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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May 23. 2017

바를 기억하다

술꾼의 기억에 남는 베스트 바는 어디인가 

나는 그 바를 기억한다. 


동굴 같은 계단을 내려 위스키 산을 지나야 비로소 자리를 내어주던 바 

문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몇 번씩 두리번거렸던 바 

손님이 많아 몇 번씩 되찾아야 했던 바 

문 뒤의 세계에 전혀 힌트를 주지 않던 묵직하게 닫혔던 바 

남의 집에 온 것 같이 불안했지만 금세 익숙했던 바 

스툴에 앉아 카운터에 팔꿈치를 내려놓는 순간 한없이 편안했던 바 

젊고 예쁜 손님들 가득해 엉덩이를 들이밀기 미안했던 바 


나는 또 그 바텐더를 기억한다. 


입구에서 눈이 마주치자마자 뛰어나와 나를 안아주던 바텐더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두 손을 모아 귀엽게 셰이커를 흔들던 바텐더 

좀처럼 곁을 주지 않을 것 같지만 의외로 따뜻한 잔을 내어주던 바텐더 

나를 다른 손님으로 착각하고 엄청 환영해줬던 바텐더 

퇴근 시간 지났는데도 내게 한 잔 주고 싶다며 나를 기다렸던 바텐더 

술 취해 흔들거리는 걸 보면서 마지막 잔으로 꿀 같은 잔을 서브한 바텐더 

무뚝뚝하고 뻣뻣하지만 칵테일은 말랑말랑했던 바텐더 


나는 내가 바를 찾았던 날들을 기억한다. 인생의 사소한 일을 축하하기 위해, 평소와 달리 맛있는 한 잔을  마시고 싶어서, 때론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싶은 날 바를 찾았다. 어떤 날은 몹시 힘들어 바를 찾았고 어떤 날은 그저 허망해 바를 찾았으며 어떤 날은 막연히 마시고 싶어 바를 찾았다. 감정이 평화로운 날이나 울퉁불퉁한 날, 어떤 식으로든 표현할 수 없는 날에도 바를 찾았다. 


그래서 내가 찾은 모든 바에는 내가 기억하거나 말거나 내가 흘려 놓은 인생의 조각들이 쌓여 있다. 기쁨. 격려, 기억, 위로, 여유, 즐거움, 흥분 그리고 때론 걱정이나 분노, 슬픔이라고도 부르는 조각들 말이다. 그런 까닭에 바는 내게 있어 감정의 저장소인 셈이다. 나는 바에 감정과 기억을 맡기고 새로운 힘을 얻는다. 

대한민국 베스트 바들이 모인 자리에 운 좋게 초대받았다. TOP 리스트에 오른 바들에게는 축하를. 이렇게 다양한 바와 바텐더들이 있어 내 감정의 저장소가 더 늘어날 것을 생각하니 술이 절로 들어갔다. 그러나 확실히 나는 조금 샌님인가 보다. 공짜로 마시는 술로는 영 취하질 않으니. 


베스트 바 리스트에 있거나 없거나, 모든 바는 그 나름의 가치와 존재의 이유가 있는 법이다. 바의 카운터 위에는 그 나름의 시간 동안 흘러내린 술꾼들의 조각이, 추억이, 사랑이, 허물이, 눈물이 겹겹이 쌓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바에게 힘찬 응원과 고마움을 보낸다. 아직 내게는 그대들에게 맡길 감정과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으므로. / SoolKoon 


다른 잔도 다 좋았으나, 행사장에서 조차도 한 잔 한 잔 꼼꼼하게 메이킹을 하는 이 유별난 바텐더라니. by Bar in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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