던 런던을 더 자세히 보고 싶어 또 한 번 가게 된다. 영국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앗시리아(현재 이라크 지역) 부조물을 보면서 이 장소에서 카잔차키스가 느꼈던 경이로움과 잔혹한 정복자 아슈르나시르팔의 사냥을 상상했다. 앗시리아 부조 중에는 사자 사냥 장면을 새긴 작품들이 많다. 앗시리아 사람들은 새로운 땅을 정복하면 그 땅에서 가장 강한 동물을 죽이는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조각에 새겨진 장면들도 그런 상징적인 의식의 일부였을 듯 진짜 사자 사냥은 아니었을 것이다.
런던은 박물관이나 갤러리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런던 가기 전에 시대적 배경과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작품 설명이 곁들여진 전원경 <런던 미술관 산책>을 읽고 그 책에 나온 작품을 찾아가며 확실하게 이해가 가는 문화여행을 하게 되었다.
양정무 교수의 <미술이야기> 시리즈 또한 이해하기 쉽게 나와 영국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원시, 중세 유물들을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인생은 생각만큼 길지 않다. 직장 다니느라 바쁘니 퇴직 후에 여행 다녀야지 하는 것에 동의하는 사람은 요즘 없다. 언젠가는 가보겠지 해도 나의 경우 21년 만에 런던을 갔듯이 우리가 평생 한 나라를 두 번 이상 가기는 힘들다. 이젠 코로나라는 변수가 생겨서 더 어렵게 되었다.
가장 두려운 건 시간이다. 20대에 느꼈던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나 설렘 같은 것들이 가슴속에서 하나씩 희미해져 간다. 이젠 더 이상 20대 때처럼 그 어떤 것에도 설레지 않고 그냥 매사 심드렁하다. 설렘이 있을 때 두려움 없이 도전해야 한다 그나마 40대 후반에 책을 통해 inspiration 받아 첫 자유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네 번째 영국 방문은 스코틀랜드, 캠브리지로 마음먹고 있었지만 이제 다시 언제 영국을 또 가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무엇보다 내 마음이 변할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