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람바난, 힌두교를 선택한 권력의 기록물

#030. [인도네시아] Prambanan Temple

by Muse u mad
이슬람 국가 인도네시아에서 엿볼 수 있는
힌두교 권력의 상징물
<프람바난 사원 Prambanan Temple>


중부 자바 요그야카르타 주에는 불교 유적 보로부두르(Borobudur)만큼이나 유명한 힌두교 사원이 있다. 바로 프람바난 사원(Prambanan Temple)이다. 이 지역에는 프람바난 사원 외에도 세우(Sewu), 부브라(Bubrah), 룸붕(Lumbung), 바롱(Barong) 사원 등 수십 개의 사원이 자리하고 있어 이들을 묶어 프람바난 사원군(Prambanan Temple Compounds)으로 통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장 널리 알려진 사원은 프람바난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 역시 이 사원이다.

투어 프로그램도 통상 보로부두르와 함께 묶어 구성되기 때문에 보로부두르와 프람바난은 함께 설명되곤 한다. 그런데 보로부두르는 불교 사원이고 프람바난은 힌두교 사원이면서 건립된 시기 또한 비슷하다. 보로부두르는 8세기말에서 9세기 중반으로, 프람바난도 9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 과거 종교는 국가 권력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국가의 멸망 및 건국과 함께 종교 또한 변화하기 마련인데, 이러한 대형 종교 건축물을 짓기에는 시기가 거의 같다 점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궁금증을 안고 사원에 방문했다. 물론 이 거대한 건축물 자체를 두 눈에 담고 싶은 욕구도 함께 갖고 말이다.



한 줄 요약

✔️ 프람바난 사원은 불교 왕조 샤일렌드라에서 힌두교 왕조 산자야로 권력이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정치적 상징물이다.


유적지 개요

✔️ 명칭: Prambanan Temple (인도네시아어: Candi Prambanan)

✔️ 홈페이지: https://prambanan.injourneydestination.id/en/

✔️ 지역: 인도네시아 요그야카르타주

✔️ 위치: https://maps.app.goo.gl/SYcC3459BwWUkQti6



인도네시아로 들어온 힌두교

힌두교는 서기 1세기 전후로 인도네시아 제도에 점진적으로 유입되었다. 대규모 이주나 정복 전쟁의 결과가 아닌, 해상 교역을 통한 전파였다. 인도의 상인들은 동남아시아와 향신료, 금 등을 거래하기 위해 교역을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도네시아 지역민들에게 스며들었다. 무려 2천여 년 전이지만 이미 당시 인도네시아 자바섬은 인도-중국-동남아시아를 잇는 해상 교역망의 일부였던 것이다.

힌두교의 교리를 살펴보면, 왕권을 설명하는데 적합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힌두교의 핵심 개념인 다르마(Dharma)는 우주와 사회, 개인의 삶을 지탱하는 근본적인 질서나 도덕적 의무를 의미하는데,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것, 신분에 따른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부여받는 것, 생애주기마다 지켜야 할 역할을 다하는 것,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할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삶의 태도를 강조한다. 카스트 제도는 권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삼을 수 있었고, 농업사회에서 토지와 농수 관리, 잉여 생산물의 분배와 관리를 다르마라는 교리로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왕은 다르마라는 우주 질서를 유지하는 존재였다.

자바 중부에서는 9세기 중반부터 불교를 후원했던 샤일렌드라(Shailendra) 왕조의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정치적 중심은 힌두교를 채택했던 산자야(Sanjaya) 왕조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이 시점에서 힌두교는 새로운 권력을 설명하는 데에도 효과적인 언어였다. 힌두교에서는 브라흐마(Brahma), 비슈누(Vishnu), 시바(Shiva)를 삼주신(Trimurti)으로 꼽는데, 이 중 시바 신은 새로운 창조를 위해 낡은 것을 파괴하는 신으로서 기존 질서의 해체와 새로운 질서의 수립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었다. 불교로는 설명되지 않는 정치적 변화를 시바 신으로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프람바난 사원의 중심에 시바 사원이 자리 잡은 이유도 이것이다.

KakaoTalk_20251227_175159865.jpg 가운데 가장 큰 건축물이 시바 신을 기리는 사원, 왼쪽이 비슈누 사원, 오른쪽이 브라흐마 사원


산자야 왕조가 들어선 이후에도 보로부두르가 파괴되지 않고, 불교 역시 유지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불교와 힌두교 간 종교 전쟁이 이루어지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슬람 국가가 된 이후에도 이 프람바난 사원이 유지되고 심지어 복원하기까지 한 점을 봐도 종교 간 대립적 관점에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떤 종교가 왕권의 타당성을 설명하는데 효과적인지, 그래서 어떤 종교를 후원했는지 실리적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신앙심을 과시하는 것보다는 권력을 드러내고자 한 욕망이 큰 건축물에 가까워 보인다.




프람바난의 중심을 구성하는 삼주신(三主神)

프람바난 사원이 언제, 누구의 지시로 건립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산자야 왕조 초기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힌두교 사원인만큼 프람바난은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 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것이다. 그러나 현지에서는 건축 설화가 내려온다. 당시 공주 로로 종그랑(Roro Jonggrang)은 반둥 본도오소(Bandung Bondowoso)라는 왕자와 강제로 결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공주는 결혼이 싫어 왕자에게 하룻밤에 사원 1,000개를 건설해야 한다는 조건을 건다. 왕자가 정령의 도움으로 999개의 사원을 완성하자, 공주는 닭 울음과 불빛으로 새벽이 온 것처럼 속였고, 이에 정령들이 달아나 결국 1,000개의 사원을 완성하지 못한다. 분노한 왕자는 공주를 돌로 만들어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전설에 따르면, 시바 사원 안에 있는 두르가(Durga) 여신상이 돌로 변한 로로 종그랑의 화신이라고 한다. 현지에서는 이 때문에 로로 종그랑 사원이라 칭하기도 한다. 사실일리 없지만, 자바 주민들에게 구전되어 오며 프람바난 사원의 역사를 풍요롭게 만든 스토리라고 가볍게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현재 프람바난 사원 단지에는 240개의 사원 터가 있다. 안뜰의 사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폐허로 남아 흔적만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안뜰에는 시바(파괴의 신), 비슈누(유지의 신), 브라흐마(창조의 신) 등 삼주신 사원이 웅장하게 우뚝 솟아있다. 중앙에 위치한 시바 사원은 기존 질서의 해체와 새로운 질서의 수립이라는 왕조 교체의 메시지를 담기에 가장 적합한 신이기에 47m의 높이로 가장 크게 건축되었다. 사원 내부에는 시바 상은 물론, 앞에서 언급한 두르가 상과 아가스티야(Agastya), 가네샤(Ganesha) 상을 모셔두었다. 비슈누 사원은 질서의 유지와 보호를 상징하는 것으로 왕권의 지속성과 안정성을 의미하며, 브라흐마 사원은 힌두교 삼주신의 시작점으로 왕조의 기원을 신화적 차원에서 정당화하는 기능을 갖는다.

삼주신 사원 앞에는 세 개의 사원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이들 사원은 삼주신이 타고 다니는 탈 것(바하나, Vahana)을 모신 사원이다. 삼주신과 1:1로 매칭되는데, 시바 사원 앞은 흰 소를 의미하는 난디(Nandi) 사원, 비슈누 사원 앞은 신조(神鳥)를 의미하는 가루다(Garuda) 사원, 브라흐마 사원 앞은 백조를 의미하는 함사(Hamsa) 사원이다. 거의 모든 힌두교 사원에서는 이와 같은 구조로 배치하는데, 신의 힘이 바하나를 거쳐 현실 세계로 이동하고, 인간도 바하나라는 매개체를 거쳐 신에 다다를 수 있다는 점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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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프람바난 사원 단지 지도 (출처: Wikimedia Commons) / (우) 프람바난 사원 항공샷 (출처: 인도네시아 관광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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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으로) 시바 신, 두르가 신, 아가스티야 신, 가네샤 신


프람바난 사원의 모든 벽면은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단순한 장식이 아닌 힌두교 서사시 라마야나(Ramayana)의 스토리를 담은 것이다. 이 서사시의 주인공인 라마는 정의롭고 규범을 지키는 왕으로, 라마야나는 다르마를 지키는 통치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이야기이다. 종교적 서사시이기도 하지만, 내용상으로는 왕권 교본에 가깝기도 하다. 그래서 산자야 왕조는 프람바난에 이 라마야나 서사시를 부조로 새겨 넣었고, 프람바난에 방문한 사람들이 사원을 걸으며 라마야나의 내용을 모두 읽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20251005_165928_1.jpg 프람바난 사원에 새겨진 라마야나 부조 중 일부




유네스코 등재와 프람바난의 복원

프람바난은 동남아시아 힌두 건축 중 최고 수준의 석조 건축 기술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또한 인도 힌두 건축 전통에 자바 문화가 더해져 독자적으로 재해석된 건축물이었으며, 불교 중심 사회인 샤일렌드라 왕조에서 힌두교 중심 사회인 산자양 왕조로 전환되는 과정을 건축으로 보여준다는 점을 인정받아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러나 세계문화유산임에도 프람바난에는 복원되지 않은 사원이 너무나 많다. 그만큼 한동안 방치되었던 것이다.

10세기에 들어서면서 자바의 정치 중심은 급격이 동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므라피 화산(Mt. Merapi)의 주기적 분화로 안정적 행정력을 가지기 어려웠고, 농업 생산력만 갖췄던 자바 중부보다는 생산력을 해안으로 직접 연결할 수 있는 동부 자바의 브란타스(Brantas) 강 유역, 현재의 수라바야(Surabaya)로 이어지는 지역으로 옮기는 것이 교역에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산자야 왕조의 권력 타당성을 대변하던 상징물이었기 때문에 왕조가 떠나는 순간, 존재 이유를 함께 잃게 된 것이다. 그 이후 프람바난은 자연스럽게 버려졌고, 주기적으로 화산의 폭발까지 덮치면서 대부분의 사원이 무너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프람바난 중심부의 세 사원은 완전히 붕괴된 적 없이 천년이 넘는 세월을 버텨왔다. 물론 일부는 무너지기도 했었지만, 식별 가능한 붕괴였기 때문에 복원될 수 있었고,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더욱이 2006년 발생한 지진으로 프람바난은 또다시 피해를 입었지만 이후 복원 원칙을 정했다. 원래의 위치가 확인되는 석재만 재사용하고, 위치나 결합 방식이 불명확한 석재는 확인될 때까지 복원을 중단하겠다는 아니스타일로시스(Anastylosis) 원칙을 채택하였다. 그래서 복원 속도가 매우 느릴 수밖에 없고, 주변부에 위치한 다수의 사원들은 사실상 복원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마치 폐허처럼 보이지만, 그들 나름의 원칙을 준수하며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유지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방문하자마자 유네스코 등재된 유적지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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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 단지 내에 터만 남아있거나, 파괴된 석재 일부만 남아 있는 모습들




프람바난 이곳은 9세기 자바 사회가 어떤 조건 위에 서 있었는지, 그리고 권력이 어떤 종교를 선택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 건축물이다. 화산이 준 피해와 화산이 만든 농업 생산성, 해상 교역을 위한 경제적 흐름의 변화, 중앙 권력의 변화, 그리고 종교를 통치 도구로 활용한 정치 문화가 동시에 존재했기에 프람바난은 가능했던 것 같다. 언젠가 모두 복원된 순간에는 숨겨진 역사적 배경을 더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