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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May 02. 2016

하이볼 시킨 까닭

술꾼의 첫 잔은 술꾼이 고르지 않는다. 날씨가 고를 뿐. 

바에서 시키는 첫 잔은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더운 날, 추운 날, 비 오는 날, 흐린 날, 바람 부는 날, 안개 짙은 날, 그냥 좋은 날… 


그 날은 쉬는 날이었다. 하지만 딱히 할 일도 없고 미처 끝내지 못한 일도 많아 출근을 했다. 간단히 정리만 해 놓고 미드를 보던 음악을 듣던 책을 읽던 사무실에 좀 쉴 생각이었다. 그런데 습관은 무시할 수 없는 까닭인지 사무실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열고 키보드를 토닥거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짧은 보고서 하나를 마무리하고 물 한 모금 마시는데, 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쉬는 날 쉬러 나왔는데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안 되겠어, 낮술 마셔야지. 연락이 되는 선배에게 점심을 겸한 낮술을 청하고 서둘러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 


낮술은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딱 좋았다. 하지만 스케줄이 있던 선배를 보내고 돌아서려는 순간, 나는 이 오후를 그냥 보내기 싫었고 오후 3시에 연다는 여의도 더 캐스크를 떠올렸다. 여의도까지 지하철로 15분. 여의도 역에서 조금 걸으면 다음 잔을 충분히 마실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 기왕 낮술인 거 오늘은 위스키다. 


여의도 역에 내렸고 타박타박 바를 찾아 걸었다. 그런데 그날 따라 너무 더웠다. 재킷을 벗었는데도 목덜미엔 연신 땀이 흘렀다. 가방과 재킷을 그러쥔 손은 더위로 부어 올라 썩 편치 않았고 발바닥은 점점 더 뜨거웠다. 아침 기온은 10도 안팎이었는데 무슨 날씨가 이리 더워, 끊임없이 투덜댔다. 


다행히 바는 문을 열었지만 실내는 기대했던 것만큼 시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봄철인데 벌써 에어컨을 틀자고 할 수도 없는 일. 손으로 목덜미를 훔치며 자리에 앉아 몸을 식히는 동안 수많은 위스키 병을 쳐다보았으나 내 주문은 결국 하이볼이었다. 아무리 위스키가 좋아도 지금은 아니었다. 

가쿠빈으로 만든 하이볼이 가장 맛있다고 한다. 뭐, 꼭 그런 것 같진 않지만 ^^ 

지극히 정통한 위스키 하이볼이 나왔고 나는 아껴할 틈도 없이 두 모금에 마셔 버렸다. 갈증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다음 잔을 고민하다가 물었다. 


- 여기서 손님들은 뭘 자주 드시나요.

- 저희 손님들은 주로 위스키를 드세요. 

- 저도 위스키 마시려고 왔는데 하이볼 시켰어요. 이건 내 잘못이 아니에요. 


맞다. 하이볼을 시킨 건 내가 아니다. 날씨가 그런 거지. 나는 날씨 말을 잘 듣는 순진무구한 술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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