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규환. 서른 중반을 넘긴 내가 겪어온 세상은 혼돈 그 자체였다. 어릴 적부터 우리는 도덕적인 과정과 수단불문의 결과라는 굴레에 갇혀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상에 올라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도,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윤리와 규범을 모순된 방식으로 교육 받았다. 20년이 지나고 한 인터넷 방송에 헐벗고 나온 명문대 출신의 신입 방송인의 말이 뇌리에 박혔다. ‘쪽팔리는 것 보다 가난한 게 더 부끄러워요’ 낭만은 사라지고 결과만 남은 세상. 즉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비규환이다.
이 영화는 아비규환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나침반 같은 영화다. 배우들의 신들린 연기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죽어간 단종을 향해 느끼는 카타르시스도 좋지만, 이 영화의 감독은 주인공의 비극적인 결말을 통해 과정과 결과라는 모순된 굴레에 갇힌 우리에게 이정표를 세워준다. 도덕적인 과정을 무시하고 수단불문의 결과로 왕이 된 세조는 13년의 재위 기간 동안 실로 많은 업적을 냈고, 칠삭둥이로 태어나 훗날 압구정을 소유했던 한명회는 70살이 넘도록 호가호식하며 권세를 누렸다. 반면에 단종은 왕실의 적장자로 태어났지만 정통한 왕권의 행사는커녕 17살에 무기력하게 죽었다. 역사적인 사실 앞에서 세조와 한명회, 그리고 단종의 평가가 갈리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는 수단불문의 결과를 강요받으며 살아왔다.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한다는 포장으로 도덕적인 과정을 무시해왔지만 그 포장된 명분아래 계유정난을 일으킨 세조에 대한 대중들의 평가는 차갑다. 언젠가 한 초등학교 운동회 달리기 시합에서 한 아이를 본 적이 있다. 그 아이는 달리기를 잘했다. 출발선상에 선 나머지 5명의 아이들은 1등을 하기 위해 제각각의 요령을 피워댔다. 출발신호가 떨어지고 그 아이는 열심히 달렸지만 6명 중 4등에 그쳤고, 그날 밤 할머니를 만난 아이는 4등을 했다는 사실을 부끄러운 듯 얘기했다. 아이를 품에 안은 할머니가 말했다. ‘4등이나 했어?’
단종은 사약을 거부하고 목이 졸려 죽었다. 죽는 순간까지 수단불문의 결과를 거절하고 도덕적인 과정을 지킨 어린 왕은 지난 500년간의 백성들에게 가르침을 주었고, 그 후손의 후손인 우리는 눈물로 왕을 추모했다. 500년이 지난 왕의 장례식. 가장 어린 나이지만 가장 많은 가르침을 주었던 왕에게 1,500만명의 백성이 조문을 왔으니 그도 편히 눈을 감을 것만 같았다. 달리기에서 4등을 하고 풀이 죽어있던 아이에게 엄마는 말했다. 너는 엄마를 못 봤겠지만 엄마는 너를 보고 있었다고, 너는 들리지 않았겠지만 엄마는 목이 터져라 응원 하고 있었다고. 4등을 해도 괜찮고 꼴등을 해도 괜찮으니 언제나 엄마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응원하고 있다는 걸 잊지말라고. 아이는 그날 밤 1등보다 중요한 가치를 깨달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한, 사랑하는 사람이 떠오른 그런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