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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May 01. 2016

레몬하트와 기나긴 이별

만화 레몬하트에 나오는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 이야기에 오류가 있다?

술꾼이 ‘바텐더’ 만큼이나 좋아하는 만화가 ‘레몬하트’다. 바텐더가 특유의 감성으로 심쿵 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면 레몬하트는 그야말로 술 정보의 보고다(좀 오래된 점도 있긴 하지만 ^^). 


이 레몬하트 10권 에피소드 132편 중에 뜬금없이 레이먼드 챈들러와 기나긴 이별 얘기가 나온다. 그런데 챈들러 팬으로서 그냥 넘기기 어려운, 좀 애매한 이야기가 있다. 


-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에서 테리와 만나는 가게가 빅터였던가? 가게 이름이 생각나질 않는군.

- 으음, 댄서즈가 아니었나요?

- 외람되지만 아까 테리와 처음 만난 가게는 댄서즈란 클럽 앞에 있는 롤스로이스 실버레이스란 가게입니다. 


댄서즈란 클럽 앞에 있는 롤스로이스 실버레이스에서 만난 건 맞지만 실버레이스는 가게가 아니라 차 이름이다. 


“내가 처음 테리 레녹스를 보았을 때 그는 취해서 ‘더 댄서스’의 테라스 바깥에 세워놓은 롤스로이스 실버레이스 안에 있었다. 주차원이 차를 꺼내왔지만 테리 레녹스가 왼쪽 다리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듯 다리를 여전히 밖에 축 늘어뜨리고 있어서 문을 닫지 못한 채 붙들고만 있었다.”

- 기나긴 이별, 북하우스, 박현주 옮김


챈들러는 롤스로이스에 같이 타고 있는 실비아 레녹스를 묘사하면서 롤스로이스가 보통 차로 보일 정도의 파란 밍크를 걸치고 있다고 했으나 결론은 명쾌하게 맺는다. 


“물론 실제로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롤스로이스는 그렇게 보일 수 없다.”


롤스로이스 실버레이스는 2015년 10월에 개봉한 007 스펙터에서도 나온다. 본드와 마들렌이 크레이지한 더티 마티니를 주문하고 썸씽을 만들려던 기차에서 한바탕 난리(여러가지 의미에서!)를 치고 다음 날 아침 사막 한가운데 간이역에 내렸는데, 이 둘을 태우러 오는 차가 실버레이스다. 


- What’s that? 

- That, is 1948 Rolls-Royce Silver Wraith. 


다시 레몬하트와 챈들러 얘기로 돌아가서 말로가 빅터의 가게보다 더 좋아한 가게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 말로가 빅터의 가게보다 더 좋아했던 가게가 있다는 건 아십니까? 바로 롤리의 바입니다. 여기서는 마티니를 마셨지요.


그런데 실제로 기나긴 이별에서 롤리의 가게는 그저 한 번 나올 뿐이다. 좋아한다고 주장하기엔 너무 빈약하다는 말이다. 


“나는 사무실 문을 닫고 테리가 부탁한 대로 김릿 한 잔 하기 위해 빅터의 바로 향했다. 그러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런 일을 할 만큼 감상적인 기분이 아니었다. 대신에 로리 식당으로 가서 마티니 한 잔과 커다란 갈비 스테이크, 요크셔푸딩을 먹었다.”


그러니 우리는 말로가 여전히 빅터의 바를 좋아하는 걸로 믿어도 좋겠다(물론 술꾼의 주장일 뿐 ^^). 게다가 빅터는 테리가 말한 김렛의 정의를 듣고 로즈 라임까지 준비하는 정성을 보여줬으므로. 


"요전 날 밤에 손님하고 손님 친구분이 얘기하시는 걸 듣고서는 로즈 사의 라임주스 한 병을 가져다 놓았지요."


마지막으로, 기나긴 이별에 등장하는 김렛 이야기에는 항상 ‘김렛은 아직 이르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만화 ‘바텐더’에서는 교코가 만든 김렛을 마신 손님이 아직 김렛을 만들 실력이 안되는구나, 하는 식으로 풀고, 레몬하트에서도 ‘예의 그 김렛은 아직 이르다’로군요, 하고 넘어간다. 기나긴 이별에서 이런 표현이 나온 것은 죽은 줄 알았던 테리 레녹스가 달라진 모습으로 필립 말로를 만나러 온 시간이 금요일 오전이기 때문이다. 


“어느 금요일 아침, 낯선 사람이 내 사무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략) 그가 말했다. 김릿을 마시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 같군.”

술꾼에게 김렛은 언제 마셔도 이르지 않은 법이다 

아무리 서양이라고 해도 오전에 칵테일을 마시기는 좀 쉽지 않았나 보다. 뜬금없지만 나는 다행스럽게도 오전 열 시에 김렛을 마실 수 있는 바를 알고 있다. 테리 같은 친구가 온다면 금요일 오전이라도 한 잔 사 줄 수 있을 테니, 이 역시 술꾼의 즐거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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