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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Jun 05. 2017

네그로니 위크, 술꾼의 네그로니

네그로니만 마셔도 좋은, 네그로니 위크가 시작됐다 

캄파리를 처음 만난 건 술이라곤 소주, 맥주, 양주 밖에 모르던 시절, 어느 호텔의 해피아워에서였다. 저녁을 먹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에 간단한 안주와 와인, 맥주, 서너 가지 스피릿을 마실 수 있었던 그 해피아워에서 눈부신 붉은색을 자랑하던 캄파리는, 바로 이런 느낌으로 다가왔다. 

자료출처 : 캄파리 홈페이지, 2015년 캘린더 에바 그린 스페셜. 캄파리는 왜 2017년 캘린더는 안 만드는 것일까

그러나 하이볼 글라스에 얼음을 채우고 양껏 따른 캄파리를 입에 넣은 순간, 나는 형언할 수 없는 배신감을 느끼고 말았다. 뭐야, 서양 사람들은 대체 이걸 술이라고 마시는 거야? 캄파리 특유의 쓴 맛에 나는 그만 질려 버리고 말았다. 반도 마시지 않은 캄파리 잔은 해피아워 내내 테이블 위에서 천대받다가 배불러 못 먹고 남긴 안주 몇 가지와 함께 서버의 트레이 위로 사라졌다. 이것이 캄파리에 대한 내 첫 번째 기억이다. 


칵테일을 하나씩 배워가던 시절에도 캄파리는 내 주문 리스트에 없었다. 간혹 첫 잔이나 식사를 거하게 한 후의 한 잔으로 캄파리 소다를 권유받긴 했으나 해피아워에 맛 본 해피하지 않은 캄파리에 대한 기억 때문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사람은 변하고 만나야 할 인연은 언젠가 만나는 법이다. 


메뉴에 없는 칵테일을 주문하기 시작할 무렵, 칵테일이란 이런 술입니다, 라는 것을 내게 가르쳐 준 R호텔의 바텐더가 뭘 마실까 고민하는 나에게 ‘네그로니’라는 이름을 들이밀었다. 


- 어떤 칵테일이에요? 

- 밸런스가 정말 중요한 칵테일이죠. 


(솔직히 내가 뭐라고 물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정확히 기억한다. 실제로 진짜 그랬으니까)


그의 밸런스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내 첫 네그로니를 마셨다. 캄파리의 쌉싸름한 맛을 스위트 버무스가 고상하게 만들고 진의 고독하고 뾰족한 맛이 입 맛을 자극했다. 그 뒤로 네그로니는 나의 베스트 10 칵테일이 되었다. 


캄파리는 네그로니의 핵 같은 존재다. 캄파리 덕분에 네그로니는 밝고 화려한 루비 레드로 빛나고 캄파리로 인해 복잡한 맛이 시작한다. 캄파리 때문에 처음 마실 땐 당황할 수 있으나 그 시점을 조금만 넘기면 우아하고 고상한 맛이 올라오는 걸 느낄 수 있다. 


어느 칵테일이든 다 그렇지만 네그로니는 들어가는 구성에 따라, 바텐더의 개성에 따라, 그 날의 상황에 따라 다 다른 맛을 낸다. 그래서 어떤 네그로니는 몹시 입에 맞을 수도 있고 또 어떤 네그로니는 그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네그로니의 매력이다. 그래서 칵테일의 재미를 느끼려면 네그로니는 아주 좋은 선택이다. 

이 네그로니 한 잔을 위해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이 힘을 합쳤다 ^^ by 바인하우스 

게다가 네그로니의 사촌을 맛보는 것도 꽤 괜찮은 재미다. 네그로니의 진을 라이 위스키로 바꾸면 불바디에가 되고, 스위트 버무스를 드라이 버무스로 바꾸면 올드팔이 된다. 바텐더들은 기본이 되는 술이 바꾸기도 하고 또 요즘은 콜드 브루한 커피를 섞은 커피 네그로니, 혹은 콜드 브루 네그로니를 내놓기도 한다. 


네그로니 위크가 시작됐다. 어떤 바의 어떤 네그로니가 나를 즐겁게 해줄 것인지 술꾼의 기분은 그저 두근두근 할 뿐이다. 오늘 칵테일 한 잔이 생각나는 당신에게 술꾼의 추천은 무조건 네그로니다. / soolk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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