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유행 이야기
올해 패션 트렌드는
90년대 스트릿 무드!
위 말은 2018년에 주를 이룬 패션 기사 타이틀이었습니다. 2018년에는 패션 관련기사에서는 '90년대' '레트로' '스트릿 무드' '돌고 도는 유행' 등 유행 회귀와 레트로 패션 키워드로 가득 찼었지요. 실제로 90년대를 주름잡았던 스포츠 브랜드 휠라는 90년도 클래식 모델 라인을 살렸습니다. 타미 힐피거, 게스, 리복, 카파, 아디다스 오리지널 등 90년대 인기 있었던 브랜드들은 90년대 감성을 살린 디자인을 내세웠습니다. 커다란 브랜드 로고가 박혀있는 티셔츠가 대표적인 예죠.
2016년에서부터 옷 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90년대를 소환했습니다. TV 드라마에서는 '응답하라 시리즈'로 4, 50대 시청자들은 그 시절을 그리워했습니다. 음악에서는 레트로 감성이 돋보이는 레코드 LP판,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만들어 희소한 욕구를 자극했지요.
디자인에서도 레트로 폰트가 심심치 않게 보이고 90년대 홍보 포스터를 만들어 유쾌한 홍보물을 만들어냈습니다. 뮤직비디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수 지코와 아이유의 듀엣곡 'SoulMate', 밴드 혁오의 '하늘나라'의 뮤직비디오를 보면 90년대 감성이 물씬 풍기는 빛바랜 필름을 의도적으로 연출한 듯한 영상미를 보여줬지요.
침대 가구 브랜드 시몬스는 '시몬스 테라스'라는 복합 문화공간에서 80-90년대 레트로 게임 등 아날로그 디지털을 주제로 한 레트로 스테이션(Retro Station) 전시를 진행했었습니다.
매체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로 길거리로 나가면 90년대 무드를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나이키 에어맥스 97, 구찌 빅 로고, 통이 넓은 연청 청바지, 배바지 스타일, 벨보텀 팬츠, 오버사이즈 재킷 등 익숙하면서도 낯선 스타일을 가까이에서 마주합니다.
매체와 길거리가 말한 것처럼 실제로 90년대에 나타난 것들이 맞을까요? 놀랍게도 조금만 찾아보면 지금과 90년대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쵸크, 숏비니, 카키색 항공점퍼는 1995년에 개봉한 영화 '레옹'에서 주인공 마틸다와 레옹이 착용했습니다. 정점을 찍고 있는 오버사이즈 재킷은 90년대 초반 배우 위노나 라이더와 조니 뎁이 멋스럽게 입은 사진이 있지요. 90년대 벨보텀 팬츠, 와이드 팬츠, 오버사이즈 청바지는 90년대 우리나라 음악방송에서도 등장했었습니다.
베트멍의 2014년도 F/W 컬렉션을 기준으로 통이 넓은 바지와 나팔바지가 스키니진을 길거리 밖으로 밀어냈습니다. 영원할 줄 알았던 스키니 팬츠는 줄어(skinny) 들고 와이드 팬츠는 늘어(wide) 나고 있지요. 위에 말한 것들 말고도 페니 백, 올드스쿨 룩, 틴트 선글라스 등 다양한 90년대 상품과 스타일이 2018년 길거리를 점령했습니다. 저는 길거리를 보면서 '정말 유행은 돌고 도는구나'했습니다.
어떤 학자는 20세기 유행은 10년을 주기로 반복되어 나타나는 20년 주기 이론을 제시했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자라면서 본 스타일에는 덜 새롭게 보고, 이것을 새롭게 보기 위해서는 최소 20년이 필요하다고 했죠. 'VOCATIV ANALYSIS' 자료에 의하면 닥터 마틴 슈즈와 플란넬 셔츠는 92년도에 등장해 21년 뒤에 다시 등장했고, 초커는 97년도에 등장해 2015년인 19년 뒤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 외에 벨보텀 팬츠, 크롭탑 등 다른 아이템들도 20년 내외로 다시 유행했습니다. 패션 저널 FIB(Fashion Industry Broadcast)에서 'The 20 year Trend Cycle : What is Next?'라는 기사에서는 '20년 규칙'을 언급합니다. 20년 규칙은 패션업계에서 가장 주기적인 움직임이고 현재 인기를 누리는 상품이 20년 후에 다시 유행한다는 개념입니다.
누군가는 20년 주기 이론은 21세기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빨라진 현대 소비문화와 디지털 사회에서는 다양한 상품을 쉽게 접하고 유행을 빨리 소비하여 유행 생존 기간이 짧아졌습니다. 현재 유행은 빠르게 없어지고 다음 유행도 그만큼 빠르게 나오죠. 이렇게 가속화된 현대 소비문화에 유행 주기는 20년보다 줄어듭니다. 하지만, 위에 이야기들로 보면 20년 주기 이론은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유행은 현대 소비문화 때문에 20년 주기로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겠죠.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유행 주기가 길든 짧든 유행은 다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유행이 돌고 돌까요? 옷을 공부하면서 알게 된 점은 유행이 돌고 도는 것도 있지만, 옷 그 자체도 돌고 돈다는 점입니다. 이게 과연 무슨 말일 까요? 옷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옷 자체가 돌고 돌까요? 한번 유행과 옷이 돌고 도는 이유를 살펴보죠.
첫 번째, 디자인의 한계
성경에서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고 했습니다. 철학자 볼테르는 독창력은 '사려 깊은 모방'이라 했고,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창조성은 그저 사물들을 연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왜 이 말들을 했을까요? 옷에서도 더 이상 순수한 디자인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의류 디자인은 고대부터 이십 세기까지 대부분 등장했습니다. 고대 로마의 튜닉과 이집트의 로인클로스 같은 옷들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고대 로마의 튜닉은 현대 원피스와 티셔츠를 닮았습니다. T자 모양으로 팔과 몸통을 넣을 수 있고 길이는 허벅지까지 내려옵니다. 롱 티셔츠 혹은 원피스의 시초인 거죠. 이집트의 로인클로스는 천을 허리에 한두 바퀴 감싸 입는 하의였습니다. 로인클로스 디자인은 현대의 스커트와 디자인이 비슷합니다. 롱 스커트, 랩 스커트, 주름 스커트 등 다양한 디자인의 스커트가 이집트에서부터 이미 등장했었습니다.
고대 때부터 시작하여 20세기에 이르러 모든 디자인이 나오면서 이제는 더 이상 순수한 디자인은 없는 거죠. 새롭다고 말할 수 있는 디자인은 볼테르가 말한 것처럼 모방에 의한 결합 혹은 본래 디자인의 각주로 나올 뿐일 겁니다. 대부분의 패션 디자이너는 가장 잘 나가는 브랜드의 트렌디한 디자인을 모방하거나 과거의 것들을 참고하며 디자인을 만듭니다.(패션 디자이너 분들을 지적하는 게 절대 아닙니다..! 디자이너 분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실 거예요.) 지난 디자인을 참고하지 않아도 머릿속에 있는 디자인은 이미 옷의 역사에서 나왔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디자이너들은 새로운 소재를 개발을 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잡아간다고 하죠. 이렇게 새로운 디자인이 없어 이전에 있었던 디자인을 모방하다 보면 결국 어떤 시기의 유행과 이전에 나온 옷의 실루엣, 패턴, 텍스타일 디자인, 소재를 마주칠 수밖에 없습니다. 팔과 상체를 가리고도 남은 베트멍의 오버사이즈 옷도 이미 디자이너 마틴 마르지엘라가 매종 마틴 마르지엘라(masion martin margiela) 2000년 S/S 'Size 74'컬렉션에서 만들었죠. 그 당시 매종 마틴 마르지엘라의 오버사이즈 옷은 베트멍의 오버사이즈 옷과는 다르게 유행하는 옷은 아니었습니다. 너무 앞서 나갔는지 그 시대 대중에게 외면받아 길거리에서 보기는 어려웠지만 패션업계에서는 화두였고 옷 역사에 남을 일이었습니다. 베트멍의 헤드 디자이너인 뎀나 즈바살리아는 마틴 마르지엘라의 오버사이즈 옷에서 영감을 받고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참고로 뎀나 즈바살리아의 스승이 마틴 마르지엘라입니다. 뎀나 즈바살리아는 브랜드 매종 마틴 마르지엘라에서 일했었죠.)
누군가는 두 개 이상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디자인이 새로운 디자인이라고 말합니다. 또 누군가는 똑같은 디자인에 점 하나 찍어도 새로운 디자인이라 말하죠. 하지만, 무에서 유로 만들어진 디자인이 순수 디자인이라면 옷 역사에서는 새로운 디자인은 없을 겁니다.
두 번째, 신체의 한계
옷은 신체를 존중하며 만들어집니다. 사람의 활동성, 편의성, 신체구조를 배려해야 옷다운 옷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이즈에 맞지 않는 옷은 애초에 구매하지 않거나 버려지는 것처럼 사람을 존중하지 못한 디자인의 옷은 선택받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신체 때문에 디자인의 한계가 정해져 있습니다. 베트멍의 오버사이즈 옷도 손과 엉덩이를 가리고 남을 정도로 길게 했지만 편의성의 끝에서 디자인을 멈췄기 때문에 사람들이 구매했습니다. 만약 바지 길이가 정말 길어 걸어갈 때마다 그 바지를 계속 밟는다면 이게 아무리 최신의 옷이라 해도 입을까요? 스키니진도 끝없이 스키니 해졌으면 신체를 더욱 압박하여 활동성을 낮추고 신체 건강을 더 크게 위협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과도한 불편함을 느끼면서까지 옷을 입지 않습니다.(적당한 불편함은 감수합니다. 여름에 쓰는 비니 모자가 예시가 되겠죠). 신체라는 한계가 있다 보니 이전에 등장한 옷과 마주칠 수밖에 없습니다. 신체의 한계를 넘어선 옷들이 한 때는 유행했어도 그 옷이 다시 유행을 타서 돌아오지는 못합니다. 예를 들어 아래에 19세기 중반에 유행했던 '크리놀린'이 있습니다.
당시 여성들은 계급 간의 구별짓기 또는 같은 계급 간의 성적인 매력, 부와 명예를 과시하기 위해 크리놀린을 더욱 화려하게 꾸미거나 크기를 늘렸습니다. 크리놀린은 고래 뼈와 철사가 옷의 틀인데 계급간 기괴한 경쟁으로 옷의 불편함이 늘어나 많은 여성들을 괴롭혔고 심지어 죽음으로까지 몰았죠. 예를 들어 계단에서 치맛자락을 밟고 넘어지거나 치맛자락이 기계에 끼어서 톱니바퀴에 끌려가거나 크리놀린 때문에 강풍에 휩쓸려 가기도 했습니다. 그중 가장 위험한 것은 불이었죠. 당시 서양은 벽난로가 흔하게 있어서 워낙에 큰 크리놀린에 쉽게 불이 옮겨 붙었습니다. 크리놀린이 한참 유행할 시기에 크리놀린에 불이 붙어 죽은 여성들이 전 세계 통틀어 40,000여 명 가까이 되었다고 합니다. 1840년대부터 1860년대까지 꽤 오랫동안 유행하여 입었지만 그 이후로 길거리에서 보이지 않았죠. 이처럼 신체를 존중하지 못한 옷들은 자연스럽게 없어집니다.
디자인과 신체의 한계는 유행 회귀보다는 옷 회귀에 가깝습니다. 크리놀린도 지금은 입지 않지만 오트 쿠튀르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해서 등장합니다. 사람들이 입지 못해 유행이 아닐 뿐, 크리놀린은 지금도 극소수의 디자인으로 등장하죠.
세 번째, 패션업계의 안정적인 투자 그리고 노스탤지어
패션업계의 규모는 입이 벌어질 정도로 천문학적입니다. 2017년만 해도 글로벌 패션시장규모는 한국 돈으로 2,000조 원을 넘었습니다. 한국 패션업계만 해도 2016년에 패션시장규모가 대략 40조 원 중후반이었습니다. 그만큼 패션 기업과 브랜드들은 어떤 옷을 만들고 어떻게 홍보를 하고 어떤 마케팅을 해야 할지 신중합니다. 하나라도 실수하면 엄청난 손실과 적자를 껴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초창기의 유행 흐름은 몇몇의 트렌드세터가 보여주는 유행으로 흘러갔습니다. 패션에 음모론이 있다고 느낄 만큼 패션의 첨단에 위치한 사람들이 가져온 유행을 그대로 흡수하고 따를 수밖에 없는 일방적인 흐름이었죠. 그래서 옷을 판매하는 방식이 쉬웠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세계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가치관이 다양해지면서 개개인의 정체성과 개성이 중요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현재 패션 트렌드가 많아지고 복잡해져 관찰과 예측이 어려워졌죠. 거기다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어떤 유행이 극에 달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싫증을 느낍니다. 디자이너, 패션 MD, 마케터, 스타일리스트 등 패션 실무자들은 안개 같은 트렌드와 본인들도 모르는 소비자의 욕구를 예측해야 하는 어려움에 빠지죠. 패션업계는 어떤 상품이 시장에서 잘 팔리지 예측하기 어렵고 안정적인 투자를 원하며 더 이상 아이디어가 없을 때, 과거 크게 유행했던 상품을 모방하는 전략을 취합니다. 이미 이전에 성공을 거둔 상품들이라 큰 손실 없이 안정적인 투자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레트로 상품이 유행할 때 몇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경기가 좋지 않은 점, 패션업계 타겟층은 레트로 상품을 접했던 기성세대와 레트로 상품을 처음보는 10-20대라는 점입니다. 시대 경기가 좋지 않으면 모두가 소비를 줄이겠지만 기성세대가 10-20대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이 소비합니다. 따라서 기성세대의 취향을 노리는 것이 안정적으로 수익을 얻을 수가 있죠. 그리고 경기가 불황이면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과거를 그리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재가 암울하니 과거의 좋았던 추억을 떠올리게 되죠.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 응답하라 시리즈 등 기성세대의 추억을 자극하는 레트로 프로그램이 반응이 좋았던 이유입니다. 기성세대에게는 레트로 문화상품이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추억을 자극하고, 10-20대에게는 새롭고 신선한 것으로 다가와 젊은 층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입니다. 젊은 층은 경제 상황에도 민감하고 트렌드에도 민감하기에 돈이 없어도 새롭고 끌리는 상품이 있다면 돈을 절약해서까지 구매하죠.
글로벌 검색 엔진 구글에서 2018년 사람들이 패션 관련해서 검색한 키워드 1위가 80년대 패션, 2위가 그런지 스타일, 3위가 90년대 패션, 4위가 2000년대 패션이었습니다. 구글은 이를 한데 묶어 '노스탤지어 트렌드'라고 소개했습니다. 이러한 검색 현상을 보고 당장의 괴로움을 잊고 따듯했던 옛 추억을 그리워한다는 사람들의 심리라는 시각이 있었고, 패션 디자이너들이 디자인의 고갈로 이전 것들을 모방한 결과라는 시각도 있었습니다. 어떤 시각으로 유행을 분석하든 확실한 건 우리는 유행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행은 탄생하고 소멸하고 다시 또 다른 유행이 생깁니다. 유행 개별로 봤을 때는 유행은 사라지지만 유행 현상은 점이 연결된 선과 같아서 연속적입니다. 또한, 더 이상 앞을 예측할 수 없을 때 또다시 패션업계는 이전 유행을 소환해 유행시킬 것입니다. 패션은 <패션이란 무엇일까?> 챕터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컴퍼스와 닮았습니다. 자신이라는 축을 중심으로 곡선으로 나아갑니다. 유행이라는 하나의 원을 그리는 주기가 과거보다 현대가 더 빨라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속도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패션은 이전의 자기 모습을 마주하고 모방하며 나아갑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패션의 본질은 새로움이지만 낡고 익숙해져 과거로 보낸 것에서 다시 영감을 받거나 소환한다는 것입니다. 패션의 세계는 유행을 포함해 모순적인 모습들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