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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 Feb 08. 2020

지금과 먼 미래 사이의 시간

설이나 추석을 비롯해 언제고 집에 내려가기 전이면 효자는 못돼도 효자인 척은 하고 오자고 마음을 먹지만, 막상 집에 도착하면 이 마음을 되살피기가 쉽지 않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닌데, 항상 먹는 것 때문에.


현아, 이거 좀 먹어봐라.


집에 도착한 순간부터 이 말이 시작된다. 밥을 먹기 전에는 뭐 먹을래, 밥 먹으면서는 이거 좀 더 먹어라, 밥 먹고 나면 과일 안 먹나, 커피 한잔 타 줄까. 그 이후에도 식혜며 강정을 가리키며 맛 좀 보라는 이야기. 처음 한두 번은 웃으면서 아니라고 괜찮다고 하다가, 서서히 굳는 표정을 숨기며 정말 안 먹을 거라고 손사래 치고, 그렇게 참다 참다 기어이 한 번은 짜증을 내고 만다.


먹으라 소리 좀 그만하라고!
진짜 안 먹는다고! 제발 먹으란 소리 그만 좀 하라고.


이번 설도 여느 귀향과 다르지 않아 엄마와 이런저런 실랑이를 하다가 가벼운 짜증을 냈는데, 엄마가 이야기했다. 이 말을 듣는 때가 그리운 순간이 올 거라고. 나중 되면 이 이야기도 그리울 때가 올 거라는 말까지도 평소의 레퍼토리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말의 뉘앙스가 미묘하게 달랐다. 어딘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조금만 있으면 자연스레 이야기해줄 걸 알아서.


아니나 다를까. 같이 커피를 한잔하며 엄마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엄마는 요즘 지자체의 요양보호사로 소일거리 중이시다. 사이버대학교에서 사회복지 학사를 획득하시고 전공을 살려 노인 분들 집에 방문해 청소나 설거지를 대신해주고, 말동무 역할을 하는 일이다. 그러니 설 전에 일이 꽤 바쁘셨다는데, 곧 가족들이 방문할 어르신들의 집이니 좀 더 신경 써서 청소하고 정리했다고 하셨다.


이러는 중에 한 어르신과 말동무하는 중에 들은 이야기라고. 어르신도 지금보다 좀 더 건강할 적에 아들딸이며 손주가 올 명절을 앞두고서는 바쁘게 장도 보고 음식도 준비해 먹이는 게 명절의 낙이었단다. 그런데 이제는 다르다고. 마음이야 전과 다르겠냐만, 이제는 도저히 몸이 따라주지 않아 음식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그래서 아들딸 내외가 음식을 준비해와 함께 나눠먹는 걸로 대신한다고 이야기하셨단다.


먹으라는 소리에 짜증 내는 지금에 관해선 잘 알고 있고, 엄마를 아주 볼 수 없게 되는 먼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해본 적이 있다. 하나 그 사이에 있을 시간이 어떨지는, 아직 상상해본 적이 없다. 사소한 슬픔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시간일지, 아니면 커다란 슬픔을 대비하는 정리의 시간일지. 혹은 두 경우 모두 틀리지 않아 사소한 슬픔이 커다란 슬픔을 대비하는 완충 역할을 하게 될지.


혼자 상념에 빠져서 이런 생각을 한들, 계속 먹으라 하는 엄마의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은 나 역시 계속 거절하다가 종종 짜증 내곤 할 터다. 이러면서도 아주 조금씩 바뀌려나. 먹으라는 이야기를 덜 하는 엄마에 조금씩 짜증을 줄이는 나의 모습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우리의 이야기도 달라지다가, 어느 순간에 돌아보면 옛날에는 정말 안 이랬는데 라고 말하는 순간이 오려나.


어떤 일이 있건 마지막에 돌아보면 항상 아쉬움의 쓴맛이 남는다. 조금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며. 그래서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지든 마지막 순간이 오면 나는 스스로 자책하고 후회할 수밖에 없는 아들로 남을 텐데, 그래서 나는 효자가 될 수 없을 텐데, 벌써 이런 생각을 할 필요는 없겠지. 당장 오늘 전화 한 통 더 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겠지.

illustration by B. DRA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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