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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미모미 MomiMomi May 19. 2020

갤러리 현대 50주년 전시회를 다녀와서

기록과 저장의 힘



몇 달째 미루고 있었던 작품 액자 교체를 위해 서울행 기차를 탔다. 넉 달만의 상경이었다. 모처럼만의 발걸음이라 서울에서 진행 중인 미술 전시회를 검색해보았다. 국내 최대 규모의 화랑인 갤러리 현대에서 화랑 개관 50주년을 기념한 국내 41인의 거장의 작품을 전시 중이었다. 놓치면 아까운 전시다. 이외 서너 개의 전시를 함께 볼 심산으로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빠른 기동력을 위해 작품을 얼른 액자 집에 맡기고 갤러리가 모여있는 삼청동으로 향했다. 신문기사에서 미리 접한 대로 갤러리현대의 50주년 전시회는 성황리에 진행 중이었다. 코로나 19 때문에 관람객의 숫자를 제한하느라 입구에 기다란 줄이 있었지만 생각보다 빨리 입장을 했다.

갤러리 현대 입구


갤러리 현대는 1970년 현대화랑이라는 이름으로 첫 개관을 한 뒤 발전을 거듭해 명실상부 국내 최고의 갤러리가 되었고, 한국 미술 경매시장의 대표 격인 서울 옥션 운영하는 등 미술계 전반에 영향력이 막대하다.


긴 세월 한국의 근현대 미술을 일반인들에게 소개하고 판매해 왔고, 국내 작가들을 외국에 알리는 역할 또한 수행해 왔다. 갤러리는 예술 작품을 팔고 이윤을 추구하는 동시에 작가가 작품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역량 있는 작가를 해외에 알리고, 해외 거장들의 작품을 국내에 소개하는 본연의 역할도 해왔다.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김환기 작가의 ‘우주 5-IV-71#200’라는 작품이었다. 200호에 육박하는 두 개의 작품을 연결한 대작이었다. 작가가 1970년대 뉴욕에 머무는 동안 작업한 전면을 점으로 수놓은 작품인데, 여러 전면점화 작품 중에 서울 미술관에 소장 중인 ‘10만 개의 점’과 더불어 손꼽히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김환기의 우주, 1971년작

작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한국 미술 경매 최고가인 132억을 기록하여 화재가 되었고, 낙찰 후 처음으로 대중에게 다시 선보였다.


무수히 작은 파란 점으로 이루어진 작품을 보고 있노라니 잠시 홀로 우주의 망망대해 한가운데 서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장엄했다. 바라보는 사이 내가  수많은 파란 점 하나가 되어 작품 속으로 흡수되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작년 서울 옥션에서 85억에 낙찰된 작가의 또 다른 점화인 붉은 점화도 함께 전시되어 눈 호강을 톡톡히 했다.



비싸서 좋아 보이는 것인지 진짜로 좋아 보이는지 헷갈리는 예술품도 있기 마련이지만 ‘우주’라는 작품은 그런 의문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이번 전시는 갤러리가 50년 동안 전시를 했던 다른 한국 대표 작가들의 작품들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대단한 작품들이었지만, 관람의 즐거움을 더했던 것은 50년 동안 작가들이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화랑의 관장에게 보낸 편지들과 세월의 흔적이 가득 실린 흑백 사진들이었다.



몇십 년이 지난 편지 글과 전시 포스터 들을 보면서 걸작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목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술성이 뛰어나다고 모든 예술가와 작품이 인정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더 유망한 작가를 선별해 내고 전시회를 개최하고 지원하며 대가의 길로 들어설 수 있게 한 화랑의 역할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작가가 성장하고 예술성을 마음껏 펼치는데 화랑의 지원은 필수적이다. 많은 한국 화랑들이 지원보다는 단기간의 이윤 추구에 급급한 것에 많은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역할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 역할과 함께 수년간의 자료를 차곡차곡 저장해 온 갤러리의 정성에 고마움이 느껴졌다.

이번 전시에는 작품과 함께 화랑 50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작가들의 서신과 사진 등 수많은 자료들이 함께 선보였다.


그중 김환기 작가가 전시회를 열기 전 화랑의 사장에게 정성스럽게 써서 보낸 편지를 읽어 보았다. 작가는 타국에서 전시작을 준비하고 있었고, 외국의 전시회도 함께 준비 중이었기에 일정을 조율하고 작품 크기를 상의하는 등 구체적인 것들을 화랑의 사장과 협의하길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예술가의 편지는 업무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도 어딘가 모르게 서정적이었다. 상대와 의사를 협의하면서도 상대를 배려하는 섬세함이 편지에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파란 ‘우주’ 전면점화 작품만큼이나 작가의 손 편지는 많은 여운을 남겨 주었다. 작품이 완성되기 전에 작가의 고민을 만남으로써 작품의 결과뿐만 아니라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음에 설레기까지 했다. 이런 귀한 자료를 함께 관람할 수 있음이 이번 전시가 주는 또 다른 매력이었다.


작품뿐 만 아니라 무심코 지나쳤다면 폐기되었을 뻔한 소중한 자료들을 기록하고 저장한다는 것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작가의 소소한 고민의 흔적 없이 작품만 대했다면 그저 어마어마하게 비싼 걸작 즘으로 지나쳤을 것이다. 이런 자료의 저장은 비단 나 같은 일반인뿐만 아니라 예술활동을 하는 미술학도나 다른 작가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작품을 볼 때 작품뿐 만 아니라 작가가 남겨 놓은 작가 노트나 수많은 연습 작인 드로잉을 유심히 보는 이유는 작가의 작품을 조금 더 이해해 보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그림을 감상으로써 볼뿐만 아니라 더 깊이 알고자 그림을 부지런히 읽는다. 이렇게 읽은 그림은 예술 작품으로서의 감동을 넘어 내 삶에 있어서 수많은 질문에 대한 힌트를 주기도 한다.

진실한 기록은 미래에 일어날 많은 질문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당연시되어 흘러가버리는 현재의 것들을 붙잡는 수고로움은 미래에 찾게 될 해답을 위한 공식이 되어준다. 결과와 함께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기록이 없이는 나 조차도 과거의 나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며, 스스로에 대한 이해 부족은 미래의 삶에 지속적인 삐걱거림을 초래한다. 우리가 화가처럼 그림은 못 그리지만 매일 삶을 쓰면서 기록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스토리, 서사를 쓰면서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다. 각자의 삶을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그것이 걸작이 될지 졸작이 될지는 모른다. 다만 기록을 통해 과거와 오늘을 돌아보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내일을 내딛는 시도들을 더 많이 해 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우환

기록은 승자의 전유물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기록하지 않은 삶은 승자와 반대되는 결론을 갖는 것 아닐까? 나의 스토리는 타인이 써줄 수는 없기에 귀찮고 힘들어도 기록자는 스스로가 되어야 한다. 어느 영역의 대가는 타고난 탁월함보다 수많은 기록의 흔적습작을 남겨 놓음으로써 그 자리에 섰다. 습작을 폐기하지 않고 저장하고 기록하는 자가 승자 인지도 모른다.

대가들처럼 우리도 적어도 내 인생에서만큼은 대가가 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 스스로의 인생에 대가가 되는 첫 번째 길은 인생 서사의 작품성을 미리 겁내고 기록을 피하는 대신 되도록 많은 기록을 남기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기록이 글자이던 그림이던 오늘의 나와 나의 생각을 글자로 기록하는 삶은 내 인생의 대가가 되는 길 위에 가장 큰 힘을 부여하는 주춧돌이 될 것이다.


배경 사진 출처. NEWSIS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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